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불운.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사태에 대하여.
일주일에 두 번 쿠팡 물류센터로 아르바이트를 나간다. 이름과 생년월일 같은 인적사항이 진입 장벽의 전부인 이 노동을 시작한 건 햇볕이 점점 뜨거워지던 유월. 36개월 만의 노동은 밤잠을 설치며 스스로를 작게 만들었지만 흐르는 시간은 햇볕의 뜨거움마저 식게 만들기에 나의 긴장감과 불안감도 점차 작아졌다. 긴장감과 불안감이 줄어든 자리엔 내가 하는 노동의 실체에 대한 인식이 채워졌다. 그렇게 내가 보게 된 쿠팡 단기직 혹은 일용직 노동의 특성을 한 단어로 정의 내리자면 바로 '유연성'이다.
1. 근무 일자의 유연함. 지원자가 희망하는 노동 일자에 근무 신청을 하고 확정되면 근무가 가능하다.
2. 수행해야 할 노동의 불확정성. 단기 사원은 근무 시작 전 각 공정으로 차출된다. 고정적인 공정에 근무가 불가능하기에 근무 강도가 다른 공정에 배치된다는 불만 혹은 수행 경험이 부족한 공정에 배치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대기하다가 각 공정 관리자들에게 차출되어 투입된다.
오늘 난 이 유연성으로 인해 생긴 일을 쓰려고 한다.
출근부터 공정 투입까지의 일련의 과정은 1. 셔틀버스 탑승 후 하차. 2. 출입 키 수령 및 일지 서명. 3. 개인 짐 보관 및 애플리케이션 출근 기록. 4. 대기 후 공정 차출의 단계로 진행된다. 공정은 크게 상하차 물류 업무를 수행하는 Hub와 입고, 재고 보충, 출고 업무를 담당하는 FC로 나눠진다. 그런데 요즘은 Hub 근무 인력 수급에 지장이 생긴 건지 특별 인센티브 근무자 모집 안내와 추가 근무 인원 모집 문자가 자꾸 오더니 내가 출근한 오늘 FC업무에 지원하여 출근한 남사원들까지 현장에서 Hub로 차출해야 한다는 인사 담당자의 사전 안내가 있었다. 공정에 배치되지 않고 남아있던 남사원은 총 아홉. 그중 최근 차출된 경력?을 가진 둘은 담당자가 융통성 있게 차출에서 제외시켜준 뒤 남은 일곱 중 둘을 가려내야 했다. 담당자는 3인 1조와 4인 1조 두 조로 인원들은 나눠 가위바위보를 해달라는 주문을 했고 그렇게 내 오늘 하루의 노동을 건 가위바위보가 시작됐다. 예정에 없던 사태는 그저 서로 운빨이란 같은 무기를 쥐고 싸웠기에 꽤 공정했고 그저 내 운빨이 그들의 운빨보다 약해 패배한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렇게 3인 조에서 패배한 나와 4인조에서 패배한 다른 남사원 한 명이 Hub로 현장에서 차출되고 그렇게 그날의 업무는 시작되는 듯했다.
승자는 꽤나 수월한 공정으로의 배치라는 전리품을 얻었고 패자는 지옥의 상하차라는 징벌을 받는다. 겸허히 내 소소한 불운을 탓하며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라고 스스로가 처한 상황을 빗대며 이 사태를 해석한 나와 달리 다른 남사원은 자신에게 닥친 이 사태의 불가해성에 분노하듯 혼잣말을 쏟아냈다.
그와 동병상련을 느끼며 이 소소한 불운을 털어 넘기고자 그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넸고 그는 자신의 억울함과 불운의 불가해함을 나에게 이야기했다. 그래. 이 정도는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그의 'x 같네 x발'이라는 욕설은 그와의 동병상련 혹은 전우애에서 날 떨어뜨려 놓았다. 순식간에 생긴 거리감. 동시에 '이렇게 까지 할 일인가?'라는 질문이 탄생했다. 내 옆에는 Hub로 인원 두 명이 가야 한다는 안내를 한 담당자가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내가 들었다면 그도 들었을 터. 이 욕설이 향하는 지점은 어디인가. 그저 토해내 듯 뱉은 말인가 그 불운의 원인을 그에게 돌린 것인가. 그는 듣지 못했거나 들었어도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내 오지랖이 넓은 건가. 담당자는 업무 유형이 변경되었으니 어플을 다시 켜 업무 유형을 변경해야 된다는 안내를 해주었고 그의 안내대로 업무를 변경한 뒤 근무지로 남사원과 같이 이동했다.
채 3분이 안 되는 이동 시간에 나눈 그와의 대화에서 그는 자신의 직업을 사회복지사라고 밝혔다. 유연한 노동에 자신의 시간을 투자하여 부수적인 수입을 얻고자 한 그는 동시에 그 유연성이 주는 업무의 불확정성에는 울분과 욕설을 토했다. 누군가에겐 따뜻한 사회복지사이자 누군가에게는 조금은 과격한 노동자인 그를 보며 인간의 입체성에 대한 생각과 '이렇게 까지 할 일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와의 인연은 아침 조회 이후 다른 업무에 배치되면서 끝이 났다.
그와 나 모두 여우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났고 둘 다 지는 해를 보며 호랑이 굴을 빠져나왔다. 그는 오늘의 이 사태를 어떻게 되새기며 잠에 들었을까. 나처럼 소소한 불행일지 불가해한 천재지변일지. Hub 차출을 안내한 그는 남사원의 욕설을 들었을까. 듣고도 아무렇지 않았을까. 답이 없는 질문들 중 나와 남사원과 담당자 셋 중 이 일을 글로 쓸 만큼 많은 생각을 하는 건 나뿐 일 거란 생각만이 유일한 답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