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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글 : 불리지 못한 이름

호명(呼名). 조선 여성들의 이름으로 본 사소하지만 당연한 행위에 대하여

by 윤대


이름에 대한 이야기, 첫 번째

남들보다 특출 난 능력 하나를 난 가지고 있다. 바로 기억이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인사를 할 때부터였을까. 난 한번 본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신기하리만치 잘 기억했다. TMI라 부르는 사소한 정보와 사건들을 기억하는 건 덤이었다. 친구들이 내 기억을 찾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다른 친구의 흑역사를 들춰내기 위해 그 친구의 고백을 거절한 그녀의 이름이 필요할 때라던가, "그때 그랬잖아!"라는 멘트와 함께 시작되는 시시비비 가리기에 나의 기억은 증거로 유용했기 때문이다. 내게 무언가를 기억하는 행위는 능력을 발휘하는 활동이 아니었다. 일종의 습관이자 태도였다.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것 말이다. 그리고 이 습관과 태도가 몸에 밴 채로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보니 어느새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나만의 룰(rule)이 됐다.


이름에 대한 이야기, 두 번째

얼마 전 집안에 경사가 생겼다. 사촌 형님이 딸을 가진 아버지가 됐다. 갓 세상으로 나온 이 아이의 이름을 지으러 할머니가 된 작은 이모님이 철학관을 다녀오신 모양이다. 이모님을 만나고 온 어머니는 나에게 어떤 이름이 제일 이쁘냐며 철학관에서 제시한 4가지 이름 후보를 들려주셨다. 우연하게 나와 어머니가 가장 이쁘다고 고른 이름이 같았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이름이 아기의 이름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조카의 이름은 ‘지유’다. 연못 지에 아름다울 유 자를 쓴다고 한다. 예쁜 이름이다. 조카는 이제 탄생을 염원하고 소망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이 이름으로 불리며 자랄 것이다.


이름이란 뭘까?

이름. 그것은 한 인간의 탄생을 축복하는 사랑이 응축된 언어이다. 그리고 세상 그 어떤 말보다 그 사람의 정체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말이다. 세상 수많은 언어들 중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유일무이한 언어가 바로 이름 아닐까. 그 이름을 부른다는 행위는 그 사람을 온전히 그 사람 자체로, 그 사람을 타자와의 관계성과는 무관하게 유일무이한 존재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갓 태어난 아이는 수 천수만 번 자신을 부르는 이름을 들으며 그 언어가 자신의 이름임을 자각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이는 그 이름이란 언어를 디딤돌로 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해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이름을 지운다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며 때로는 폭력적이다. 이름 대신 신입사원으로, 이름 대신 19번 훈련병으로, 이름 대신 누구 엄마, 누구 아빠로. 이렇게 지워진 이름의 빈자리에 이름의 탈을 쓴 여러 호칭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개인을 지우기 위해, 전체로 환원하기 위해, 관계성이란 틀에 가둬 놓기 위해서 이름은 지워진다.


이름 없는 자들.

하지만 이름의 의미와 이름을 대하는 방식은 시대마다 사람마다 달랐다. 조선사람들은 일단 이름부터 아주 많았다. 왜 그리도 이름이 많았을까. 조선에서는 이름이 아주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렇기에 함부로 부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짓는 이름인 초명(初名)부터 성인이 되기 전 어린 시절 집에서 부르던 이름 아명(兒名). 관례를 치르고 성인이 되면 스승, 혹은 윗사람이 지어주는 이름 자(字). 스스로의 신념 혹은 취향을 반영해 자신을 지칭하던 호(號)까지. 참 여러 가지로 불리고 불렀다. 지갑을 열면 우리를 반겨주시는 신사임당의 아들이자 조선의 대학자 율곡 이이의 초명은 이(珥).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이었다. 따라서 호인 율곡, 초명인 이이, 아명인 이현룡, 자인 이숙헌 모두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이름이 이토록 귀한 대접을 받지는 못했다. 이름이 불리고 기록되는 것. 이 지극히도 평범한 이치는 남성들의 권리였다. 여성들은 지어진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다른 명칭들로 불렸다. 어릴 때 지어주는 아명이 유일한 이름이었으나 이 이름도 결혼한 뒤에는 불리지 못했다.


