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에 상상에 상상을 더해서

[7년 세계일주 #11]

by 시크seek

[7년 세계일주 #11] 상상에 상상에 상상을 더해서


#1 2011년 겨울, ‘젊음과 열정만으로 성공할 순 없지만 젊음과 열정이 있기에 포기할 수 없다’는 혈기 넘치는 신념으로 독일을 여행했다. 그해 겨울, 자전거로 유럽을 일주 중이었던 나는 한 달 내내 지루하게 펼쳐진 적막한 안갯길을 달려야 했다. 텐트를 챙기고, 내내 딱딱한 바게트만 먹다 입안이 헐기 일쑤였던 하루 10유로 안팎의 낭만적인 궁핍 생활을 인내하며 말이다. 어땠을까? 몹시 행복했다! 매일 아침, 아주 작은 기적을 기도하고, 밤마다 소소하게 누린 행복들을 감사하니 모든 순간이 신의 은총으로 여겨졌다. 더욱이 이 긴 여로를 끝낸 후 더욱 성장하게 될 나를 마음껏 상상할 수 있었으니 사서 고생이라도 보석처럼 반짝이는 시간들이었다.


#2 다만 겨울의 독일은 어딜 가나 스산했고, 숱한 밤을 고독으로 젖은 채 지새워야 했다. 때문에 봄볕처럼 찾아드는 환대의 기쁨은 더없이 소중했고, 기꺼이 자신의 보금자리를 오픈한 독일 사람들 사이에서 누린 잠깐의 휴식은 그야말로 천국의 현현이었다.


#3 “나 지금 축구클럽 경기 뛰어야 하니 우리 애들이랑 같이 좀 놀고 있어”로 독일 입성을 축하한 로스토크에서, 500여 년 전 목숨을 걸고 종교개혁을 외친 마르틴 루터의 비장한 흔적이 서린 비텐베르크에서, 어느 책에서 본 것처럼 라인강을 수력 에너지, 관광 상품 그리고 신성한 자연 이렇게 세 가지 관점으로 보는 베를린에서, “독일의 식탁은 소시지가 산을 이루고, 맥주가 강을 이룬다”라는 농담을 나눈 라이프치히에서, “독일을 떠나기 전 마지막 밤은 우리 가족과 함께 하자”는 트리어에서 만난 그들은 내가 지금 땅을 밟고 서 있는 독일에 대한 상상력을 더욱 자극했다. 빈궁과 풍요를 오가는 광야 여정에서 나는 이렇게 나 자신과 독일이라는 나라를 마음껏 상상하는 환희를 누렸고, 지금도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다.


#4 특별히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 교회 출입문 앞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이 차올랐을 때, 실로 배만 고프지 않았다면 마냥 울었을 것이다(허기가 심해 눈물조차 말랐던 것 같다). 면죄부가 거래되는 타락한 망령이 떠도는 시대에 당당히 ‘면죄(사죄)의 능력과 유효성에 대한 논쟁(“95개 조 반박문”, Disputatio pro 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으로 목숨 걸고 토론하자는 기개는 정말이지 상상할수록 온몸에 전율이 일어날 뿐이었다. 그 옛날 마르틴 루터는 서슬 퍼런 권력의 칼날 앞에 도대체 어떻게 그런 대담한 상상을 할 수 있었을까? 무엇이 그를 뻔히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보름스 제국의회의 종교재판에 보무도 당당하게 출두하게 했을까? 아마도 성경이 선명하게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의 진리와 시대의 타락한 문화를 거스르는 살아있는 양심, 루터에겐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 두 가지 신념이면 충분했으리라.


