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 01: 우문현답
때가 덜 묻어서였을까. 관심받는 게 마냥 좋았던 관종이라서 그랬던 걸까. 과거의 나는 사람을 참 좋아했다. 초중고 학창 시절엔 꽤나 활기차게 친구들과 어울렸다. 돌아보면 좋은 친구들이 많았다. 고등학교는 남고를 나왔는데 서로 부대끼면서 삼년 재밌게 보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드디어 동네를 떠나 편도 1시간의 통학시간을 투자해야만 하는 대학교에 진학했다. 새로운 환경과 그곳에서 만나게 될 새로운 사람들에 대한 기대감이 컷던 나는 엉겁결에 '과대표'라는 자리를 맡아 또 대학교 새내기 시절을 보냈다. 내가 열심히, 활기차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그렇게 행동할 수 있게 이끄는 것은 전혀 별개지만 큰 탈없이 재밌게 그 시절도 그렇게 보냈다. 그리고 난 '대한민국 20대 초반 남성'이란 틀에 속했기에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한다는 자기 최면을 걸어가며 입대를 했다. 그곳에서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지만 자대 배치받기 전에 잠시 거쳐가는 곳이 될 줄만 알았던 신병교육대에서 남은 군생활을 다 보내게 됐다. '조교'라는 역할을 수행하게 됐기 때문이다.
때는 2014년 08월. 갓 상병으로 진급하게 된 나는 타는 듯한 여름에 입소한 훈련병들을 대상으로 첫 '훈육 분대장'이라는 직책을 수행하게 되었다. 쉽게 말해 담임 선생님이 된 거다. 내가 있던 부대는 조교병의 직책을 교육 분대장과 훈육 분대장 두 직책으로 구분했다. 교육 분대장은 훈련병들이 훈련받아야 할 각 병기본 훈련 교육을 담당하는 조교들로 이병-일병 계급의 병들이 수행했다. 학교로 치면 각 과목별 선생님인 것이다. 이 교육 분대장 직책을 거쳐 상병이 되면 보통 훈육 분대장 임무를 수행하게 됐다. 훈육 분대장들은 훈련병의 훈련시간 이외의 병영생활 전반을 관리했다. 아침저녁 점호, 훈련 교장 이동시 인솔, 군가 교육 등등 기타 생활교육까지. 특히 교육 분대장 시절과 확연히 다른 점은 훈육 분대장은 자신이 맡은 훈련병들과 상담을 하고 훈육 일지를 작성해야 했다. 훈련병과 내가 키보드 몇번 두들기면 나오는 그들의 인적사항과 신상정보가 아닌 그 너머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렇게 훈련병과 상담이라는 이름의 대화를 나누고 나면 참 여러 가지 감정과 생각이 밀려왔다. 과거 상처를 담담히 고백하던 훈련병, 일찍부터 일을 시작했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훈련병, 늦은 나이에 입대하게 된 이야기를 하던 훈련병, 예민한 성격 탓에 옆자리 훈련병과의 트러블을 호소하던 훈련병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다. 예비군 5년 차가 된 지금은 그때 나눈 대화와 사람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깎여 나갔지만 이 시간이 깎아내지 못한 잊지 못할 사람이 있다. 오늘의 이야기는 이 조교 생활 중에 만난 한 훈련병에 대한 기억의 반추다.
당시 스물둘의 훈육 분대장인 내가 맡은 첫 훈육 소대 훈련병들 중 나이가 스물일곱인 형님이 있었다. 조교를 하다 보면 나보다 나이가 많은 '형님'들이 훈련병으로 들어오는 일은 흔하디 흔하다. 각자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는 법이니 군대에 오는 나이도 천차만별. 다만 나 역시도 역할이 조교일 뿐 사람인 이상 이 나이에 둔감할 수는 없었다. 특히 군인이기 이전에 나이의 논법이 인간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인 이상! 하지만 군대가 왜 군대겠는가. 나이의 논법은 철저히 무시되고 계급의 논법이 지배하는 이 곳이 바로 군대였다. 그렇게 난 군대의 특수성과 조교의 프라이드라는 최면을 걸어가며 나이가 많거나 혹은 험악한 인상의 훈련병들과의 '기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티 나지 않는 내면의 전쟁을 치르곤 했다. 하지만 형님은 내 걱정이 무색할 만큼 무던 무던하게 잘 따라줬다. 입소한 지 며칠 후 알게 된 사실로 형님은 사회에서 레슬링 선수를 하다 왔다고 했다. 모 시청에 소속되서 프로선수로 활약했고 메달도 딸만큼 엘리트 체육선수였던 형님은 돌이켜 보면 팔뚝과 손목이 보통사람의 족히 두배는 됐었다. 하지만 선한 인상으로 동생뻘 훈련병들과 잘 지냈고 소대 내 훈련병들도 형님을 잘 따랐다. 첫 훈육 소대가 수월했던 이유는 아마 형님의 이런 모습 때문도 있었을 테다.
