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세계여행

새해 불꽃놀이 그리고 아이들의 미소

[7년 세계일주 #8]

by 시크seek
나고르노 카라바흐 공화국에서 맞이한 새해, 2012. 12. 31- 2013. 1. 1


나고르노 카라바흐(Nagorno-Karabakh) 공화국.


여행이 일상이 된 삶은 단조롭고, 때론 무료하다. 아르메니아의 겨울 아침은 늘 비슷했다. 잠을 뒤척이고 눅눅한 침대에서 일어나면 잿빛 하늘과 젖은 공기가 옷깃을 단단히 여미게 만든다. 딱딱한 빵과 멀건 우유로 속을 챙기고 밖을 나오면 그때부턴 사색의 시간이 되풀이된다. 하루 만 원이 채 되지 않는 경비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저렴한 숙식비에, 알아두면 편리한 여행자 정보들을 줄줄이 꿰뚫고 나니 아르메니아는 점점 장기 여행자의 무덤이 되어가고 있었다.


예레반 기차역 앞, 길을 따라 걸으며 낙엽을 밟았는데 어느새 수북이 쌓인 눈 위에 발자국이 새겨질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맛보던 갓 구워낸 시장 빵맛이 몹시 그리워도 좀처럼 이불속에서 나오기 싫어지는, 이른 저녁에도 상점의 불들이 꺼지고 텅 빈 거리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거리에 낭만적인 캐럴송이 울려 퍼지며 점점 깊어가는 겨울의 모습들. 그렇게 신참 여행자로 왔던 내가 고참 여행자가 되어 다른 여행자들을 챙기는 일상이 점점 지겨워질 때쯤이었을까.


아주 사소한 정보라도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을 좋아하는 일본 배낭여행자들의 노트 메모 속에서 나는 어느 작은 공화국의 정체와 여행 정보를 알게 되었다. 숙소에서 오랫동안 함께 지낸 일본 배낭 여행자(확실한 자기 의사를 피력하기보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평화주의자)는 “별 거 없는 땅인데 꼭 가 봐야 하는 땅이야.”라며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느낌상 이미 공표된 폐쇄적 답안지 같았으므로 나는 연말 즈음 아르메니아를 잠시 떠나 이곳을 탐험해보기로 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 ‘검은(카라바흐-터키어) 산악지대(나고르노-러시아어)’라는 낯선 이름은 묘한 기대감을 갖게 했다.


2013년 새해를 맞는다는 의미를 부여했으므로 2012년 12월 말에 들어가 구석구석 이 작은 나라의 내음을 맡고, 맛을 보고, 곰살궂은 표정으로 주민들을 만나고 싶었다. 자치 공화국이었기에 따로 여권에 스탬프를 찍고 들어간 나고르노 카라바흐 공화국의 첫 느낌은 깨끗한 하늘, 맑은 공기 그리고 황폐한 땅이었다. 하나 더, 사람들의 미소가 참 온화했었다는 것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언젠가 나고르노 카라바흐 여행기를 기록한다면 구체적으로 언급하겠지만) 실제로 볼만한 것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곳곳에 홀로 세워진 쇠락한 교회들과 오래되어 무너진 성, 낡은 가게에서 파는 갓 구운 빵에서 이곳의 역사에 서린 사람 사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어디를 가든 친절한 사람들의 표정과 태도 때문에 나는 겨울의 짧은 햇살 아래에서도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감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그곳에 머문 며칠간은 세계일주를 통틀어 가장 정적이었던 시간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여행한 곳에 대한 소식들은 늘 관심의 대상이다. 얼마 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사이에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벌써 한 달이 넘어가고 있고, 집계된 사망자만 100명이 넘는단다. 그런데 아직 본격적인 전쟁은 시작도 하지 않았단다. “아이들과 여성, 노인들이 죽어가고 있고, 마을의 남자들은 18세, 19세에 죽는다”는 현지 주민의 인터뷰가 절박하다. 터키와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 속에서 애꿎은 공화국 주민들만 고통받고 있다.


작지만 평화로웠던 땅, 가난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이 낯선 땅을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오랜만에 그때 그 기억들이 떠올라 사진첩을 꺼내 봤다. 역시나 내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짧은 만남 속에서 정이라고 하기엔 다소 얕고, 그렇다고 친절이라고 하기엔 그보다 진한 어떤 정서를 금방 기억해냈다. 수도 스테파나케르트의 사람들과 함께 신년 축제를 즐겼고, 이날 이곳에 머문 거의 유일한 이방인으로서 환대받았던 시간들. 다시 보니 더욱 그리워지는 표정들 때문에 마음 한쪽이 아려오고 있다.


"전쟁을 멈추지 않으면 전쟁이 우리를 멈추게 할 것"이라는 말을 가벼이 여기는 세력들 앞에 아이들의 미소는 언제까지 꽃피울 수 있을까? 세계여행을 하면서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어느 나라라도 나를 가장 웃음 짓게 만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모습은 다름 아닌 아이들의 미소였노라고. 언젠가 코로나 19가 종식되고, 이 땅이 평화로 회복된다면 나는 교회 청년들과 함께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거쳐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도 들러보고 싶다. 잘 지냈는지 안부를 묻고, 당신들의 나라가 나를 참 많이 위로했던 멋진 나라였다 말해주고 싶다.


DSC02128.JPG 아름다운 미소와 친절에 옅은 떨림이 있었던 나고르노 카라바흐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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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미소는 어른들의 미소를 닮는다. 이렇게 행복했던 땅이, 지금은 고통과 공포로 압도되어 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에 평화와 은총이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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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축제 때 단지 이방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반갑게 사진찍기를 요청한 사람들. 반갑게도 청소년들이 K-POP을 알고 있었다. 새삼 놀란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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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살아갈만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어른들의 몫일텐데, 이 아이들의 미소를 오랫동안 지켜줄 수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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