1. 독일에서 만난 자전거 여행자 토마스 2. 비텐베르크 교회 특강 후 청소년들과 함께 3. 할로윈데이 때 초대해준 가정 4. 처음 만난 외국인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놀던 아이들


#5 사실 이때의 독일 여행이 불현듯 떠오른 이유가 있다. 점점 더 고도화되는 세상에서 권력층은 자신들의 탐욕스러운 욕망을 위해 교묘한 때론 노골적인 프레임을 짠다. “넌 그냥 거기서 계속 필요에 의한 부속품으로 살아”의 ‘게슈텔(Gestell)’ 속에 무력함이 학습되고, 결국 정신마저 종속당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저항할 수 있는 지식도, 권력도 그렇다고 자본이나 신념도 없는 범인(凡人)은 그저 주체성을 반납하고, 수동적인 삶을 살아야 하냐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에게 빈곤해지는 상상만큼 비극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6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상상하지 말라며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미얀마 군부 쿠데타와 경제적 이해로 그저 방관하는 강대국들의 냉혈한 외면 속에 우리는 참담한 역사적 비극을 마주하고 있다. 개인들은 또 어떠한가. 날로 발전하는 문명 속에서 조직이나 공동체 심지어는 영적 위로가 필요한 교회에서조차 기꺼운 마음의 존재적 환대를 상상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삶의 비극은 언제나 인간을 “필요에 의한 도구”로 물화시키는 데서 온다. 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상상력을 제한시키는 데서 불행의 싹이 자란다. 기득권에게 피지배계층의 상상은 언제나 불온한 위협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7 문득 세계여행을 하면서 “친구이기에 너를 초대한 것이 아니라 너를 초대함으로 우리가 친구가 되는 거야.”라며 자신의 바운더리 안으로 기꺼이 초대한 숱한 이들과의 만남이 그리워진다. 그들은 낯선 이를 잠재적 범죄자가 아닌 함께 추억을 만들 친구가 될 것을 상상했다. 흑인에게 가해지던 차별정책을 폐지하고 더불어 평화 누림을 꿈꾼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종식, 영국 프리미어리그 2015-16 시즌 레스터 시티(Leicester City)의 기적 같은 언더독, 69일간 지하 700m에서 버틴 33명의 칠레 광부들, 공간을 뛰어넘어 소통하는 유비쿼터스(Ubiquitous) 시대 등 상상이 현실이 된 짜릿한 순간들이 우리를 희망으로 살아가게 한다.


#8 그러니 상상을 상상하지 못하게 강제하는 건 비극이다. 상상을 경험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고통이다. 아주 작은 불씨 하나 상상할 희망을 품지 못한다면 우리는 시대의 어둠을 헤쳐나갈 용기를 얻지 못할 것이다. 돌아보면 모든 여행이 그랬지만 독일, 특히 비텐베르크를 여행했을 때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500년 전과 예수의 공생애 시대였던 2000년 전 그리고 현재와 수십 년 후 미래를 마음껏 상상하는 기쁨이 있었다. 더 나은 내일을 상상했기에 풍찬노숙에도 기죽지 않고 웃을 수 있었다. 그랬던 나였는데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마음껏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며, 말씀이 주는 용기와 도전으로 빛나는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물어본다.


#9 상상을 상상해 보자. 언젠가 눈을 감는 날, “할 수 있었는데, 하고 싶었는데, 했어야 했는데” 후회하지 않도록. 때가 되면 자비로운 신께서 어떤 상상들은 현실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때론 그 상상을 뛰어넘는 은총을 베풀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기적이라 부른다. 당신은 단지 그 자리에 억압되어 있어야 하는 부속품이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상상하는 데서 시작된다.


#10 할 수 있다면 오늘 점심시간에 복잡한 머리를 식히고, 잠시 시간 내어 벚꽃과 개나리를 구경하며 산책하는 상상을 해보자. 지금은 코로나 19로 인해 봄꽃이 만개한 동네를 산책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청년들을 데리고 비텐베르크를 포함한 유럽 종교개혁지를 또 한 번 탐방할 것을 상상해본다. 상상에 상상을 더한 모든 순간은 언제나 소중하다. (*새벽 감성에 취해 잔뜩 힘이 들어가 쓴 글)


청동문에 '95개조 반박문이 새겨진 비텐베르크 슐로스(비텐베르크 성) 교회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