왜 그녀들의 이름은 불리지 못했나. 바로 사대부가 남성들에게 여성들의 이름은 철저하게 보호해야 할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자신과 가족관계에 있는 여성을 말할 때는 성씨와 가족관계를 조합한 호칭을 사용해서 불렀고 피치 못해 이름이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개 (某)라는 글자를 써서 이름을 감추었다. 그렇게 조선 여성들은 아무개의 처 이 씨, 아무개의 모 김 씨, 아무개의 딸 최 씨로 불리고 기록에 남을 뿐이었다. 족보에서도 본관과 성씨만 남았다. 평민 여성들은 안성댁, 부산댁같이 출신지로 불렸다. 노비 여성들만이 자신의 부모와 주인에게 이름을 불릴 뿐이었다. 보호라는 명분에서도 노비는 제외됐다. 여성들의 이름은 가려지고 출신지, 가계에서의 위치, 작호가 이름을 대체했다. 드물게 역사에 기록된 여성들도 있었다. 양반가 여성 중 저술 활동, 예술 활동을 한 여성들로 우리가 잘 아는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같은 사람들 말이다. 사임당 신인선과 난설헌 허초희는 우리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허나 저술 활동과 예술 활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역사에 이름이 남았다는 것은 더 슬픈 비극이었다.

의금부(義禁府)에 전지하기를,

"난신(亂臣)에 연좌(緣坐)된 부녀(婦女) 내에 이소동(李小童)의 아내 천비(千非), 이공회(李公澮)의 아내 동이(同伊), 심상좌(沈上佐)의 아내 미비을개(彌飛乙介)·딸 계금(繼今)은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에게 주고, 이담(李湛)의 아내 소사(召史), 박기년(朴耆年)의 아내 무작지(無作只), 이오(李午)의 딸 평동(平同), 이유기(李裕基)의 누이 효전(孝全)은 익현군(翼峴君) 이관(李璭)에게 주고, 박팽년(朴彭年)의 아내 옥금(玉今), 김승규(金承珪)의 아내 내은비(內隱非)·딸 내은금(內隱今)·첩의 딸 한금(閑今)은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에게 주고, 조청로(趙淸老)의 어미 덕경(德敬)·아내 노비(老非), 최득지(崔得池)의 아내 막덕(莫德), 이현로(李賢老)의 첩의 딸 이생(李生)은 좌의정(左議政) 한확(韓確)에게 주고, 이현로(李賢老)의 아내 소사(召史), 민보창(閔甫昌)의 아내 두다비(豆多非), 김유덕(金有德)의 아내 금음이(今音伊)·딸 옥시(玉時)는 우의정(右議政) 이사철(李思哲)에게 주고 (…) (후략)

<세조실록 5권, 세조 2년 9월 7일 갑술 4번째 기사. 의금부에 난신에 연좌된 부녀를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다.>

보호의 명분으로 철저하게 감춰진 여성의 수많은 이름이 이토록 만천하에 드러날 때는 여성이 죄인이 될 때였다. 이렇게 보호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여성의 이름만이 공적, 사적 기록 관계없이 드러날 수 있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누구를 위한 보호이며 누구를 위해 감춰진 이름인가.’라는 질문 말이다. 당사자의 동의 없는 보호의 명분 아래 여성의 이름은 폭력적으로 다뤄졌다.


이 견고한 틀을 깨고자 한 사람도 드물게 존재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형원은 저서 「반계수록」에서 호적에 사대부가 여성의 이름을 기본 항목으로 포함시키자고 주장했다.

