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세계일주 #7]
어느 날, 당신의 여행에 뜻밖의 환대가 찾아온다.
“글쎄, 들어오라니까!”
머뭇하던 내게 직원들이 환한 표정을 짓는다. 호객이라기엔 지나치게 깔끔하고, 교양 있다. 굳이 여행자를 등칠만한 어떤 민감한 불편함도 감지할 수 없다. 게다가 여긴 론니플래닛에도 나와 있는 이름 있는 호텔 아닌가. 단정한 차림의 남자들은 뭘 그리 망설이냐며 모닝커피 한 잔 하고 가라 제안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결정적인 넛지(Nudge), “아직 교회 문 안 열었어. 아마 2시간 후에 열거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a i Hercegovina). 구 유고 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중 하나였으며, 1992년 4월 5일 독립했다. 발칸반도에서 민족주의를 내세워 인종청소를 감행한 유명한 보스니아 내전으로 수도 사라예보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보스니아 전쟁을 취재하고, 그 이면에 감춰진 권력의 야만성과 인간의 야수성을 집요하게 파헤친 피터 마쓰의 책 '네 이웃을 사랑하라(Love Thy Neighbor)'를 무척 열정적으로 탐독했던 나는 이후 보스니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며 '샐러드 볼 사회(Salad Bowl Society)'로 살아가는 사라예보는 여행 난이도가 그리 높진 않다. 하지만 불편한 점도 있었다. 은행과 우체국 등에서 세르비아 화폐에 대해 환전을 해주지 않는 것이다.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그들의 가슴에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깊은 상처가 자리하고 있을 테니까. 독립을 방해하고,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인종 청소 감행한 이들에게 적개심을 거두고, 평화를 도모하자는 이야기를 꺼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일 것이다.
물론 일방적인 역사의 흐름은 없다. 세르비아 역시 과거 수세기에 걸쳐 오스만 제국에 당한 참혹한 치욕은 몇 대를 이어 절망적인 분노로 축적되어 있었을 것이다. 또한 현대에는 미국과 나토(NATO) 등이 발칸 반도의 지정학적, 역사문화적 헤게모니를 신중하게 톺아보지 않고, 자신들의 정치군사적 공세를 위해 세르비아를 그저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일들이 자행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세르비아의 보스니아에 대한 만행은 면죄부를 줄 수 없다. 인간성을 말살시킨 행위는 어떤 경우라도 정당화될 수 없다. 끊임없이 광기의 피의 축제를 열어젖힌 발칸의 화약고는 이제 조금 누그러진 긴장 속에 조심히 평화의 꽃을 피우는 모양새였다.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 외곽의 아파트에는 여전히 여기저기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었다.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역시 마찬가지다. 나토 공습으로 붕괴된 건물이 항의성 차원에서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헤게모니나 정치, 종교, 인종적 프레임 따위와 상관없이 이웃과 서로 평화롭게 잘 지냈던, 전쟁 발발과 아무 연결고리가 없는 주민들은 얼마나 큰 고통과 공포에 떨어야 했을까. 20세기 인류사에 가장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전쟁이라고 평가받는 무력한 절망 앞에 무려 27만 명 사망, 200만 명 난민 발생, 회교도 부녀자들에 대한 집단 강간, 스레브레니차 집단 학살 등을 기록한 이 잔혹한 현실은 불과 20여 년 전 일어난 일이다.
사라예보 도착 첫날 아침, 안개가 낀 다소 서늘한 날씨였으므로 윈드재킷을 걸쳐 입었다. 올드 타운으로 가기 위해 오랜 여정으로 지친 발걸음을 옮기던 중 정교회와 대성당 거리에 위치한 센트럴 호텔(Hotel Central) 직원들이 가는 방향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아침 7시, 아직 오픈까지 두 시간 여가 남았으므로 호텔 안으로 들어와 커피를 마시며 몸을 녹이란다. 게다가 무선 와이파이 사용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제안이다. 마침 직원 중 한 명인 에니스(Enis)의 아내가 한국 관광객들을 상대로 관광가이드를 하고 있단다. 그 말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었다.
정오가 가까워 올 때, 사라예보의 좁은 골목에서 별안간 누군가 나를 아는 체한다. 선하고 편안한 인상의 에니스의 아내였다. 이미 자전거 세계일주 중인 나에 대한 이야기를 남편에게 들었단다. 그녀는 마침 점심시간이기도 해서 그녀가 인솔하는 팀의 브레이크 타임이라 내게 밥을 사겠다고 제안했다. 순간 놀란 마음과 동시에 한국인 매너가 나와 두 차례 정중히 거절했다. 짧지만 우연한 만남에 정답게 인사를 나누고, 오후 햇살을 만끽하며 휴식 겸 콜라를 시켜 마셨다. 얼마 후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계산대로 향하자 직원 왈, "아까 그녀가 이미 계산하고 갔어요."
