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여행자들은 꿈꾼다. 낭만으로 점철된 여행지에서의 하룻밤. 로맨틱이 성립되는 요건은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풍경인 곳일 수도 있고, 전혀 낯선 곳에서의 끌림일 수도 있고, 또 마음을 세차게 흔들어 놓는 누군가와의 만남일 수도 있겠다. 자유로운 발걸음을 옮기다 맞닥뜨린 생경한 풍경은 소속과 직책으로 정의하는 나를 해체시키고, 존재적 환대를 경험한 순간의 기억은 온기가 되어 다시 그곳을 찾게 만든다. 이렇게 일상에서 한 발짝 비켜 미묘하게 찾아드는 그 설렘이 여행하는 이유이지 않을까.
그런데 밤늦은 거리의 골목길 외등 하나, 잠몰하는 태양이 비추는 쇠락한 해안 시골 마을의 고즈넉한 풍경, 노동으로 다져진 근육미를 뽐내며 삶의 현장에서 분투하는 어부의 열정, 낯선 이방인에게 환대의 기쁨을 선사하며 친구가 되어준 여러 종교 지도자들의 평화로운 미소, 이제는 그 어느 것 하나 마음 놓고 사진 찍을 수 없게 되었다. 코로나 19는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어떤 문화나 관습들은 다시 이전으로 회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당분간 세계여행은 모두에게 버거운 미션이 되었다. 하여 오랜만에 옛 여행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본다. '그때 그 자리에 내가 있었고, 나는 열정적인 꿈을 꾸었으며, 방황 속에서도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열병을 앓고 있었구나.'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고, 또 선명해지는 동시에 아련해진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맞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이탈리아 베네치아(Venezia). 나폴레옹이 '유럽 최고의 살롱'이라 말한 곳, 누군가에겐 분명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으로 더 기억되는 곳이다. 118개의 섬들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진 이 수상도시의 수상한 매력에 빠져든다면 아마 이곳에 머무는 동안 빠져나오기 싫은 감동을 느낄 것이다. 실은 이미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을 비롯한 비슷한 분위기의 여러 도시를 지나쳤기에 베네치아에 대한 기대치를 조금 낮췄다.
하루 동안 베네치아(베니스)에서 사람을 보고, 바다를 보고, 수상 골목을 보고, 곤돌라를 보고 그리고 나를 봤다. 화장실 이용료 2유로(당시 한화 약 3000원) 압박에서 볼 수 있듯 관광도시의 횡포라고까지 생각되는 물가만 뺀다면 곤돌라를 타거나, 호젓이 걸어보며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가난한 자전거 여행자였던 나는 전혀 배를 이용하지 않고(맡겨둘 데도 없고 도난의 위험도 있으니) 총 55kg 자전거를 밀고, 끌고, 들고 30여 개의 다리를 넘나 들었다. 식빵 4조각과 '악마의 잼' 누텔라와 물로 아침을 챙기고, 점심은 건너뛰었지만 그마저도 청춘이라는 이름 앞에선 낭만으로 점철된 하나의 호기였을 뿐이다.
베네치아에서 문득 아프리카 탄자니아 동부에 위치한 탕가(Tanga) 근처의 어느 작은 해안가 시골 마을이 떠올랐다. 언젠가 그곳에서 두 시간여 배를 빌린 적 있다. 사공이 돛을 이용해 바람을 타니, 무동력 배는 대자연 속 한 점 획이 되어 대서양 바다로 나갔다. 쪽빛 바다를 가르는 순간 나는 더없는 설렘에 아이처럼 마냥 신이 났었고, 고단한 세월의 흐름이 아로새긴 주름 깊은 아저씨의 표정 또한 낯선 이방인에게 기쁨을 선사한다는 것에 대해 몹시 상기되어 있었다. 바람이 이보다 더 시원하고, 마음이 이렇게도 자유로울 수 있을까. 콜라를 챙겨 오지 않은 것만 빼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사공은 돈과 관계없이 원하면 배를 더 태워주겠다고 했다. 관광지가 아닌 정말 외딴 시골이었기에 그는 돈을 받고 품을 파는 손님이 아닌 함께 있으면 좋은 친구로 대했던 것이다.
