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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크seek Aug 13. 2020

청년들에겐 ‘찐’ 공동체가 필요하다

[낭만 그리스도인 #1]

  [낭만 그리스도인 #1] 청년들에겐 공동체가 필요하다


  “크리스천 단체라 기대했는데…. 제가 너무 어리석었나 봐요.”     

  

  툭 치면 그만 터질 것만 같았다. 그렁그렁 한 붉은 눈 가를 본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분위기는 적막했고, 이는 깊은 공감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분명 한 여름인데도 순간 을씨년스러움이 엄습한 걸 보니 다들 그 언젠가 당황스러웠고, 한없이 절망적이었던 자기 안에 상처들을 직면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 abbiebernet, 출처 Unsplash


  선영은 기독교 단체에서 일했다. 대외적으로는 역동적이고, 헌신적인 크리스천 선교 공동체였다. 당연하게도 돈을 벌 생각으로 들어온 건 아니었다. 애초에 급여 자체가 박봉이다. 하지만 ‘나의 작은 달란트(재능)로 어떤 보탬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문을 두드렸다.


  하나 너무 낭만적인 생각이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점점 지쳐만 갔다. 행정 일처리는 주먹구구식이었다. 부담은 고스란히 연차가 낮은 그녀가 떠안아야 했다. 상식적인 일을 비상식적으로 처리하는 일도 잦았다. 어느 곳보다 복음의 선명한 가치가 드러나야 할 곳이 어느 곳보다 혼돈스럽게 감춰진 아이러니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말하자면 세상보다 더 세속적인 기류가 사무실 안을 유령처럼 떠돌고 있었다.


  선영이 퇴사를 결심한 트리거는 정리하자면 ‘존재적 외로움’이다. 자신을 동역자로 보지 않고, 소모품으로 보는 인식이 만연했다.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은근한 ‘갑질’과 눈에 보이지 않는 고착화된 서열화는 분위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신앙적 교제가 전무했고, 흔한 사무실 예배 한 번 없었다. 무엇보다 성령 안에서의 교제의 기쁨과 기꺼운 환대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단체는 필요한 외부 사역에 집중하느라 내부 직원의 영적 상태와 기독교적 가치관을 실천하는 데는 무관심했다. 물론 처우 개선 역시 이뤄지지 않았다. 용기를 내 문을 두드렸던 스물일곱의 자매는 이제 서른하나가 되었다. 버틸 만큼 버텼다. 사명감만으로 하라는 말은 너무 가혹하다. 만약 그 말을 내뱉은 이에게 그 자리를 제안한다면 그는 아마 멋쩍은 미소로 확실하게 손사래를 칠 것이다.  


  섬김, 봉사, 사명은 예수의 정신이다. 사실 영적 훈련 가운데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내 유익을 계산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으로 누군가와 함께 하고, 그들을 돌보는 일은 얼마나 숭고한 일인가. 그러나 어떤 조직에서는 이 단어를 오용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헌신 페이(D-pay)’의 정석처럼 사용한다. 이 단어들이 차용되는 적지 않은 사역들은 거개 많은 크리스천 청년들을 아프게 하고, 무력하게 한다. 가난한 마음으로 청춘을 바쳤으나 영적 감격의 채움이 없는 청년들은 이제 허무함에 빠지고 만다.     


© emotional_discord, 출처 Unsplash


  “제가 바라는 건 다른 게 아니었어요. 주님의 일을 하면서 함께 마음을 나누는 공동체를 기대했단 말이에요.”


  소박한 바람조차 이룰 수 없는 걸까. 지친 영혼의 무력한 절규가 들리는 듯했다. 결국 선영은 청춘의 한 자락을 바쳐 일한 단체에 어렵사리 퇴사를 이야기했다. 퇴사라는 한 인생의 변곡점에서도 ‘왜 그만두는지’에 대한 존재적 관심은 없고, ‘그럼 이제 이 일은 누가 하느냐’는 맥 빠지는 반응은 그 단체의 영적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선임자의 이 한 마디는 그녀가 선교 단체에 미련을 남길만한 일말의 여지조차 깔끔하게 제거해버렸다. 테이블을 빙 둘러앉은 청년들의 고해성사와 같은 자기 고백은 계속되었다.    


  “나의 아픔을 두고 위로는커녕 뒤에서 수군대는 게 싫어요. 본인들도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분명 상처받을 텐데….”

  “공동체에서 주어진 사역을 기쁨으로 감당하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항상 민감하게 반응하며 도와줬는데 정작 내가 외로울 때는 연락할 사람 하나 없더라고요. 가끔 사람들이 내가 아닌 나의 도움만 필요해 하는 건가 회의가 들기도 해요.”

