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제법 안온한 날들'
[M_Book #18] Re: '제법 안온한 날들'
응급의학과 교수이자 정인이 사건 인터뷰로도 알려진 작가 남궁인은 사실 의사들 사이에선 이미 글 좀 쓰는 의사로 알려져 있다. 독서모임 멤버 중에서도 이미 <만약은 없다> 때부터 팬이어서 여러 사람에게 선물할 정도로 전부터 호감을 가진 작가였다고 말하는 이가 있었으며 또한 보통의 작가들을 책으로만 접하는 데 반해 이번 남궁인 작가의 경우 누가 말해주지 않았는데도 멤버들이 작가에 관한 이력과 출연한 프로그램 등을 찾아보며 작가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꽤 적극적이었음이 흥미로웠다.
독서모임 때 이렇게 높은 인지도와 관심을 두고 시작하는 작가가 많진 않다. 때문에 남궁인의 책 <제법 안온한 날들>의 앵콜 독서모임은 기독교 세계관으로 다시 변주하여 죽음과 사랑에 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했고, 참가자들의 삶의 결에서 길어 올린 다양한 고백들이 쏟아져 나왔다. 7시 30분, 줌(zoom)에서 시작한 모임은 그 여운이 오래도록 남아 밤 11시 넘어서까지 단톡방에서 수다를 떨었으니, 앞으로도 남궁인 작가의 책들은 꾸준히 독서모임에 소환될 것 같다.
독서모임 멤버들의 나눔들
#1 냉철한(그럴 수밖에 없는)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글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새벽 두 시의 섬세한 감성이 묻어 나오는 책이었다. 첫 장을 잠에서 덜 깨 멍한 출근길에 열었더니 축 처지는 무거운 이야기가 많아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집에서 읽을 때는 글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BGM을 찾아 잔잔하게 틀어 놓고 집중해서 읽었다. 에세이집이라 쉽게 쓰이고 또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마냥 그렇지도 않았다. 작가의 약간 투머치한 감성에 묻힐 뻔한 깊은 문장들이 많아서 그 문장들에 멈춰서 생각해보는 재미도 있었다.
#2 책을 덮어놓고도 제일 기억나는 부분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환자를 죽음으로 이끄는 진단명이 곧 '가난'이라는 교수님의 말이다(p.198). 전 세계로 확장해서 볼 때 가난 때문에 다른 질병을 앓기도 전에 일찍 죽어버리는 수명의 나라도 있지만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가난한 생활로부터 파생되는 사고와 질병이 얼마나 많은가를 되돌아보게 된다.
‘알맹이가 없는 것이 알맹이’ 에피소드(p.246)도 이 맥락과 이어진다. 학회에서 ‘온열질환’을 발표한 열사의 땅 아랍에서 온 의사는 미국계 출신으로, 상위계급의 환자들을 진료하는 사람이었기에 실제로 열사병을 앓기 쉬운 환경에 있는 일반인들의 사례를 겪어보지 못해 봤다는 웃픈 이야기였다.
작가가 여러 에피소드를 겪고 이야기하며 꾸준히 언급한 ‘가난’이라는 주제가 마음을 무겁게 했다. 나는 내가 처한 가난을 벗어나 좀 더 나은 삶을 살 궁리만 했지 여전히 내 뒤에서 누가 어떻게 가난을 겪어야만 하고 겪어내고 있는지는 무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삶의 수준이 안정을 찾아갈 때 시선을 내 앞에만 고정하며 모두 다 같이 안정되어가는 것 마냥 여긴 것 같다.
요즘 SNS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았다. 나도 자주 들어가지만 인스타그램이 결국 자기 자랑을 위한 공간인 것 같이 느껴졌다. 각자의 삶에서 좀 때깔 나는 일부의 부분만을 편집하여 올리니 우리는 그것들의 집합을 볼 때 당연히 그들의 삶을 부러워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들이 초라한 실제 삶과, 인스타그램을 둘러보고 일상을 공유할 여유조차 없는 사람들의 현실을 많이 가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서로 이웃이라면 사회의 이면을, 사각지대를 외면해서는 안 될 텐데, 적어도 얼마큼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정도는 아는 것이 어떤 시작점에 설 수 있는 큰 차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3 ‘불행’ – P.139
작가가 마주했던 예상치 못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불행'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점쟁이들은 보통 ‘당신은 ~운이 있다. ~살이 껴있다. ~를 가까이하면 위험하다.’는 등, 나름 분류화된 불행의 카테고리를 골라 그것을 필사적으로 피해야 하는 엄청난 불운인 것처럼 말한다.
그런데 점쟁이가 언급했던 특정 불행을 겪은 인생은 불운한 인생인가?라고 생각해볼 때 그 인생 자체를 불운하다고 정의 내리는 것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작가가 책에서 말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각자의 슬픔을 안고 당당하게, 당연하게 살아가고 있다.’(P.195) 필연적이든 우연적이든 사람 사는 세상이기에 여러 사건 사고가 삶에서 벌어진다.
