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 그녀

by 후이빈

아담한 키에 까만 머리, 필리핀계 이민자인 그녀는 60보다는 70에 가까워지는 나이의 손님이다.

까무잡잡한 피부, 검은 머리의 검은 눈동자. 이제는 각양각색의 인종에 익숙해졌지만, 아시아인을 보면 나도 모르게 조금은 더 친밀함을 느끼게 된다.

오늘도 그녀는 스튜디오에 슈퍼봉지를 들고 들어섰다.

"이거 갖고 왔어"

"오늘은 또 뭐 가져왔어요?"

"요새 오렌지랑 레몬이 많이 열려서 줄려고 가져왔지'"

"이렇게나 많이. 저번에 준 아보카도도 아직 먹고 있는데!"


주는 행복에 빠진 그녀의 미소가 아름답다. 벌써 여러 번. 생명이 있는 식물이라면 우리 집에서 다 죽어나가는 상황이고 보니 그녀가 직접 기른 싱싱한 과일들이 신기할뿐더러 그 맛이란 정말이지 처음에 깜짝 놀랐다. 오랜만에 한국에 가서 여름자두를 먹고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처럼 그 달콤하면서도 새콤한 맛이란. 내가 이때까지 돈 주고 사 먹던 오렌지는 뭐였단 말인가.... 순간 자괴감이 훅 머리를 친다.


"너무 고마워요"

"먹을 사람이 없어서 가져왔어. 맛있다고 하니까 더 갖다 줄게."


순간 손녀들에게 연신 열무김치며 메추리알장조림 따위를 끊임없이 무한리필하시는 부모님이 생각난다. 한국에 갈 때마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퍼붓는 부모님께 그만해도 된다고 버릇 나빠진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나. 그러나 사실은 계속 고맙다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나. 미국에서는 그만해도 된다고 잔소리할 사람이 없다. 과하기보다는 언제나 모자라는 듯한 그 채울듯 말듯한 아쉬움의 선. 나는 그녀에게서 우리 부모님을 본다. 한국에 갈 때마다 허전해진 마음의 곳간을 최대한 채우고 오려고 노력한다. 나뿐 아니라 아이들의 곳간도 한국에 갔을 때 아주 빠른 속도로 차오르는 것을 목격한다. 그게 무엇이었든 아이들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무언가가 그들의 저장고를 채우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돌아와 나는 그 곳간을 조금씩 털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손님들에게 또 가족들에게 나눈다. 그러다 예상치 못하게 또 이렇게 내 비어 가는 곳간을 기가 막히게 알고 채워주는 것이다. 굶어죽지 말라고.


나이가 나이인지라 낙상도 하고 무릎도 심하게 다쳐서 의사가 수술을 권유했지만 강단 있는 이민자답게 그녀는 의사말을 귓등으로 흘리고 필라테스를 시작하셨다. 조금씩 조금씩 나아진 그녀의 무릎은 이제 일주일에 세 번 수업을 참여해도 끄떡없을 정도가 되었으니 이럴 때 나는 그녀와 같은 이민자라는 정체성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 진다. 그것이 관련 있든 없든 간에.


은퇴 후 친구들과 함께 최근에 유럽여행을 다녀왔다고 자랑을 하며 또 다른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녀.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 저렇게 환상적으로 천천히 잘 가꾸어진 뒷마당의 소중한 과실처럼.

일단 그녀에게서 받은 걸로 내 곳간부터 채우자. ㅎㅎ

매거진의 이전글새벽 6시 수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