[7년 세계일주 #2]
이토록 절망적인 여로가 없었다. 서릿발 치는 바람과 작열하는 태양, 고산과 사막 기후가 공존하는 전혀 새로운 공간, DNA에 박힌 본능도 어느 장단에 맞춰 생체 조절을 해야 할지 헷갈려하고 있었다. 여기는 해발 4500m 볼리비아의 고원 지대. 나는 지금 기세 좋은 추위와 열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광야를 달리고 있다. 시선이 더 나아갈 수 없는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길을 말이다.
며칠째 비타민과 수분 섭취가 온전치 않아 입술은 부르트고 피부에 고름 낀 딱지가 생겼다. 거칫한 몰골은 산 사나이를 방불케 한다. 고산지대에서 무리한 라이딩riding으로 인한 두통과 어지러움에 숨을 할딱거리고 보면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닌 자연에 종속된 하나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고원의 삶은 실로 놀랍다. 무(無)의 현현이다. 생명체라곤 바람에 쓸려가는 마른 풀밖에 보이지 않는다. 대지 위에 한 점 먼지 같은 존재로 남아있는 순간의 풍경은 몽환적이다. 지나온 길을 반성하게 하고, 앞으로 갈 길을 꿈꾸게 한다. 그러나 지독한 여정을 감내해야 하는 나그네는 절망을 거둘 수가 없다. 추위나 배고픔 때문이 아니다. 외로움이 나의 모든 감정을 공허함으로 채워버렸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리웠다. 여행은 결국 사람을 만나기 위해 떠나는 길이다. 새로운 관계를 통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나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풍경은 내 눈으로 찍고 기억에서 현상할 수 있다. 사람은 남의 삶이 나에게 전이되는 짜릿한 일탈과 깨달음을 안겨준다. 낯섦을 포용하고 다름을 받아주는 인생 공부가 바로 여행이다. 그래서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어느 날 내 심장이 대지 위의 말발굽 소리처럼 쿵쾅거렸다. 저 멀리 아주 작은 움직임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토록 반가운 생명의 숨결이 남아 있다니! 나는 당장 자전거를 세워놓고 뛰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거리에서 나는 고함을 치며 그들을 불러 세웠다. 부족 전통 의상을 입은 노파는 예정 없는 이방인의 방문을 놀라워하는 눈초리다. 주위에는 수백 마리의 양 떼가 있었다. 중간중간 알파카도 보였다.
남미에서도 가장 가난한 인디오 부족으로 알려진 ‘초로(cholo)’였다. 땋은 머리 위에 모자를 쓰고, 보따리를 등에 맨 남루한 차림으로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사람들. 겹으로 주름진 치마는 기혼을 의미하는데 도톰한 천이 추위를 막아주므로 고원 생활에 안성맞춤이다. 하루 종일 양 떼에게 풀을 먹이며 수 km를 이동하는 그들의 삶은 방랑 그 자체다. 자연을 개발해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적응하며 조화를 이루기에 모든 것을 누리는 삶이 된다.
나는 인디오를 만나고서 가장 먼저 살았다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정신의 안락함을 파괴하는 지독한 고독 속에서 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났다는 건 크나큰 감격이었다. 비록 케추아 어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짧은 스페인어로도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며 바라볼 수 있었다. 바벨탑을 쌓은 대가로 신은 인간의 언어를 갈라놓았지만 진심만이 통할 수 있는 느낌은 남겨 놓았으리라.
늙은 여인의 인디오는 혼자 몸이었다. 남편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집을 나가 버렸고, 자식들은 이미 다른 마을로 출가했다. 이 너른 광야에 친구도 없었다. 그녀에겐 양들이 가족이자 재산, 아니 그녀 자신이었다. 무엇이 그녀를 이런 모진 삶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걸까. 아니다. 어쩌면 그녀는 지상 최고의 평안과 자유를 만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는 메마른 바람이 휘감아 도는 둔덕 뒤편에 조악한 판잣집 한 채와 마른 빵이면 하루를 나기에 충분했다. 이것이 그녀의 삶이고, 그녀의 진리였다. 나는 서늘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던 인디오와 작별을 구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그러면서 내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물어보았지만 내 안에서 경망스레 울리는 답에 어쩐지 척연해졌다.
해거름 무렵,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아주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자전거는 붉게 먼지 범벅이 되었고, 지친 나는 숙소를 찾았다. 하지만 스무 가구 남짓 사는 인디오 마을에 여인숙이 있을 리 없었고 나는 밤을 맞으며 추위에 오들오들 떨어야만 했다. 하는 수없이 동토 위에 텐트를 치리라 마음먹었을 때, 별안간 깊게 팬 주름위로 넉넉한 인자함이 풍기는 여인이 자신의 2층짜리 흙집 창문을 통해 나를 불렀다.
초로 부족이면서도 스페인어가 가능했던 그녀는 오늘 나에게 보낸 하늘의 선물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혼자서 쓸 방을 내어줬고, 고지에서 구하기 힘든 귀한 씻을 물까지 대접해 주었다. 그뿐인가. ‘사투’라는 단어가 과장되지 않는 볼리비아 고원 자전거 여행길에서 초췌해진 모습에 삶은 옥수수까지 내어왔다.
게다가 늦은 밤, 요의(尿意)로 밖을 나온 나는 그만 넋을 놓고 말았다.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와인처럼 검붉은 포도색의 하늘 속에 촘촘히 박힌 수천 개의 화려한 별꽃들이 피운 걸 보았기 때문이다. 그 아래에서 보낸 감동의 시간을 어찌 둔탁한 글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비록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고지대의 이유로 불면에 시달려야 했지만 여인의 따뜻한 배려를 묵상하며 행복할 수 있었다. 어쩌면 건조함 때문이 아니라 황홀한 고원의 밤을 가슴이 느끼는 잔상으로 남겨두기 위하여 나는 길고 긴 밤을 사색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순간 사랑을 알고 별을 노래하는 초로족이 되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가족들 모두 밖으로 마중 나와 잠깐 머물다 떠나는 나그네를 향해 환한 미소와 함께 힘껏 손을 흔들어주었다. 코흘리개, 울보, 누런 이빨의 개구쟁이, 늦잠꾸러기, 수줍은 미소. 모두 평생 추억으로 간직될 인디오 친구들의 아름다운 이름이었다.
각자가 딛고 서 있는 삶의 무대에서 '환대'의 빛이 비췄으면 좋겠다. 조금 더 따뜻했으면 좋겠다.
그냥 이름을 불러주고, 인사 한 번 건네면 된다. 그것부터가 시작이다.
환대가 당신의 삶에 들어오는 순간,
이전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세계관의 확장을 경험하게 된다.
당신의 존재가 환대받고 싶은가?
당신도 누군가를 기꺼이 환대할만한 충분히 멋진 사람이라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 M.diary(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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