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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크seek Aug 22. 2021

더 좋은 것을 선택하는 지혜

[낭만 그리스도인 #21]

  코로나 19는 많은 이들에게 적잖은 혼란을 가중시켰다. 한쪽에선 ‘4차 산업혁명’이니 ‘메타버스’니 하는 것들이 미래 세대의 핵심가치라며 연일 확성기를 트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당장 먹고 죽을래도 없는 막막한 오늘을 힘없이 맞으며 관심의 사각지대에서 존엄성이 위협당하기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대상에게 가해지는 혐오가 일상이 된 세태는 미래 전망을 더욱 암울하게 한다. 작금의 혼란이 더욱 어지럽게 느껴지는 이유다.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선택을 강요받고 있고, 또 노출되어 있다. 어느 때보다도 현명한 선택이 요구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언젠가 한국교회에 ‘내려놓음’이라는 키워드가 유행한 적이 있다. 종교와 유행이라는 말의 어울림은 낯설지만 사회학적으로 봤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부흥이라고 덮어 놓고 보기엔 그것이 신학적으로 그 단어의 의미를 온전히 함의한 영적 운동이자 신앙의 열매였는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내려놓음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분명하다. 내 힘과 지혜로는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모든 주권이 주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내려놓음의 주체가 ‘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내 의지와 결단으로 내려놓음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회의가 든다. 크리스천이라고 해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길에서 당황하며 머뭇거리는 것이 보통이다. 하나님 가치와 세상 가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순간, 우리의 지성과 영성이 항상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한 치 오차도 없이 올바르게 작동할 리는 만무하다. 그러니 내려놓음의 취지가 아무리 좋다 한들, 그리스도인은 자기 결단과 의지만으로 그 행위를 해낼 수 없는 것이다.     




  최근 어떤 일을 두고 그냥 이대로 포기해 버릴까 하는 상황에 직면한 일이 있다. 아무래도 별 볼 일 없는 나는 자격이 되지 않는 것만 같았다. 하려는 일이 가치가 있다고는 판단되는데,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모됨이 염려되기도 했다. 더군다나 이익이 아닌 가치에 집중하는 일이기에 들이는 품에 비해 결과물이 시답지 않을 것은 명백했다. 그리고 이때 ‘내려놓음’이라는 치트키를 사용하고자 하는 유혹이 슬며시 찾아왔다.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을 가려주기엔 이만한 변명거리도 없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예배를 통해서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고 그 한 존재를 품어주기를 선택한다」라는 어느 목회자의 설교는 깊은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선택에 대한 정의가 새로워졌다. 결과는 하나님의 주권이니, 선한 동기를 전제로 선택으로부터 마음껏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실패가 두려워 실패해버리는 성과 중심주의를 과감히 버리고, 매 순간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을 후회 없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 땅의 방식대로의 계산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그리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아주 작은 관점의 차이다. 그렇다면 더 좋은 것을 선택했을 때, 비로소 덜 중요한 것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그동안 부정적인 것에 천착했다. 집념을 가지고 실패한 원인을 묵상하고, 몇 가지 잘못한 이유를 들어 스스로를 검열했다. 예수로 가득했던 소망들이 빛을 잃어간 때도 그쯤이었다. 거룩한 상상력은 점차 빈곤해졌고, 영적 자원은 갈수록 녹이 슬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은 계산하지 않고 그 한 존재를 품어주기를 선택한다」라는, 예수님이 먼저 친히 보이신 그 삶의 결은 나를 다시 일어서게 했다. 그 외에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자연히 내려놓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고 나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더 좋은 것을 선택하는 일에 온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하도록 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선택이 무엇이 있을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정체성일 것이다. 그런 크리스천들이니 혹 선택에 대한 지혜가 부족할 때는 걱정 말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면 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야고보서 1:5)      


  


  좋은 사람과 좋은 플랫폼들이 많은 세상에서 개인이 선택해 잘할 수 있는 가능성은 차고 넘친다. 그러나 언제까지라도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 가고, 냉철한 자기 객관화가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할 때, 어느 순간 무력이 학습된다. 바로 그때 낭만으로 점철된 청사진이 사라지고, 잿빛 거리를 걷는 작금의 현실을 탄식해보지만 기실 억울함을 토로할 것도, 변명할 것도 하나 없다. 결국 인간은 누구나 겸손해야 하며, 나는 내가 선택한 총합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는 것에 오늘 내 하루를 드리고 싶다. 그 선택이 쌓이고 쌓여 내가 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다. 당신과 나 사이에 평화가 임하며, 그리스도의 은총이 더해질 것이다. 그저 성공을 위한 자기계발이 아닌, 진정한 교회로 살아가는 영적 성장이 될 것이다. 글을 쓰다 보니 오랜만에 다시 존 오트버그의 <선택 훈련>을 읽어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갈림길에 설 때마다 선택의 과정 자체가 복임을 깨닫게 해 준 책이다. 우리는 '자유의지로 선택한 총합의 결과물이 나'라는 사실을 인지하며, 겸손하게 더 좋은 것을 선택하는 지혜를 구하며, 이제 믿음의 행함을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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