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천직을 찾다.

나는 두렵지 않았다.

by 후이빈

곧 18살이 되었지만 나는 학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신 희한하게 학원에서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했다. 이웃에 교복을 입고 여학교를 다니는 애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난 내 나이가 너무 많게만 느껴져서 자꾸 마음을 접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대신 영어를 배우기 위해 오빠가 가르쳐준 곳으로 찾아가 알파벳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선생님이 어찌나 흑판에 순식간에 갈겨쓰고 지워버리는지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집으로 공책을 가져와서는 오빠에게 불평하곤 했다. 선생님이라면 응당 학생이 알아듣도록 해야 하는 게 아니냐며 불평하는 나에게 오빠는 또 힐끗 보더니

“그냥 계속 듣고 따라 하다 보면 되는 거야 바보야”

하고 툭 대답했다. 뭔가는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학원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영어공부는 영 재미가 붙지 않았다. 오히려 지지부진한 영어공부보다 나는 집에서 수를 놓는 게 훨씬 좋았다. 처음에는 언니들이 모여 앉아 수다를 떨며 수놓는 걸 보고 어깨너머로 따라 하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언니들은 내가 놓은 수를 보고는 감탄하며 부러워했다. 수를 놓고 있으면 나는 몇 시간이 몇 초처럼 손쌀같이 지나갔고 더 많은 디자인이 생각났다. 소질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더욱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즐거워했다.

그렇게 학원을 다니며 겨우 알파벳을 배울 무렵 아버지게 나에게 그러셨다.

“얘, 너 집에 있지 말고 양재패션학원에 들어가라. 결혼해도 필요하니까.”

“예? 거기가 어딘데요?”

아버지는 오려낸 신문 귀퉁이를 주시면서 찾아가 상담을 해보라고 하셨다. 당시 양재학원은 남산 KBS 방송국 올라가는 중간쯤 있었는데 뭐 하던 집인지 모르지만 아주 큰 절간처럼 생겼었다. 일본동경에서 공부하고 오셨다는 김랑공 선생님이 원장님으로 계셨는데 키도 크고 미국여자처럼 훤칠하니 멋있기가 이를 데 없으셨다. 그 후 한참이 지나 내가 미국올 때는 수도사대 가정과 교수로 재직하실 정도로 실력 있고 멋진 여성이셨다. 원장님의 자세한 설명을 들을수록 나에게 이보다 잘 맞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나는 신나서 입학원서를 받아 들고 와서는 아버지께 다짜고짜 속성과에 가고 싶다고 했다. 속성과는 다른 과보다 실기를 중심으로 하는 과정으로 6개월 후 졸업하면 취직을 할 수 있는 과정이었다. 등록비는 저렴한 대신 실습비가 꽤 드는 게 염려되었지만 아버지는 흔쾌히 지원해 줄 테니 걱정 마라 약속하셨고 나는 그 길로 바로 입학을 해버렸다.


우리 반 아이들은 전부 내 또래의 소학교 또는 여학교출신 애들이었고 나의 단짝 친구 경희는 무학 여교를 졸업한 아이였는데 부모님이 명동에서 아이스크림집을 하셨다. 나의 첫 담임 김수남 선생님은 노처녀였는데 이름이 채 익숙해지기도 전에 선생님이 바뀌어 버리는 통에 나는 선생님에 대한 관심은 접기로 했다. 양재학원의 수업은 생각보다 쉬웠다. 이미 옷손질에 대한 자질을 스스로 자부했던 나는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잘했다. 숙제가 많을수록 더 많은 옷감이 필요했고 더 많은 손놀림과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부유한 집안에 공부에 취미도 없었던 내 단짝 친구는 매일같이 나에게 숙제를 부탁했다. 숙제를 해주면 온갖 아이스크림이며 팥빙수를 실컷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귀찮은 기색하나 없이 열심히 해주었고 내가 숙제를 하고 있는 동안 경희는 책상에 얼굴을 가만히 대고 숙제하는 나를 한참 쳐다보곤 했다. 성모마리아같이 선하고 참한 얼굴에 피부도 하얗고 키까지 컸던 경희는 단연 인기가 좋았다. 그래서인지 18살이 되자마자 사교적인 엄마의 덕으로 일찌감치 선을 보고는 연세대 출신의 아주아주 부잣집아들에게 시집을 갔다. 시집가는 친구를 보며 부럽기도 했지만 나는 나의 아이스크림 먹는 재미도, 끈끈했던 우리만의 시간도 끝난 것만 같아 슬프고 아쉬웠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6개월 수료 후 졸업을 했다. 본과를 올라갈까 실습을 할까 망설이다 원장선생님의 조언으로 직접 실습을 할 수 있는 지인의 양장점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내 인생 최초로 일을 하고 돈을 버는 직장생활의 경험은 참으로 신기하고 신나는 일이었다. 나는 내가 버는 돈치고는 많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월급을 받을 때면 집으로 돌아와서는 온 집안을 방방 뛰며 얼마나 좋아했는지, 나 자신이 그렇게 자랑스러웠던 적이 없는 것만 같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곧 서울에서 제일가는 멋진 양장사가 되어 주인집아줌마보다 더 근사한 양장점을 가지고 평생을 아름답고 우아하게 살아갈 줄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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