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이야기 1_굳은 다짐 같은 건 없었습니다.
짐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햇수로 5년, 만 4년 남짓한 시간은 고작 백팩 하나에 차곡 정리되었다. 쏟아지는 햇살에 나른해진 늦봄 월요일. 수정 요청이 들어온 영상 스크립트를 고치다 미적지근해진 커피가 자꾸 입에 거슬렸다. 새로 커피를 내리러 일어나는데 문득 옆자리 팀장님 얼굴이 보인다. 그때 고장 난 볼펜 스프링처럼 툭 튀어나온 말. "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월요일 오전 그렇게 마주 앉은 회의실에서, 몇 달간 형체 없이 맴돌던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아무 준비도 계산도 없이 입 밖으로 꺼내졌다. 몇 달의 고민이 무색하게 ‘오늘 꼭 퇴사한다고 말해야지!’ 류의 굳은 의지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퇴사는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나는 회사 스케줄에 맞추겠다 했고, 회사는 나의 편의에 맞춰주겠다 했다. 들어왔던 프로젝트들이 동시에 밀려 나가는 타이밍에 따라 생각보다 조금은 이른 퇴사 일자를 잡았다. 물론 에이전시 카피라이터의 숙명이라도 되는 듯 전날까지 수정 업무에 신규 업무까지 한 건 안 비밀. 행여 업무 분위기에 해가 될까 떠나기 일주일 전 급작스레 꺼낸 퇴사 소식에 동료들은 놀람과 아쉬움을 표했고, 난 며칠간 점심과 커피까지 잘 얻어먹었다.
팀장님을 제외하고 유일한 카피라이터였기에 언제나 잘하고 있는 것인지 끊임없는 혼란과 걱정의 날들이었다. 분명 느꼈을 나의 모자람에도 가는 길까지 따뜻한 말들로 응원과 섭섭함의 마음을 건네준 사람들. 늘 고마운 배려 속에서 일했었구나, 이번에도 헤어지는 길에 들어서고야 알게 된다.
금요일 오후, 얼마 되지 않는 짐을 가방에 쓸어 담고 회사를 나왔다. 분명 전날까지 찬바람이 횡횡이더니, 햇살이 포근하다. 괜히 지금 회사가 위치한 신사역에서 이사 전 있던 가로수 길까지 걸어보았다. 등에 땀이 살짝 밸 때쯤 5년 전 면접 시간을 기다렸던 스타벅스에 들어가 평소엔 잘 시키지 않는 딸기요거트블렌디드를 주문했다. 이름도 참 길지. (사실 딸기요거트블렌디드 인지 딸기어쩌구프라프치노 인지 검색해 보고 알았다. 맛도 똑같은 거 아니었나?) 그러고 보니 면접날은 뻘뻘 흘리던 땀을 식히려 아이스 페퍼민트를 마셨던가. 5년 전의 시작도, 1분이 아쉽던 4년간의 점심시간도 그리고 마지막도 여기군, 따위의 생각을 하며 흐물대는 종이 빨대로 음료를 빙빙 저어댄다. 가라앉았던 지난 기억들이 딸기시럽마냥 수면 위로 떠오른다.
오후 세 시 남짓 넓은 카페에 그득 들어찬 사람들. 평일 가로수길 카페의 사람들을 볼 때면, 동료들과 ‘저 사람들은 뭘 하길래 이 시간에 여기서 커피를 마실까?’하며 호기심과 부러움이 섞인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내가 바로 카페의 그 사람들 중 하나가 된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