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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쳐진 존재.

열심히 죽어가는 건지 열심히 살아가는 건지.

by 윤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기독교는 믿지 않지만 예수님의 이 말은 꽤나 설득력 있게 들린다. 사실 일하지 않고도 계속 먹을 수 있는 자가 얼마나 있을까? 살기 위해 해야만 하는 노동은 숙명처럼 여겨지기에 모든 노동자들은 가슴속에 일말의 비장함을 품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 노동자의 비장함은 신입 사원들의 눈빛으로만 그 존재를 드러내는 듯하다.


나 역시 비장함과 긴장감 보단 익숙함이 자리 잡은 출근길. 한 남자를 보았다. 탑승지 옆 버스정류장 파란 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태우는 중년의 남자. 오전 8시도 안 된 시간 도시의 버스 장류장이 대부분 셸터형으로 교체된 지 오래지만 그 버스정류장엔 고작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 다섯 개만 남아 이곳이 버스정류장임을 알리고 있다. 남자는 연신 연기를 들이마셨다가 뿜어냈다. 꽤 깊에 들이마신 듯 연기가 한겨울 입김 마냥 높고 길게 이어진다. 조금 더 넓은 시야에서 들어온 남자는 검은색 양복에 검은 넥타이와 구두를 신고 있다.


아. 그 순간 난 추리소설 속 탐정이 된 듯 그 남자가 왜 거기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냈다. 버스정류장은 요양병원 앞에 있었고 그 요양병원 1층엔 장례식장이 있다. 조문객이 방문하기엔 이른 시간, 그 복장으로 태우는 담배. 그는 아마 가까운 사람을 떠나보내는 중일 테다. 누군가를 잃어가는 중인 사람. 남자가 왜 거기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지 지레짐작하게 된 나는 시선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5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셔틀버스가 도착했고 그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졌다. 날씨는 화창했고 도로에는 차도 없었다. 그 아침에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하고 누군가는 가까운 사람을 떠나보내는 중이었고 누군가는 생의 한복판에서 살기 위해 일터로 향했다.


날씨가 무척 더웠던 7월 초 어느 날. 그날도 오늘과 비슷했다. 일종의 데자뷔. 그날도 오늘처럼 화창했으나 날은 더 더웠다. 더 많은 사람들이 버스에 탔지만 고요했다. 창가 승객 대부분은 7월의 강렬한 햇빛을 막기 위해 커튼을 쳤고 난 홀로 커튼을 열어 창밖을 응시했다. 꽤나 익숙해진 출근길, 시선을 잡아 끄는 건 딱히 없을 법도 한데 그날은 달랐다. 칠흑같이 짙은 검은색 도장에 보통 차보다 더 길게 뻗은 외형. 자연스레 움직인 시선 끝에 영화에서나 볼 법한 리무진이 있었다. 내가 탄 버스와 평행하게 달려가던 리무진은 조금씩 버스를 앞질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꽁무니에 링컨이라는 차의 딱지를 보인 뒤 사라졌다.


7월 초 출근길에서 본 리무진을 8월 말 퇴근길에 떠올리는 이유는 그 차의 차종도, 브랜드도 아니었다. 그 차가 걸어 둔 메시지 때문이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리무진 뒷 유리창 위에 번쩍번쩍 빛나는 LED 전광판이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 너무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LED와 죽음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미 죽은 사람과 살아가는 사람은 그렇게 도로를 평행하게 달리고 있었다. 두 존재들은 길 위에서 겹쳐져 있었다. 겹쳐있던지도 모른 채. 그날의 서로의 목적지는 달랐으나 종착지는 같다고도 생각했다.


오늘 스쳐간 검은 옷의 남자와 7월의 출근길에 스쳐간 검은 리무진. 난 생의 길 위에서, 생을 이어가기 위한 길 위에서 죽음과 스쳤다. 난 살아가는 중인가 죽어가는 중인가. 겹쳐있는지도 모르고 고개를 떨구고 있던 다른 승객들. 그들과 난 열심히 살아가는 자이자 동시에 열심히 죽어가는 자이기도 했다.


다시 한번 묻는다. 난 죽어가는 중인가. 살아가는 중인가. 답한다. 살아있기에 죽어가고 죽어가기에 살아있다고. 그저 종착지를 향해 걸어갈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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