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비비어의 결혼'
[M_Book #19] '존 비비어의 결혼'
먼저 작가에 대한 나의 태도는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밝혀둔다. 그는 알려졌다시피 신사도 운동 영성주의자로 이 문제와 관련해 여러 사람으로부터 지적받은 인물이다. 존 비비어는 분명 사람의 마음을 터치하는 탁월한 달란트가 있다. 때문에 그의 배경을 모르는 이들은 감성적이면서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는 그의 책을 통해 은혜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가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 중에는 성경의 지나친 확대 해석과 왜곡 등이 발견된다. 더욱이 그가 사도로 임명을 받고, 성경의 완전성을 부인하는 주장을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들었다는 대목에서 목회자로서의 신뢰는 깨진다.
사실 그의 책 <결혼>을 펼쳤을 때 불편한 마음이 감돌았다. 굳이 읽어야 하나 생각도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과 관련해 인사이트를 얻을만한 내용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3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어나갔다. 물론 크리스천 독서모임에서 그의 책을 나눌 마음은 없다. 복음적이고 대중적인 픽으로 C. S. 루이스나 존 오트버그, A. W. 토저 등의 책만 해도 좋은 신앙서적은 넘쳐난다.
연애와 결혼은 언제나 인류사 최대의 화두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크리스천 청년들의 고민과 바람은 연애와 취업(경제적 안정)이 늘 고정적 선두에 있다. 특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이들일수록 믿음의 가정을 이루는 것에 대한 열망이 강함을 본다. 목회자들을 위시한 크리스천 연애‧결혼 특강 강사들은 최근까지 전형적인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강조하며 만남과 사랑을 해석했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 아래 교회에서 맺어진 가정을 이상적인 모델로 보았다. 또한 가정을 주제로 한 CCM도 많은 이들에 의해 교회와 예식장에서 불렸다.
이후 사회 기치가 변모함에 따라 남녀 관계에서도 ‘상황화’를 적용시켜 맥락적 해석과 적용을 통해 기존 틀을 깨는 과감한 연애 및 결혼 특강이 전파되고 있는 추세다. 기존의 전형적인 연애, 결혼 모델을 제시하는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각 특수성에 맞는 솔루션을 제시하는 것이다. 믿음의 가정을 세우는 성경적 가치는 중심에 두되 그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한 돌파나 대처는 상황에 따라 지혜롭게 하는 것이다.
이에 덧대 최근 비혼주의를 선언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결혼에 관한 시대적 관점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결혼을 하느니 차라리 애완동물과 사는 게 낫지 않겠냐는 의견도 종종 보인다.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은 이런 풍조가 탐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도록 폐쇄적 답안을 내놓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도 함께 들여다봐야 한다. 결혼을 선택하기 위해 제도적 결함으로 파생된 버거운 장애물을 개인의 힘으로만 헤쳐가라는 것은 부당하게 들릴 수 있다.
지금도 많은 청년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가정을 이루는 것을 기도하고 있다. 하나 그들에게는 ‘배우자를 위한 기도 리스트를 적어놓고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하라’는 인디언 기우제와 같은 조언보다 하나님 나라를 가치관으로 삼는 신앙적 토대 위에 믿음의 행함을 실천하고, 관련 제도들을 구축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 또한 교회 청년부에서 강사만 다를 뿐 매번 반복되는 내용의 연애 특강보다는 차라리 직접 소매를 걷고 남녀매칭을 해주는 프로그램을 개최하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여하튼 결혼에 관한 담론들은 끝이 없으니 각설하고 책으로 돌아가 보자. 결혼을 고민하고 선택하는 일은 크리스천이든 넌크리스천이든 삶의 중대한 일임이 분명하다. 두 사람이 한 사람으로 연합하는 과정을 성경은 매우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로 정의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거룩한 사명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일생에서도 참으로 아름답고 신비한 과정이다. “평생 당신과 함께 하겠다” 이만큼 서로의 가치를 빛나게 해주는 숭고하고 위대한 약속이 또 어디 있을까?