지금까지의 내 삶을 돌아보아도 그렇고, 앞으로 내 삶에 어떤 힘든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 인생을 비관하지 않고 조금은 태연하고 유연하게 내 삶의 이야기 일부로 받아들이고 싶다.
#4 기억에서 잊혀가던 가족과의 예기치 못한 재회, 그들이 서로를 의지하고 사랑하는 모습. 문득 가슴이 청량해졌다. ~ 그때 그 사람들은 전부 성장해있었다. ~ 그 시절 나는, 가족들이 전부 건강하고 이렇다 할 좌절은 없었다. 그럼에도 응급실에서 절규하는 사람을 본다는 이유로 불행을 재단하는 습관을 이어왔다. 그러나 싹은 어디서든 피어난다. 그리고 척박한 곳에서 움튼 싹은, 오히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도 한다. 우리는 주저앉는 존재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슬픔을 안고 당당하게 당연하게 살고 있다. ~ 사람은 일방적으로 불행하지 않다. 서글한 한 가족이 그날 그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내게 알려줬다.
아픔과 시련을 통해 성장하고 있다고 하지만 과거를 돌아보며 연민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나 자신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다른 이들의 불행을 재단하며 연민의 감정만을 느끼지 않았는지를 돌아본다. 지금 이 순간 불행해 보일지라도 싹은 피어나고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각자의 슬픔을 안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며 기도가 나왔다. “주님.. 나는 내 자신이 불행했기에 불쌍하다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돌아보면 나는 그 일들을 통해 불행해하고, 원망만 하고 내 자신이 불쌍하다고 생각만 하며 그 자리에 머물러있기만 했었어요, 주님 이제 그만 그 자리에 머물러 원망만 하고 연민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변하고 싶다고 더 단단해지고 예수님의 형상으로 빚어지고 싶어요. 지금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최선을 다해보고자 합니다. 힘을 주세요. 용기를 주세요.”
#5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 짧고 금방 끝나버리는 말이라, 조금 더 긴 단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온전하게 같은 말을 지녔지만 전부 발음하는 데 3분쯤 걸리는 한 단어가, 그렇다면 나는 그 단어를 틀림없이 몇 번이고 외워, 너의 눈을 바라보며 한 글자씩 큰 소리로 3분에 걸쳐 사랑을 고백할 수 있을 텐데" p.34
말과 글이 가지는 의미는 크다. 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 있는 게 글과 말이다. 저자는 <제법 안온한 날들>에서는 전작과 달리 사랑을 큰 주제로 잡는다. 그래서 꽤 많은 부분에서 사랑과 관련된 글이 나온다. 이 글을 읽으며, 저자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사랑한다'는 말이 아쉬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동시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것이 감사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6 “불행한 글을 써내는 사람의 인생까지 불행할 필요는 없어. 네가 불행해야 한다는 강박이야말로 심각한 자기 위선이야. 네가 좋아하는 글, 그거 마음껏 써내란 말이야. 네 인생을 망가뜨리지 말고, 그딴 어두운 자리로 찾아들어가지 말고, 그냥 쓰란 말이야. 그게 네가 쓴 글야. 너를 수령에 기어이 욱여넣고 쓴 글은 진짜 네가 쓴 글이 아니라고.” p.139
이 글을 읽고 마음이 뭉클해졌다. 불행한 글을 쓰는 사람의 인생까지 불행할 필요가 없다는 위로가 따뜻하지 않지만 좋았다. 다양한 글을 쓰고 싶으나 불행한 글을 쓸 수 없었다. 글과 내가 하나가 되어 글이 어두우면 나 또한 어두워졌다. 그래서 이 글이 나에게 던지는 위로이자 조언 같았다. 이제 그만하고 쓰고 싶은 걸 쓰라고 말이다.
#7 “어제도 밤에 간식을 먹었는데, 오늘도 먹어버렸어.” 같이 너무 사소해서 빛이 나는 시간들을 나누고 또 “그간의 시간은 참 힘든 것이었지만,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워” 같은 무한한 말을 나누는, 그 시간과 육체의 종말을 같이 기다려 주는 당신이, 당신만이 남아있는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이제 막 내려앉는 봄과 영원히 가닿지 못할 것 같은 햇살을 향해 뛰어나갔다.” p.151
소박함과 사소함이 의미가 있다는 걸 요즘 더욱 깨닫게 된다. '사소해서 빛이 나는 시간' 이 말이 좋아서 속으로 읽고 또 읽었다. 인생을 살다 보면 특별한 것보다 사소한 게 좋아질 때가 있다. 새로움이 있는 것도 좋지만 편안함 속에 사소한 게 좋다. 코로나 19로 많은 걸 잃은 요즘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예배드리는 사소함들이 좋다.
Vangvieng의 숙소. 내가 지금 반쯤 누워기댄 침대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에는 Vangvieng의 절경을 만들어내는 강과 겹겹이 겹친 산세, 그 아래 아직은 겸손히 자리 잡은 몇몇 방갈로들이 있다. 틀이 가리는 것조차 싫어 유리로 된 발코니 문을 활짝 열고 눈과 귀로 향기와 느낌으로 여유와 풍요로움을 가득 눌러 담는다.