  “사회적 지위 때문에 은근히 차별받는 게 느껴졌어요. 대놓고 드러내지 않아도 학벌이나 직업이 은근한 비교 대상인 것만 같아요. 소외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겉으로는 주 안의 한 형제자매지만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 끼리끼리 어울리는 문화에 실망했어요. 공동체에서 받는 훈련 기수가 다르다 보니 사적인 모임에는 종종 배제되는 것 같아 마음이 어려웠어요.”     


  복음의 기쁨을 아는 영혼들은 사명의 자리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광야의 삶을 감당하는 데 있어 계산하지 않는다. 하지만 함께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릴 때, 몸담은 공동체나 소그룹이 성경의 가치를 오염시킬 때 이야기는 달라진다. 크리스천 청년들은 삶과 신앙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나는 어디에 속해 있어야 하는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었다.


© sasint, 출처 Pixabay


  분투(奮鬪), ‘지금의 자리에서 있는 힘을 다해 치열하게 맞서는 것’, 이들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 몸부림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선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믿음과 행함으로 버티기 위해서는 함께 격려가 되고, 위로가 되어 주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받은 상처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리거나 받은 은혜로 충만했던 때를 회상하며 감회에 젖어 있거나 결국 모든 크리스천 청년들은 또 하나의 흔한 사교 모임이 아닌 예수 안에 있는 ‘찐’ 공동체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었다.


  그렇다. 공동체란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것이다. 나를 향한 주님의 은혜를 고백하고, 함께 십자가를 지며 하나님 나라를 담대하게 세워가는 믿음의 친구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한 것처럼 내 친구와 이웃을 사랑해야 함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곳이다. 맞지 않는 성격과 가치관 때문에 내 마음에 쏙 들지 않더라도, 그에게도 주님의 구원의 기쁨이 있음을 알고, 서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복음의 공동체는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는, 우리가 꿈꾸는 천국은 바로 이런 자의 것이리라.


  “코로나19가 잠잠해지고, 해외여행 제재가 풀리면 이스라엘에 가보고 싶어요. 복음이 선포된 곳을 걸으며, 예수님을 묵상하며, 다시 한번 사명에 대해 고민해 보고 싶어요.”

  “여자 친구랑 헤어진 지 몇 달 됐거든요. 서로의 사랑의 언어가 달라 마음을 전하는데 서툴렀고,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아쉬운 부분도 있었어요. 그래도 제 자신이 많이 성장했던 만남이었습니다. 다음 번 교제를 하게 되면 서로를 더 존중하며 잘해보고 싶어요.”

  “이번에 식당 2호점을 새로 오픈했습니다. 경제가 어려워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운영해 봐야죠. 한 달에 한 번 동네 어르신들에게 대접하는 무료 식사 섬김도 계속 이어나갈 생각입니다.”

  “수능 5수 도전합니다. 주님이 마음에 불을 붙여주신 교육가의 꿈,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다음 달에 결혼합니다. 요즘 결혼도, 육아도 쉽지 않다지만 걱정보단 기대가 커요. 하나님께서 우리 두 사람에게 어떤 마음을 주실까 기대하면서 데이트할 때마다 형제랑 같이 기도했었거든요. 그런데 우리 가정이 사랑방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자취할 때처럼 청년들을 계속 초대하고 싶어요. 와서 마음 편히 쉬다가고, 함께 교제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제공하고 싶어요.”      


© wildlittlethingsphoto, 출처 Unsplash


  청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찐’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 안에서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꿈꾸며 또 마음껏 도전할 무대가 필요하다. 피비린내 나는 승자독식의 세계에서 역량과 소유로 평가하는 게 아닌 서로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는 안온한 사랑방이 필요하다. 아주 작은 신음에도 사려 깊이 반응하는 친구가 필요하다.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좋고, 이벤트도 좋다. 하지만 뒤돌아서면 헛헛해지는 껍데기 사역의 허무함을 두세 번 겪어서야 되겠는가.


  고단한 현실을 충만한 복음으로 이겨내는 낭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 참 좋겠다. 언제라도 내 마음을 툭 꺼내 놓으면 옆에서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손잡고 기도해 주는 사람들, 말씀이 나를 온전히 위로하고 소망이 되어 주는 감동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별이 쏟아지는 한 여름밤에도, 소복이 눈이 쌓이는 한 겨울밤에도 그리고 봄과 가을의 어떠한 날들에도 그리스도의 향기와 서로의 온기로 채워주는, 한 마디로 예수로 모든 것을 살아내는 ‘찐’ 공동체를 나는 꿈꾼다. 우리에겐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너무나 선명하다.      


   * 본문에 나오는 이름과 내용은 정보 보호 차원에서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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