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한국에서 어떤식으로 컴플레인을 하며 사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미 20년이 다 되어가는 기간동의 미국살이중 잠깐씩 한국에 방문하는 동안 내가 어딘가 조직에 대고 컴플레인을 한 적은 두 번 정도였던 듯하다. 하나는 해외체류자에 대한 공무원의 처리방식과 태도에 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코스코 회를 먹고 탈이 나서 전화와 이메일로 했던 컴플레인이었다. 전자의 경우는 미국과는 차원이 다르게 서비스정신이 발달한 한국임을 갈 때마다 감탄하는 나에게도 무책임하다고 느껴지는 공무원이었으니 그 구태의연함이 아주 놀라운 분이었고, 한국 코스코는 두 세번의 밀당끝에 회값과 약값을 받고 넘어갔더랬다. 두 번 다 컴플레인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제기하는 쪽이었고 내 입장에서는 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의 거리낌 없이 취한 행동이었다.
미국에 와서도 그러한 생각으로 컴플레인을 한 적은 여러 번 되었던 것같다. 주문한 물건이 보름이 지나도 도착하지 않을 때, 받아보니 이미 망가져 있을때, 음식점에서 인종차별을 당했다고 느꼈을 때. 한국에서는 전혀 겪지 않았던 종류의 황당한 일들이 여기서는 부지기수로 일어난다고 느끼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미국 일처리방식에 대한 전반적인 기대치를 낮추기 시작했다. 기대가 덜하면 실망도 덜하니까. 그 덕분에 컴플레인이 줄어드는 대신 내가 좀더 꼼꼼하게 챙기고 바지런해지는 타의적 변화를 맞이했다. 어떻게 보면 감사할 일인것도 같지만 기분은 그렇게 신나지는 않는 일이다.
내가 일하는 미국 스튜디오에서도 역시 컴플레인은 들어온다. 면전에다 대고 말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고 주로 이메일이나 심한 경우 전화로 하기도 하는데 그 내용은 그야말로 다양하다. 일단 가장 큰 컴플레인은 강사에 대한 평가다. 너무 수준이 안 맞는다거나 말이 많다거나 준비가 안된 강사같다거나 하는. 스튜디오 자체에 대한 컴플레인은 많지 않다. 인테리어나 도구를 바꿀 수 있는게 아니므로 다른 좋은 스튜디오를 찾아가면 되니까.
강사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때 내가 받았던 컴플레인은 수업레벨보다 너무 쉬어서 몸에 자극이 안 왔다는 내용이었는데 그때 나는 좀 충격을 받았다. 심혈을 기울여서 준비한 수업이었는데 영어가 딸렸나? 누군지 밝히지 않는 특성상 수업을 떠올려보며 그랬을만한 멤버를 추정해보기도 했다. 동작을 빠르고 강하게 하는게 핵심이 아니라는 나의 필라테스철학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이야기인가? 강사리더가 완곡한 문자로 나에게 수업이 힘들다면 바꿔주겠다고 친절함을 발휘해주었지만 기분은 더 나빴고 그 충격에 주말 내내 나만의 어두운 동굴속으로 칩거했던 생각이 난다. 그 다음주에 똑같은 수업을 다시 들어가기전 평소보다 아주 오랫동안 마인드 컨트롤을 하느라 차에서 쉽게 내리지 못했던 그 마음도 함께 떠오른다.
컴플레인을 하는 사람은 그 응답을 받으면 해결이 되고 그것으로 마음의 짐도 내려놓는다. 물론 시간이 지나도 기억을 하지만 그 때의 기억은 당당했던 자신의 모습과 그것에 대한 댓가가 주를 차지한다. 그렇지만 컴플레인을 받은 사람은 그렇게 깔끔하게 뒤끝이 없게 마무리되지 않는 듯하다. 설사 어떤식으로든 상황이 종료된 후에도 그렇다. 내가 했던 그 많은 컴플레인보다 그 때 받았던 컴플레인이 생생하게 기억이 잘 나는 것을 보면.
그런데 컴플레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꼭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대부분은 그 순간 자신이 느낀 불편함이나 실망을 어디엔가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권리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소비자로서의 정당한 표현 방식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 말이 도착하는 지점이다. 말하는 사람에게는 한 번의 표현이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그 말이 꽤 오래 머무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스튜디오에서 일을 하며 점점 깨닫게 된 것은 컴플레인 자체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그 말이 나를 평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준비한 수업, 내가 쏟은 시간, 내가 가진 철학까지 통째로 부정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보니 그 말이 꼭 나라는 사람 전체를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떤 날의 수업, 어떤 컨디션의 몸, 어떤 기대를 가지고 온 한 사람의 경험이었을 뿐일 수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어떤 날에는 누군가에게 “너무 쉽다”는 이야기를 들은 수업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오늘 너무 좋았다”는 메시지로 돌아오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필라테스 수업이라는 것이 결국 정답이 있는 시험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같은 음악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감동하고 어떤 사람은 아무 느낌이 없는 것처럼, 같은 동작도 누군가에게는 도전이고 누군가에게는 워밍업일 수 있다.
그래서 요즘은 컴플레인을 들으면 예전처럼 바로 마음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물론 여전히 기분이 좋을 리는 없지만, 그 말을 조금 떨어져서 보려고 노력한다. 그 안에 내가 배울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조용히 흘려보내려고 한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수업은 아마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내가 했던 컴플레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순간의 불편함과 억울함 속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그것을 받은 사람에게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고받는 수많은 컴플레인들은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한 말이라기보다, 각자가 가진 기대치와 경험의 차이가 잠깐 부딪히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즘 나는 컴플레인을 들으면 이렇게 생각해 보려고 한다.
아, 이 사람은 이런 경험을 기대했구나.
그리고 나는 그 기대와 조금 다른 길에 서 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