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3월 09일 오늘. 네달만에 머리를 잘랐다. 가장 최근 예약날짜는 작년 11월 중순. 네달동안 이발을 안한 특별한 이유는 딱히 없었다. 머리를 안 자른 것일뿐 능동적이고 분명한 목적성이 없었기에 '머리를 길렀다.' 라곤 하지 않겠다. 그럼 이발한 이유는? 이 역시 딱히 없다. 다만 편의와 실용의 논리에서 기르는것 보다 이발하는게 득이 많음을 불현듯 깨달았다. 머리를 감는 시간 머리를 감을 때 소비되는 샴푸량 머리를 말릴 때 드는 시간 빠지거나 깨지는 머리카락을 치우는 수고로움 등등 내 인생에서 긴 머리로 인해 감당해야 할 것들이 어느순간 너무 많고도 무겁게 느껴졌다.
이 결심과 깨달음이 귀찮음에 먹히기 전에 눈 뜨자마자 포털사이트N에서 예약 가능 시간을 조회한다. 미용실은 매주 월요일 휴무였기에 오늘 예약이 빽빽하게 들어차있다. 비어있는 시간은 두 타임. 가장 빠른 시간 오후 두시반. 커트를 예약한 뒤 집을 나선다. 도서관 출근 후 간단한 인적사항과 스펙을 나열한 뒤 자소서 임시저장 버튼을 누르고 시간에 늦지 않게 잠시 도서관을 빠져나온다.
'안녕하세요.' 나의 인사에 사장님은 '오랜만에 오셨네요.' 라는 인사로 화답한다. 모니터에 나의 방문 내역이 떠있었겠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미용실을 바꿨다. 학교 앞 미용실은 졸업과 동시에 학교를 고정적으로 방문할 명분을 상실한 내게 커트비 외 왕복 시간, 교통비 2500원을 추가해서 가야 될 메리트를 못줬다. 그렇게 동네미용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자리를 잡게 된 이 곳에서 내 요청사항은 심플하다. 12미리 투블럭. 뒷머리 층 없게 상고로. 앞머리는 눈썹 살짝 위에 걸치게. 심플한 내 요청이 수용을 거쳐 구현되는 시간은 채 20분 남짓. 효율적이고 만족도도 높다.
그런데 늘 사장님 혼자 앉아있던 카운터에 한 사람이 더있다. 사장님은 내가 앉을 자리를 안내해주고 그녀에게 무언갈 알려준다. 그리고 그녀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본의 아니게 내 귀로 흘러드는 대화로 추정컨데 새로온 직원인가? 싶다가도 이것저것 알려주는걸 보니 어시로 왔거나 실습으로 와서 배우는 분으로 추측했다. 구직자인 내 처지에 빗댄다면 인턴사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직원이라면 일을 통한 배움보단 일 자체의 수행에 더 포커스를 맞췄겠지.
짧은 대화를 끝내고 내게로 온 사장님에게 네달의 시간을 받아낸 내 머리카락들이 잘려나간다. 나는 유독 머리 자를 때 시선처리가 어색하다. 평소 대화를 하거나 사람의 눈을 보는데 전혀 부담을 가지지 않는 나였으나 이 순간 처리해야 하는 시선이 부담스럽다. 네모난 거울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시선이라 그런걸까. 눈을 감아보기도 하고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에 시선을 두다보면 어느새 커트가 끝나있다. 오늘은 시선 둘 곳이 한 곳 더 있기에 어색함을 덜었다. 거울너머로 보이는 그녀는 카운터에 앉아있다가 '머리 감고 한번 더 볼게요.' 라는 사장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나 내 뒤편으로 온다. 사장님은 샴푸 전 간략하게 잔털정리방법을 전수해주고는 카운터로 돌아가고 그녀는 사장님을 대신해 클리퍼를 집는다. 그리고 잔털정리를 시작한다. 클리퍼가 여러번 내 뒷목을 훑고 지나간다.