내 자신을 이렇게 대접할 수 있어 기쁘다. 훌륭하고 좋은 것은 내 것이 아니라는 거짓에 오랜 시간 속아왔다. 사실 온 세상 어떤 그 무엇에도 앞에 우뚝 서 당당히 대면할 수 있는데 말이다. 고맙다 라오스.
- 2012.12.26. 5:07 p.m.
* 다른 멤버가 소박하지만 일상의 안온함을 느낀 여행기 일부를 나눈 글.
독서모임 멤버들이 밑줄 친 문장들
“자네는 나와 함께 오래 살았네. 감사하네. 여보. 당신, 나는 행복했네. 많은 사람 중에 자네와 평생을 함께해서, 나는 행운아였네. 그 행운이 60년도 넘었네. 그래서 나는 너무 운이 좋았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네. 이제 자네가 떠났으니 나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네.” p.28
“인아, 사랑은 침범할 수 없는 것이다. 거의 인생만큼 긴 시간이 지나면 사랑은 영속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떼어놓고 자신을 생갈 할 수 없게 된단다, 그처럼 치명적인 게 없다. 인아. 할아버지는 오래 못살겠다. 그건 어쩔 수가 없다. 사람은 죽는 거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으로 사는 거다. 할아버지는 계속 사랑하는 사람일 거다.” p.29
“써야 한다는 생각을 쉬지 않는다. 실제로 무슨 생각이든 일단 적기 시작해 남겨놓는 것이 최고의 무기다. 하지만 그 생각과 기록이 정말 좋은 것이 될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해야 한다.” p.93
“나는 유난히 지쳐 있었다. 삶이 나아가는 것 같지 않았다. 무엇이든지 헤쳐 나가야 할 일들 뿐이었다. 넓은 백지를 채우고, 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든 이야기를 하고, 그다음 또, 당장 해야 할 일들과 멀리 해야 할 것들. 그것들이 얼마나 남았을지, 내게 어떤 일이 남아 있을지 나는 가늠할 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백지는 넓고 버거워졌다. 나는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P. 148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등지고 싸운다는 것이, 죽음을 직감할지라도 이토록 안온한 것이었을까요.” p.152
“나는 나에게 끝없이 절망하던 사람이에요. 이 세상에 태어나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두려웠어요. 하지만 이 세상에서 딱 한 사람, 당신에게만 영향을 미치고 싶어요. 내가 가지지 못한 용기란 것을 전부 쥐어짜내, 꾸미지 않은 말과 행동으로 당신 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요. 그것이 세상에 태어난 내가 유일하게 부릴 수 있는 욕심이에요. 나는 당신, 당신의 귀한 감정에서 한 부분이 되는 사람이고 싶어요.” p.158
“모든 사람이 각자의 슬픔을 안고 당당하게, 당연하게 살아가고 있다. 시련을 극복하고 때로는 미소를 지으며 살아갈 것이다.” p.176
“감사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실상 도움은 내가 받고 있으며, 그 말을 갚으려면 그들의 일이 조금이라도 순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p.178
“가족이 돌이키지 못할 불행을 겪거나 가장이 쓰러져 휠체어에 앉아 있을지라도, 사람들은 현실을 비관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는다. 오히려 곁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끌어안고 돌보며 각자 저마다의 위치에서 앞길을 찾고 희로애락을 느끼며 성장한다.” p.189-194
““간염 치료는 왜 안 받았나요?” “아프지 않으니까 치료를 안 받았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아프기 시작했을 때는 왜 병원에 안 왔습니까?” “살 만했습니다.”” p.204
“세상에서 타인을 돕는 방법은 무궁무진하지만, 그중 헌혈은 오로지 인간만이 할 수 있으면서도 분명하게 물질이 남는 봉사다. 이 단순한 교환은 다른 어떠한 존재도 대체할 수 없는, 인간과 인간이 나누는 분명한 인류애다. 인간을 돕고자 고민하는 사람에게 헌혈을 권한다. 이타적인 당신의 혈액만이 다른 인간을 살릴 것이다.” p.218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원래 더 이상 살아가기 어려운 법이란다.” p.231
"시간이 흘러 늙어버린 나는 어떤 순간을 추억하며 살아갈까." p.232
“의사 한 사람의 인생은 백 사람의 인생과 마찬가지다. 그걸 견뎌내지 못하면 의사가 될 수 없다” p.311
“원래 어머니에게는 그렇게 자식이 전부인 것이라고 했다. 나는 어머니께 당신도 그녀처럼 나를 지킬 것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냥 묻지 않았다. 어머니는 밥을 먹으라고 했다. 나는 목이 메어 밥을 먹겠다고 했다. 당직실이 다시 고요해졌다. 나는 묻지 않아도 안다. 내가 죽음의 문턱을 헤맨다면 어머니 당신은 30일이라도, 300일이라도 나를 지킬 것이다. 그러니 나는 방금 의미 없는 문답을 하나 줄인 셈이었다. 나는 붉어진 눈시울로 다시 일을 하러 응급실로 나섰다. 수많은 어머니가 그곳에 있었다.”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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