베네치아의 관광명물인 곤돌라(Gondola) 역시 손님을 태우고 도시 구석구석을 유랑하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다. 보통 곤돌리에(사공)와 협상을 하는데 자존심과 배짱으로 똘똘 뭉친 그들은 배 한 척당 70-100유로를 요구한다(2011년 기준). 어떤 곤돌리에는 서비스로 성악을 해주거나, 악기를 연주해 주기도 한다. 이 지역과 관련된 전설과 문화 따위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들에게도 먹여 살릴 가족이 있을 테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오늘 하루를 버텨야 할 의미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오늘 만나는 내가 될 수도 있다. 어떤 손님을 만났는지, 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사공들은 그날 저녁 식탁에서 자기 아내에게, 아이에게 그리고 노모에게 조곤조곤 얘기할 것이다. 곤돌리에는 몇 천 날을 이렇게 담담하게 보내며 차근차근 베테랑으로 만들어진다.
베네치아 거리. 수많은 인파로 인해 느긋하게 도시 감상하긴 글렀지만, 대신 그 수많은 인파를 감상하는 재미가 있기도 하다. 나처럼 혼자 온 이는 드물었던 듯. 더군다나 자전거를 끌고 온 사람은 보지 못했다. 지금은 코로나 19로 인해 한산할 듯.
베네치아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산 마르코 광장. 왼쪽으로 돌아가면 너른 광장이 나온다. 곤돌라를 보는 재미도 있지만 광장 한편에 조용히 앉아 노상 식사를 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 풍경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광장을 안방처럼 활개 치고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삼촌 미소가 절로 나온다. "마음껏 뛰어라, 노는 게 남는 거야."
산 마르코 성당(Basillica San Marco). 베네치아를 돌보는 수호성인 산 마르코의 무덤을 덮은 교회. 오른쪽으론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
여행자들이 붐비는 곳을 벗어나 따로 걷다 보면 고즈넉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난간에 기대 막연히 공상에 빠져도 좋을 그런 농밀한 분위기.
곤돌라 선착장. 타기 전 기대와 타고난 후 소감이 같다면 행복하고, 다르다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사실 곤돌라에 대한 성질을 물을 것이 아니다. 누구와 함께 타느냐가 중요하다.
관광지 어딜 가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광대들. 그들이 사람들을 웃기면, 함께 사진 찍은 사람들은 '팁'으로 그들을 웃긴다. 날씨가 더웠던 걸까, 수입이 적었던 걸까, 아니면 일이 고단했던 걸까. 익살스럽게 웃다가 가면을 벗고 땀을 훔치는 광대 표정은 축 처져 있었다.
질서를 담당하는 경찰들. 이탈리아 공무원 부패 지수가 상당하다고는 하나, 외양만 보자면 포스 있어 보인다.
루트는 얼마든지 협상할 수 있다. 어떤 곤돌라는 수상 골목에서 빠져나와 바다로 향하기도 한다. 그러나 파도가 거세니 너무 멀리 가지 않고, 베네치아의 스카이 라인(?)만 보고 들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음에 오면 한적한 수로 위주로 요청해도 좋겠다. 그리고 정중히 노래를 부탁해, 나와 함께하는 이들과 즐거이 듣는 감동을 만끽하고 싶다.
곤돌리에로 곤돌라를 몰아보고자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욕심일까? 아마도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겠지만 없어도 어떠랴? 그저 노 한 번 서툴게 젓는 것 역시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텐데.
'아들 하나, 딸 하나의 좋은 예. jpg'. 역시 아들내미 손잡고, 딸내미 무등 태우고 타이거즈 & 이글스 유니폼 챙겨 야구장 가는 게 진리.
도도한 아이의 화려한 패션. 고(高) 물가 고(高) 낭만 베네치아 여행, 금전적 여유만 있다면 조금 더 머물고 싶은 곳이다. 사실 하고 싶은 얘기가 조금 더 있다. 그런데 낭만노숙으로 다닌 여행이라 지금 보니 왠지 좀 처연하게도 느껴진다. 그래도 그때 그 시절이 좋았다. 남들의 시선과 사회적 프레임의 굴레를 벗어나 진정 하늘과 바다, 강과 숲, 햇살과 소나기 그리고 눈을 맞으며 자유로운 날들로 마음껏 평안을 누렸다. 무엇보다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기억에 남는다.
'끌림'을 쓴 작가 이병률은 이곳에서 한 달이나 머물렀단다. 그의 탁월한 글쓰기가 베네치아의 감성을 접하지 않고서는 써지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만큼 어딘가 익숙한 눅눅한 낭만이 녹아있는 곳, 로마를 포기하면서까지 들른 곳, 로맨틱의 대명사 베네치아, 제 점수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