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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크seek Aug 14. 2020

‘굳이’ 사랑해야 하는 바로 그 자리에 나의 십자가가

[낭만 그리스도인 #2]

  [낭만 그리스도인 #2] ‘굳이’ 사랑해야 하는 바로 그 자리에 나의 십자가가 있다


  교회를 가면서 가장 기대하는 게 무엇일까? 우문이었나? 역시 ‘사랑’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그리고 하나님께로 향한 사랑을 근거로 모든 만남과 일들이 발생하는 곳이 바로 교회다. 그런 교회를 주님의 몸 된 공동체라고 우리는 정해진 답으로 고백한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 공동체 안에는 상한 심령이 가득하다. 그리스도의 평강과 은총이 넘쳐야 할 곳에 고통과 신음이 만연하다. 가슴 아픈 소리를 낸다. 내 상식과 내 힘으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때문이다.       


  “부서 모임 끝나고 뒷정리를 해야 하는데, 한 리더가 팔짱 끼고 다른 리더와 함께 수다 떨고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이 더운 날 의자 정리하고, 쓰레기 치우는데 말이에요. 자신이 리더라는 인식 때문인지 청소에는 관심 없고, 그 시간에 매번 자기 일만 해요.”

  “솔직히 얘기하면 술 마시고 와서 악취 풍기고, 조그만 반응에도 크게 화를 내고, 뒷담화하며 문제 일으키는 지체가 우리 소그룹에 들어오는 게 그리 반갑지만은 않아요. 그 성격을 감당하기가 벅차요. 다른 멤버들과의 관계도 생각해야 하고요. 그냥 출석률 좋고, 잘 따라오는 멤버가 왔으면 좋겠어요.”

  “전 진짜 관심 없다니까요? 성경공부 모임 끝나고 어쩌다 집 가는 방향이 맞아 그날 처음 딱 한 번 차를 탔을 뿐이에요. 근데 공동체에서 이미 우리 둘이 사귄다고 소문이 났어요. 억울하고, 속상해요. 그 지체와도 괜히 관계가 소원해졌어요.”     


© calebminear, 출처 Unsplash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랑하기 참 까다로운 세상이다. 사랑하기 어려운 근거들도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랑하라 하신다. 조건 없는 사랑, 비교하지 않는 사랑은 추상적인 신앙의 결론이 아닌 실제적인 도전이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보지만 그분의 결국은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요 13:1) 십자가의 길이다. 난이도가 몹시 어렵다. 그래서 성령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내 힘으론 도저히 사랑하기를 해낼 수 없으니까.


  곰살궂지 못하고 겉도는 부서 사람이 있을 때 나를 향한 주님의 환대와 자비하심을 망각해 버린다. 누군가의 성격적 결함과 모난 부분을 발견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망각해 버린다. 서로가 판단하고, 재판관이 된다. 섬김과 헌신의 자리를 되도록 피한다. 교만이 그렇다. 내가 하나님 자리에서 판단하는 것이다. 이웃의 고통과 눈물, 그들의 한숨이 피곤하게 나의 삶과 연관되지 않기를 은밀히 바란다. 내가 사랑하고 싶은 것만 사랑하고 싶다. 불의는 참지만 불이익은 참지 않는다.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수많은 이들의 성품과 생각들은 모두 다르다. 경험으로 축적된 삶의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에 판단이 개입되면 단순하지 않다. 정치적이며 계산적이고, 이성적이며 또한 감성적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일과 관계의 시작과 끝, 과정까지도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쉽지 않다. 본질을 말하면서도 비본질로 감정이 상하게 된다. 각자가 해석하는 사랑의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 jclk8888, 출처 Pixabay


  사실 모두 알고 있다. 다른 것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복음을 살아내는 것은 정말로 불편하다는 것을. 공동체를 섬기는 사명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게 참 어렵다. 순종하기 싫다. 반복하지만 우리는 ‘내가 사랑하고 싶은 것만 사랑하고 싶다’. 예수 때문에 복 받고 싶지, 불편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기억하자. 예수님은 굳이 사랑해야 하는 자리에서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제자들이 또 그래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허락된 곳에서 끊임없이 요구되는 결단이 있다. “‘굳이’ 사랑할 수 있겠는가?” 눈앞에 보이는 내 이익과 판단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 일일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는 결연한 믿음의 고백에도, 살면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는 말씀을 따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굳이 품어주고, 굳이 손해보고, 굳이 겸손해지는 그 자리가 바로 예수님이 사랑하는 것을 나도 사랑하는 자리다. 말씀이, 기도가, 찬양이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사랑이 더해진 곳에는 ‘굳이’가 곧 ‘기쁨’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굳이 사랑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불편한 사랑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굳이’ 사랑해야 하는 바로 그 자리에 나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기꺼이 십자기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당신에게 그리스도의 평강과 은총이 있기를!     


  “Amor animi arbitrio sumitur, non ponit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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