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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고 Aug 11. 2022

수정아, 우리 이제…그만할까?

밑도 끝도 재미도 없는 수정의 역사

주의_이 게시물은 의식의 흐름대로 막 쓰여있음.


여자 이름 중 흔한 것이 '수정'이라던데, 이상하게도 나는 학교에서도 밖에서도 수정이란 사람을 만난 적이(아마도 거의) 없다. 대신 카피라이터와 AE로 일하며 만나지 못했던 모든 '수정'이들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몽땅 만나게 되는데... 화학반응 전후의 질량이 보존되고, 사람이 겪을 행복과 불행의 총합도 정해져 있다는 말도 있으니 수정이와의 만남 또한 그 수가 정해져 있다 해도 그리 이상할 일은 아니겠지. 다만 정해진 만남의 수가 이리도 많고, 수정이가 이토록 강력하고 끈질긴 무형의 모습인지 몰랐을 뿐.


"내일까지 슬로건 수정이요. 영상 대본 수정이요. 아이디어 수정이요. 네이밍 수정이요. 캐릭터 수정이요. 스크립트 수정이요. 기획 수정이요. 이것저것 보이는 거 다 수정이요. 뭔지 모르겠는데 일단 수정이요. 두 시간 후까지 수정이요." (야!)


수정의 이유는 다양하다. 우선 내가 만든 결과물에 오류가 있거나 클라이언트가 만족스러워하지 않은 경우. 이런 수정은 거의 1-2회(3번까지 가면 내 능력에 대한 회의감과 절망이 시작) 안에서 해결된다.


두 번째, 힘들게 반복되지만 그래도 어느 선에서는 끝이 나는 경우인데, 프로젝트 방향이나 타깃이 바뀌었을 때(사실 광고주도 어찌할지 몰라 그냥 몇 가지를 계속 시켜보는 상태), 그리고 그냥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기타 등등의 상황이 포함된다. (광고_주님 마음이란 뜻이다)


아이디어의 원천이자 일을 위한 생명수. 나는 호모카페인스 사피엔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끝없는 수정이와의 만남이 이어지는 경우. 이 위험한 만남은 늘 작업의 결과보다 그 '시작'이 문제다. 혹시 각 직종별 하지 말아야 할 금단의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예를 들어 병원 응급실에서는 '오늘 조용하네'라는 말이 나오면 그때부터 카오스가 펼쳐진다거나) 뭐 생각해보면 어느 회사든 한가하다고 말한 순간부터 지옥이 펼쳐지긴 하지. 아무튼 결은 좀 다르지만, 클라이언트에게 듣고 싶지 않은 그 금단의 말은 바로 "아무것도 몰라요. 알아서 잘해주세요."다. 이 한마디의 말은 분신사바의 주문처럼 이승에 한이 서린 수정이의 원혼을 끝없이 소환한다.


다시 해석하자면 "(일단 내 맘에 뭐가 들지) 아무것도 몰라요. 알아서 (오케이 할 때까지 이것저것 다) 잘해주세요." 늘 생략된 것이 더 무서운 법이다.


이 말을 꺼낸 클라이언트는 90%의 확률로 모든 결과물이 나온 후, 갑자기 없던 취향이 발동하고 의지가 불타오르며 브랜드와 마케팅 전문가가 되는 마법이 펼쳐진다. 그러나 본질은 변함없이 처음에 말한 "아무것도 몰라요"기에, 결정은 못한 채 베스킨라빈스 31 테이스팅 스푼 마냥 이것도 시켜보고 저것도 시켜보며 서른한 가지 모든 경우의 수를 다 맛보려고 하는 것이다.  

(다만 이건 내가 다녔던 에이전시의 주력 분야가 특수했기에 일어난 상황이다. 대체적으론 2번째 경우에서 마무리
+ 그리고 동일하게 '모릅니다 알아서 해주세요'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의견을 나누고 합리적으로 결과를 내는 클라이언트도 물론 많이 있다.)


결국 이게 수정이 맞나 싶은(신규와 다름없는) 대공사를 Ver.1345897804까지 수정에, 수정에, 수정을 더해서 어머 깜짝야! 반복하다 정신을 차리면 마치 내가 '엣지 오브 투모로우'나 '사랑의 블랙홀'처럼 무한의 타임루프에 갇힌 건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곤 한다. 하지만 영화에 엔딩이 있듯, 끝없는 수정도 종국엔 결과물이 나오는 법. 비록 작업물의 원래 모습은 모른 채 형태도 없이 너덜너덜하지만, 광고주가 원하는 수정을 해줘야 돈을 벌 수 있으니 이것이 작업자 세상의 수정자본주의 아니겠는가.


- 반복되는 수정 속 의식은 대충 이렇게 흐른다.

#수정 #수정자본주의 #케인즈 #하인즈 #케첩 #케첩은빨간색 #빨간건적외선 #자외선은보라색
#보라색은_자수정 #자_수정해_주세요


#이게뭐라고이글도몇번수정함

#클라이언트여러분일을주세요수정잘해드립니다(방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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