이쯤에서 조금 갑작스럽지만 조교 역할을 수행하며 생긴 내 개인적인 콤플렉스를 고백하고자 한다. 그건 바로 '체력'이었다.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잦았던 난 조교 선발에 떨어지면 체력 때문이라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자신이 없었고 실제로 군생활 내내 중대 내에서 체력이 약한 축에 속했다. 이런 이유로 주눅도 많이 들었던 나는 내 콤플렉스의 정 반대에 위치한 엘리트 체육 선수이자 내 첫 소대 훈련병에게 '엘리트 운동선수의 삶은 어땠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고 돌고 돌아 드디어 그 형님 차례가 된 면담에서 난 속에 묵혀둔 질문 하나를 던졌다.
"밖에서 운동선수였다고 했는데 난 개인적으로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다 군대에 왔거든. 그래서 예체능을 하다 온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있는데 보통 예체능 하면 노력과 재능, 이 두 가지를 많이 비교하잖아? 이 둘 중에 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뭐야?"
돌이켜 보면 참 답도 없는 질문이다. 일단 예체능 분야가 아니라도 어느 분야에서든 노력과 재능 두 가지 요소 모두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가. 두 번째, 칼로 무 썰듯 노력과 재능이 차지하는 부분을 딱 자를 순 없다. 극한의 노력이 있다면 누군가의 재능을 뛰어넘을 수도, 신이 내린 재능은 노력의 영역에선 너무 멀게만 느껴지기도 하니까. 그러나 당시 나는 이 뻔한 질문을 형님께 건넸고 형님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을 하더니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놨다.
"허허.. 음.. 그냥 노력하는 게 재능인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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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의 이 대답 때문에 내가 보내고 맞이한 수많은 훈련병들 중 이 형님에 대한 기억은 지금까지도 그리도 앞으로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참으로 어리석은 질문에 과분한 현답 아닌가. 이 당시 형님의 나이보다 나이를 더 많이 먹은 지금의 나지만 누군가의 질문에 이런 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형님은 잠시 얼이 빠진 듯한 내 모습을 보았는지 몇 마디를 덧붙였다.
"운동하다 보면 매일 같은 거 하고 지루할 때도 있어서 저도 많이 훈련 빠지고 놀러 가고 땡땡이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러고 시합에 나가면 이미 공기가 다릅니다. 이미 나 스스로 자신감이 없고 위축되기 때문에 상대가 누구든 뭐 시합장이 어떻든 밖은 상관없이 무너집니다. 반대로 내가 좀 힘들지만 노력하고 준비 잘해서 가면 내가 아니까. 그러면 자신감이 있어서 그런지 성적도 좋게 나오고 그랬습니다. 그냥.. 정말 아무리 재능이 있고 해도 꾸준하게 노력할 수 있는 게 가장 큰 재능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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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문에 이런 현답을 던져준 형님은 수료식 날 가족과의 만남 이후 어땠냐는 나의 질문에 낚시를 하려고 했는데 아버지께서 낚싯대를 안 가지고 오셔서 못했다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렇게 기수가 마무리되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 sns를 통해 본 형님의 첫 휴가는 낚시를 해서 건져 올린 물고기 사진이 업로드됐다. 영락없는 낚시꾼의 모습이었다.
이 말을 들은 후로부터 난 뭔가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당장 아득해 보이는 걸 쫓아야 할 때마다 형님이 해준 '노력하는 게 재능이다.'라는 말을 노트에 쓰고 눈에 담으며 입으로 뱉어보곤 했다. 그리고 다시 형님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 오늘. 이 문장을 되새겨본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뭔가를 원해보고 바라본 지가 오래됐다. 전역을 해서 다시 돌아온 학교도 이제 졸업으로 떠나게 되고 지금의 나는 정착할 곳을 찾지 못했다. 애초에 나는 정착이라는 걸 하고 싶긴 한 건가?라는 일종의 부유 상태에 빠져있는 지금, 형님의 저 말이 날 다시 움직이게끔 할 날을 상상해 본다.
2020.04.21의 반추.
[반추(反芻): 어떤 일을 되풀이하여 음미하거나 생각함. 또는 그런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