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상의 이 세상 이야기
매년 돌아오는 봄이 견딜 수 없이 괴롭기만 했던 시절이 있었다.
스무 살이 되었고, 발 한 번 디뎌본 적 없는 낯선 곳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된 후로 한 동안 봄만 되면 울적해지곤 했다.
생생하고 싱그러운 세상에 나 홀로 회색인 것 같았다.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이라는 뜻을 가진 “청춘(靑春)”이 나에게는 파란 우울로 가득한 날들이었던 것 같다. 당연히 이유를 알고 싶었다. 이유를 알면 고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때의 내게 선명한 욕구는 오로지 “나는 왜 우울한가.”를 이해하는 것뿐이었다. 고향에 있는 첫사랑을 잊지 못해서인가, 전공으로 선택한 심리학이 별로여서인가, 주변에 있는 인간들 죄다 별로여서인가, 이 동네 터가 별로여서인가….
매일 밤마다 불현 듯 떠오르는 생각의 뒤를 음침하게 쫓아다녔는데, 그 생각의 실체를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다.
생각의 생각의 생각의 생각…. 생각의 무한궤도 속에서 결국 길을 잃었고, 대신 자신에 대한 혐오를 얻었다.
나는 고향에 있는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내가,
대학 전공으로 심리학을 선택한 내가,
주변에 있는 인간들을 죄다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내가,
스스로 살 동네를 선택하고서는 터가 별로라는 대책 없는 변명이나 하는 내가 싫었다.
그때의 나를 요즘의 언어로 정리하면 이렇게 될 것 같다.
아, 나는 이렇게 자기혐오를 양분 삼아 아무 죄도 없는 봄이나 저주하는 못난 인간으로 사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절망하던 날들 역시 있었는데, 놀랍고도 희한하게 나는 아주 조금씩 달라졌다.
습관처럼 쫓던 생각의 뒤에 멈춰 서서 “아니, 그건 그냥 생각일 뿐이잖아.”를 중얼거리게 되었고,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게 아니라 지조 있는 사랑을 하는 거라고 농담을 하게 되었고,
심리학은 여전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궁금해졌고,
죄다 싫기만 했던 인간들은 ‘일부의 재수탱이’들로 바뀌었고,
사는 동네는 터가 별로이긴 하지만 물가가 싸다는 것으로 퉁 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른다. 그냥 시간이 준 선물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다만 우리가 “우울”이라고 말하는 증상을 겪는 사람들의 90%는 1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자연스럽게 좋아진다는 연구 결과를 봤을 때, 운이 좋게도 그 90%에 포함된 건지도 모르겠다.
10%는 “우울장애”가 되어 삶에 큰 지장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스쳐 지나가야할 우울이 지나가지 않고 너무 오래 머무르고 있는 것일 뿐.
그리고 나 역시 언제 10%에 포함될지 모를 일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마찬가지다.
스쳐 지나가지 않는 우울을 말로는 설득해 돌려보낼 수 없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생각이 만들어낸 가장 어두운 그림자는 아마도 우울일 텐데, 그러니 우울을 탓하지 말고 생각과 타협을 하는 게 효과적일 것이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추천하기도 하고 나 역시 자주 써서 효과를 본 방법은
거창할 필요는 당연히 없다. 미래의 다짐, 결의도 필요 없다.
그저 나를 끌어내리는 생각에게는 “먹금”을 하고, 나를 끌어올리는 활동을 채워보는 것이다.
이 활동 역시 대단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법에 저촉되지 않고, 타인의 삶을 곤란하게 하지 않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다.
당분간 나는 나뭇가지를 눈으로 쫓을 소소한 야망을 품고 있다. 연두빛 새싹들이 고개를 내미는 그 깜찍하고 경이로운 세계를 쫓아보려고 한다.
다음세상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