클리퍼를 통해서 긴장감이 내 뒷목을 타고 뇌로 흘러온다. 당연하지만 숨길순 없는 미숙함도 마스크를 뚫고 보이는 듯하다. 일단 힘이 많이 들어가있다. 사장님의 부드럽지만 가벼운 손목스냅과 달리 꽤 경직되있다. 제대로 된건가? 하는 의구심이 나와 그녀 모두의 마음속에 공통적으로 싹트고 있었을터. 얼마 지나지 않아 클리퍼가 멈추고 이제 스펀지를 집어든다. 스펀지는 잘려진 머리카락을 터는게 목적이나 그녀의 손에 들린 스펀지가 수행하는 행위는 지우개처럼 공책을 민다는 행위에 더 가까웠다. 뒷목이 빨갛게 붉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샴푸를 하러 간다. 물 온도를 묻는 질문에서부터 조심스러움과 기계적인 느낌도 함께 담겨있다. 그리고 시작되는 샴푸질에서도 마찬가지. 기계적이면서 조심스러움이 느껴진다. 샴푸질이라는 행위에 꼭 필요한 제스쳐를 기계적으로 수행하면서도 힘의 적당함을 파악하지 못해 조심스럽다. 어쩔 수 없지만 샴푸질에서 개운함이 덜하다. 시원시원하게 두피를 팍팍 훑지 못하고 이곳저곳 배회하는 손. 사실 어느 정도 힘을 줘야 세게 힘을 준것이고 어느정도가 너무 약한지를 아직은 모르는게 당연지사. 묵묵하게 눈을 감고 샴푸를 받는다.
그러면서 지금 내 두피를 뚫고 전해지는 이 감각과 경험을 흘러보내지 않고 잡아둔다. 그리고 생각한다.
처음에 대하여. 미숙함에 대하여. 미숙이 능숙이 되기까지 받아내야 하는 시간에 대하여. 그리고 그 시간을 받아내주는 사람들에 대하여. 능숙함과 프로페셔널을 향해 나만 그 시간을 받아내고 거쳐가는게 아니지 않을까. 미숙한 나를 지켜봐주고 채우지 못한 영역을 대신 채워주는 동료들. 내 미숙함을 클레임이 아니라 약간의 너그러움을 발휘해 받아주는 클라이언트.(물론 비즈니스는 자선사업이 아니다. 서비스나 제품에 지불한 페이에 상응하는 퀄리티는 당연지사. 그 부족함을 메꿔줄 사수와 동료들에게 감사를...) 그 시간을 함께 받아내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능숙해지고 프로가 되어간다.
나 역시 어딘가에서 신입사원으로 시작을 할 것이기에 어디선가 나 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시간을 같이 받아내 줄 동료와 클라이언트의 모습을 샴푸를 받다가 상상해본다. 그 순간 너무 멀리까진 나가지 말라는 듯 생각을 뚫고 시원함이 밀려온다. 두피 마사지가 꽤나 시원시원하다. 손짓에선 세심함과 결의가 느껴진다. 신입이라고 미숙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숙함이 있기에 그 빈자리에 세심함과 결의 의욕과 패기같은 신입에게서만 느낄수 있는 무언가가 담기는 것 아닐까? 아까 덜 개운하던 머리가 지압을 받으며 개운해졌다. 간지럼을 잘 타는 체질이라 시원함에 딸려오는 간지러움을 참느라 약간 미간에 힘을 줘본다.
자리로 돌아가 머리를 말려주고 나면 그녀가 해야하는 일은 끝난다. 이제 수행되어야 하는 영역은 다시 사수이자 사장님의 몫. 수정 볼 부분은 많지 않다. 얼굴에 묻은 잘려간 머리카락의 흔적을 걷어내고 현금DC 20프로를 적용받아 1만2천원을 커트비로 지불한다. 3천원 할인은 구직 이후에도 크게 느껴질 것 같다. 서비스에 대한 값을 지불하고 나면 감사하단 인사를 서로 나누는 것으로 비즈니스의 과정은 끝난다. 오늘은 서비스를 두명에게 받아으니 내 뒷머리 잔털과 머리를 감겨준 그녀에게도 인사를 건넨다. 다음에 올때도 있으려나? 네달은 너무 심했으니 옆머리와 뒷머리가 지저분해지는데 한달. 한달에 한번씩은 가자고 다짐해본다. 다음에 올때는 아마 한층 여유로운 손목스냅과 지압법을 터득한 채로 손님을 맞이하겠지. 그녀가 걸어갈 길을 응원한다.
네달만의 이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