“부인은 다른 사람(=남편)을 따르는 자이므로 비록 이름이 있어도 사람들이 그를 칭할 때에는 반드시 그 남편의 호칭으로 부르지 그 이름을 직접 지목하는 경우는 없다. 자칭(自稱)할 때도 마찬가지니, 지금 아무개 댁, 아무개의 처 같은 부류가 그것이다. (…) 평상시에는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반계수록」 권 3 호적 中

허나 이 주장은 당시 관행과 제도에 정면으로 맞서는 파격적인 주장이었기에 유형원은 사적 영역에서 이름을 부르지 않는 관행까지 개혁하자는 주장까진 차마 펴지 못했다. 공적 영역에서라도 여성의 이름을 기록하고 사용하자고 주장한 유형원을 지지한 조선 후기 문신 유만주는 여성의 이름을 적지 않는 조선 풍속이 조잡스럽다고 자신의 일기에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여자에게 본디 이름을 감추어야 할 이치는 없다. 예기에서 여자가 혼인을 허락하고 나서 비녀를 꽂고 자(字를) 짓는다 했다. 한나라와 진나라의 사전을 상고해보면 비록 후비라 하더라도 그 이름을 기재했는데 수나라와 당나라 이후가 되어서야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는 사대부가의 부녀들에 대해 그 이름을 굳게 감추어서 심지어 신주에도 이름을 적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의심하는데, 이는 습속이 조야한 것이다.”

「흠영」 1779년 10월 11일 조


이렇게 이름 없이 살던 여성들이 이름을 가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09년 일제에 의해 민적법이 시행되면서 호적에 여성의 이름도 기재되기 시작했고 1910년 이후 출생한 여성들은 본명으로 기록되는 비중이 점차 늘어갔다. 세례명을 가진 여성들은 세례명을 호적에 신고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서양식 이름을 가진 조선 여성들이 역사에 등장하기도 하면서 남성과 동등하게 여성도 이름으로 불렸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

양반 여성이든 노비 여성이든 이름이 있었다. 양반가도 마찬가지였고 식자층이 아닌 평민, 노비들도 고유어로 자식에게 이름을 붙였다. 남아 여아 구분 없이 촌스럽고 천해 보이는 이름을 지어야지 오래 산다는 주술적인 의미를 따라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기를 염원하며 사랑 담아 지었다. 하여 간난이, 개똥이, 언년이 같은 조금 친숙한 이름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 지어준 이름이 있다 한들 진정 이름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이름이 비로소 타인의 입을 통해 발화되고 기록으로 남을 때 이름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시작됐고 조선 시대 여성의 이름을 통해서 이름이 있다는 의미를 다시 되짚어 보고자 했다. 지금 우리는 이름의 발화와 기록이 타율성에 의해 좌우되는 시대를 지나 누군가가 사랑을 담아 준 그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간다. 우리의 이름은 자유롭게 발화되고 공, 사 구분 없이 기록으로 남는다. 그 이름을 바꿀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지금 우리의 이름도 교묘하게 지워지고 가려지고 있단 생각이 드는걸까. 우리의 이름은 여전히 살아있지만 이제는 그 앞에 사회경제적 지위를 담은 호칭과 동경, 혐오를 담은 장식들이 붙는다. 이름 앞에 붙어있는 이 덩어리들의 무게 때문에 우리는 고꾸라지고 넘어지기도 하며 이 장식에 먹어버린 이름의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기도 한다. 없던 이름은 만들면 된다. 하지만 잡아 먹히고 자리를 빼앗긴 이름을 다시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이름은 그 자체로 완성형이며 그래야만 하는 것. 뭐가 붙어야 완벽한 이름, 완전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원래 없는 거보다 있다가 없는 게 더 힘든 법이니까. 그러니까 서로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 이름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 어쩌면 사소하고도 당연해 보이는 이 행위가 조금은 더 필요하지 않을까. 글을 마무리하며 불현듯 직급 대신 제3의 이름을 지어 서로를 호명하는 회사가 꽤 매력적이란 생각이 떠오른다. 기왕 사회생활을 한다면 그런 회사에서 시작하는 것을 목표로 도서관과 카페를 배회해볼 것을 다짐해보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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