다음 날 아침 에니스를 다시 만났다. 사라예보의 올드 타운과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밀랴츠카강(Miljacka)의 라틴다리를 보기 위해서는 입지가 좋은 센트럴 호텔을 지나쳐야 했다. 여전히 친절한 표정의 직원들과 반갑게 눈인사를 건네는데, 밖에 있는 내게 에니스가 안으로 들어오란다. 어제처럼 커피를 대접하려나 싶어 오늘은 계산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스테이크가 나온다. 게다가 호텔 매니저까지 요란하게 인사를 건네며 오더니 모자를 선물한다. ‘대관절 어떤 이유로?’ 어안이 벙벙한 내게 직원들은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사라예보를 기억해 달라는 말을 남겼다. … 이렇게 사랑스럽고, 감격적일 수 있다니. 적어도 그들이 한 행동은 인종과 국가, 종교와 문화를 넘어선 평화를 요청하는 몸짓이었다. 그게 그렇게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전쟁에는 자비가 없다. 민간 시설은 물론 종교나 교육 시설도 공격에서 예외일 수 없다. 보스니아 대학 벽면엔 여기저기 총알 자국이 선명하다. 피터 마쓰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Love Thy Neighbor)'를 꼭 읽어보길 권한다. 전쟁을 일으킨다는 모든 명분이 얼마나 허황되고, 야만적이며, 구역질이 나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모든 불합리한 이성이 불합리하게 옹호되고, 효용적인 수단으로 사용되는 야수성이 얼마나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는 가를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그럼으로써 얻는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하는 과제를 안겨 준다. 어떤 경우라도 나는 인간이란 마땅히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고 여긴다.
깊은 아픔으로 신음하다 이제 조금씩 온기를 되찾아가는 보스니아. 그곳에서 만난 센트럴 호텔 직원들이 베푼 자비와 관용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 언젠가 다시 사라예보에 방문한다면 그땐 정식 호텔 투숙객으로 그들과 만남을 이어갈 생각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뿐인 아닌 한국에서 가져온 선물과 함께 고마운 마음을 표할 것이다. 구 유고슬라비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만행으로 씻기 힘든 상처를 입은 보스니아 국민이 오히려 낯선 이방 여행자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별 기술이 필요 없었다. 환대의 마음과 약간의 용기면 충분한 것이다. 보스니아 사라예보가 오랫동안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유다.
1. 여전히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보스니아. 건물 곳곳에는 오래전 내전의 흔적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2. 낯선 이방인에게 몹시도 친절하기만 했던 사라예보 센트럴 호텔 직원들 그리고 에니스(가운데).
3. "전쟁의 첫 번째 희생자는 진실이다.(In war, truth is the first casualty)" - 아이스퀼로스(Aeschylos)
4. 정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 예배 중엔 사람의 목소리만 울릴 뿐이다. 신자들은 교회에 들어와 성화에 입을 맞추고, 기도를 하며, 초에 불을 붙이는 의식을 한다. 이날 마침 주일이라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찾았지만 끝내 실패한 나는 정교회에서 대신 묵상하는 것으로 경건의 시간을 가졌다.
5. 올드 타운 초입에 위치한 보스니아 정교회. 보스니아에는 여러 종교가 어우러져 있지만 사실상 회교가 대세고, 올드 타운에선 무슬림을 많이 볼 수 있다. 도시 곳곳엔 성당이나 교회보다 모스크가 더 많이 세워져 있다. 표면적인 종교 갈등은 크게 보이지 않는다.
6. 사라예보 올드 타운. 찻집과 기념품 가게 등이 주로 열을 지어있다. 케밥 전문점 같은 터키식 음식도 많이 볼 수 있다. 이곳의 숙박료는 무난한 기준으로 약 30달러 선. 2020년 현재 1유로=1.96 KM(보스니아 통화 단위) 정도. 1KM은 약 700원.
7. 야외에서 두는 체스. 규모가 크니 꽤 재밌다. 시야가 넓으니 한 수 둘 때도 더 넓게 볼 수 있으려나? 공원에는 갖가지 놀이를 즐기는 어르신들이 많이 보인다. 퇴폐적이지 않은, 인생의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건강한 놀이문화가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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