저자는 “각각의 결혼 생활에는 저마다 독특한 지문이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해외나 오지로 파견 나가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거나 주일에도 근무하는 배우자,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연상연하, 불가피한 이유로 2세를 갖지 않는 부부, 지지 정당 혹은 사회적 신념이 다른 커플, 같은 직업에 종사하거나 사별 후 재혼한 부부 등 지금도 수많은 가정이 저마다의 스토리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삶의 흔적은 달라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 유진 피터슨은 “결혼은 너희가 아닌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 세부사항 하나하나에까지 그분의 영이 깃들어 있다”(말라기 2:15, 메시지성경)고 해석한다(메시지성경은 의역이 많은 까닭에 성경으로서의 가치가 아닌 주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다.). 바로 하나님께서 결혼의 모든 상황 속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
결혼은 분명 축복이다. 순간순간마다 예기치 못한 보석 같은 선물들이 쏟아진다. 특히 내 편이 있다는 것, 나의 거의 모든 것을 공유하며 그것을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이해해준다는 것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정서적 안락함을 선사한다. 그래서 결혼에 관한 환상 혹은 기대를 가지는 게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다. 하나님은 부부에게 가정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하는 저마다의 멋진 비전을 주셨다. 이 꿈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세상에서 분명 행복한 가정으로 나아가기 위한 등불이 되어준다. 사회 구성원으로 땀 흘리며 꿈을 성취하는 과정이 영적 성장의 값진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반면 결혼생활 중에 낙망의 때도 분명 찾아올 것이다. 이를 경멸할 필요는 없다. 십자포화 속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순간,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주변 사람들의 책임지지 않는 영혼 없는 충고에 마음을 뺏겨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상황 상황마다 감히 사랑이라는 단어로 온전히 담지 못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심어 두셨다. 주님은 우리가 낙망과 좌절의 터널을 지나 기쁨을 찾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를 바라신다.
상황을 뛰어넘는 지혜롭고, 선한 선택과 행함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늘에 계신 주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는 삶의 도전이 된다(마 5:16). 그러니 결혼을 선택할 때나 또 결혼생활을 진행할 때 낙망의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 낙망을 통제할 수 있는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고단한 삶이 찾아올 때 깊은 평강과 은총을 더하시는 신실하신 주님은 당신을 향해 언제나 두 팔을 벌리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저 가만히 그 품에 안기기만 하면 된다. 지친 마음을 기대면 된다.
사실 선물이 다른 것이 아니다. 영원을 약속하며 평생 함께 걸어가는 배우자보다 이 땅에서의 값진 선물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때론 가장 친밀하다고 여겼던 이에 대해 감정이 식거나 심지어 원수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한 가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배우자든 다른 사람이든, 누군가를 올바로 사랑하려면 먼저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발견해야 한다.” p.34 아들의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나의 어떠함을 두고 가치를 매기거나 판단하지 않으셨다. 내가 그리 사랑스럽지 않을 때에도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셨다. 그저 존재를 품으시고, 안아주셨다.
나의 짝꿍이나 당신의 (예비) 배우자도 그렇다. 그(그녀)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보배로운 사람이다. 그 사람에게도 보석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 있고, 설레는 주님의 꿈들이 심장에 아로새겨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하라”고 얘기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며 교회를 사랑했다. 그가 교회를 사랑한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사명인 인류 구원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 그것만큼 생에 가장 가치 있는 만남과 어울림이 어디 있을까?
저자에 대한 호불호를 접어두고, 나는 책에서 이 두 문장에 대해서만큼은 격하게 공감한다.
“배우자를 향한 참된 사랑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써 넘쳐흘러야 한다. 이 심오한 사랑은 가짜로 만들어낼 수 없다.” p.51
“가장 불쌍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아의 추구에 몰두해 있는 자들이다. 누구보다 가장 무능력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p.184
연합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영적 승리의 필승카드다. 그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기중심성을 내려놓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야 한다(롬 12:15). 친구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능력을 행하시기 전에 함께 슬퍼하며 우셨다(요 11:35). 가짜일 수 없는 그 사랑이 내 안에 흘러넘칠 때 우리는 배우자와 다른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제사보다 긍휼을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된다.
최근 몇 년 동안 주변에서 결혼을 포기하거나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비율이 유의미하게 높아짐을 느낀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무조건 결혼을 강행하라는 폭력적인 조언을 건네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자기 부인의 잘못된 적용으로 “지금 준비가 덜 된 내 모습으로는 도저히 결혼할 수 없다”, “결혼하게 되더라도 결국 어려움이 찾아오고 말 것이라”는 거짓된 속삭임에 속지 말자. 두려움은 시각을 왜곡시킨다. 예수님은 거짓된 겸손과 싸우지 않으셨다.
결혼의 진짜 재미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문제들을 별빛처럼 인식하고 하나하나 미션 클리어하듯 헤쳐 가는 데 있다. 그래서 그 힘을 추동시키는 경건한 비전이 있어야 한다. 그 마음이 통하는 순간 천국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오래도록 쏟아낸 농부의 수고로 인해 한 숟갈의 단 쌀밥을 먹을 수 있듯,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깊이 여물 때 꿀과 같은 결혼 생활의 단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존 비비어의 <결혼>은 그래서 쓰윽 한 번 훑어보며 도움이 될 만한 내용들을 분별해 참고할만한 하다(굳이 비판적인 시각을 담지는 않겠다). 양육 교재나 독서모임 도서로 선정하기에는 차라리 팀 켈러의 <결혼을 말하다>나 정신실의 <연애의 태도>, 송인경의 <결혼에 울다>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