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연 이 공간에 몇 번째로 초대된 외부인인 걸까
아직 바람이 매서운 3월 말이었다. 추위를 피해 들어온 편의점 안쪽엔 따뜻하게 데워진 병음료들이 진열돼 있었다. "아무래도 두유보단 꿀물이 낫겠지?" 진열장 안에 있던 꿀홍삼 두 병을 꺼내 나눠 마셨다. 그 애는 나의 왼편에 앉아 내가 꿀물 마시는 모습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더니 과감하게 손을 뻗어 자기 손을 내 머리 쪽에 갖다 댔다. 처음엔 단순히 머리 겉면만 쓰다듬는 수준이었는데, 어느 순간 머리칼을 매만지더니, 볼 쪽으로 흘러내린 옆머리를 세심하게 정리해 내 왼쪽 귀에 꽂아주었다. "머리 귀에 꽂으니까 더 나은데." "그나저나 너 머릿결 진짜 좋다. 계속 만지고 싶어." 태어나서 머릿결 플러팅은 처음이었다. 당황스런 마음과 함께 두 달 전 스트레이트 펌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 사실 머릿결 좋아 보이는 거 다 페이큰데. 몇 주 전 수영을 다시 시작하며 머리카락 끝이 다 상해버렸다. 다이슨 에어랩으로 겨우 소생시켜 숨만 쉬는 상태였다. 에어랩 뒷광고 아닙니다...)
그 애는 내가 민망해질 정도로 칭찬 세례를 퍼부었다. 얼굴에서 눈이 차지하는 면적이 정말 큰 것 같다는 둥, 디즈니 캐릭터를 닮았다는 둥... 그 애가 정신없이 나를 향해 찬사를 보내는 동안 내 머릿속은 분주했다. 그 애의 의중을 파악해야 했다. 선수인 건지, 진솔한 고백인 건지. 약간의 호감만 있어도 자취방으로 사람을 초대해 차를 마시자고 하는 타입인지, 생각보다 진중한 사람인지. 나는 과연 이 아이의 자취방에 몇 번째로 초대된 외부인인 걸까? 그 애가 나에게 던지는 말들이 나만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습관적인 말들인지, 나는 필사적으로 그 패턴을 읽으려 애썼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여자는 본능적으로 남자를 만날 때 상대의 신뢰도를 가늠하려 든다고 한다. 자신의 안전과, 언젠가 맡게 될지도 모를 자녀 양육의 책임까지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의 나는 그 애와의 대화에서 아무것도 감지해낼 수가 없었다.
우리는 하얀색 반원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팔을 뻗어도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었다. 갑자기 그 애가 ‘내 머리카락을 다시 만지고 싶은데, 너무 멀리 앉아 있어 아쉽다’며 도발을 해왔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테이블 의자에 바퀴가 달려 있어 의자를 끌고 그 애 옆으로 가기만 하면 되었다. 서로가 지근거리에 있게 되자 그 애는 다시 자기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살살 빗어주었다. "너 진짜 슈렉에 나오는 고양이 같아." 눈이 계속 마주쳤다. 처음엔 멋쩍어서 피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보란 듯이 계속 응시했다. 걔도 눈을 피하지 않고, 나도 피하지 않는 그런 영겁과 같던 밀당의 시간들. 시치미를 뚝 떼고, 아무 말 없이 머그잔에 담긴 차만 마셨다. 전기포트의 물을 네 번이나 새로 끓였고, 아몬드는 열 알 넘게 먹었다. 나 원래 견과류 믹스 먹을 때도 아몬드 제일 안 좋아해서 맨 마지막까지 남겨 뒀다가 겨우 먹는 사람인데... 평생 먹을 아몬드를 걔네 집에서 다 먹은 것 같다.
대략 열두 번째 아몬드를 입에 넣고 오독오독 씹고 있던 중이었다. 순간 그 애가 양손으로 내 뒤통수를 감싸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내 얼굴을 자기 얼굴 앞으로 끌어당겼고 짧게 입을 맞췄다. 처음엔 입술이 잠시 맞닿는 정도였는데, 그다음엔 조심스럽게 포개는 느낌이었다.
걔네 집에서 나와 우리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나와 그 애의 관계에 대해 골몰했다. 외국 언니들이 말하는 'situationship' 상태와 굉장히 유사했다. 내가 '우리의 관계를 명확히 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자 그 애는 입을 싹 닫아버렸다. '아마 내가 너를 조금 좋아하는 것 같아...' 같은 수수께끼 같은 말속에 숨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일단은 만남과 연락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니 두고 보기로 했다. 그날은 월요일이었고, 우리는 수요일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어쨌든 상호 호감은 확인했으니 이제 끝장 볼 일만 남았다.
수요일 아침 8시 30분, 회사에 도착해 그 애에게 '굿모닝'이라고 카톡을 보냈다. 오후 3시 정도에 '굿모닝'이라는 답장이 왔다. 세 시면 굿모닝이 아니라 굿애프터눈이 맞는 거 아닌가? 답장이 거슬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어차피 우리는 그날 저녁에 만나기로 했었고, 곧 얼굴을 볼 것이므로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었다. "5시 좀 넘어서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애로부터 드디어 유의미한 카톡이 도착했다. 원래 7시 반에 보기로 했었는데, 앞 일정이 일찍 끝났나 보다. "응 그럼 6시 반에 보자. 먹고 싶은 거 있어?" "난 다 좋아~" 회사 근처에 있는 괜찮은 식당을 재빠르게 스캔해 세 군데 정도 추려 보냈다. 정신없이 업무를 쳐내는 와중이었지만 PC카톡을 켜놓고 그 애의 반응을 수시로 확인했다. 여섯 시가 다 되었는데 1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 회사에서 일이 갑자기 몰려서... 혹시 10분만 늦게 봐도 괜찮을까?" 이 카톡에 대한 답도 오지 않았다.
6시 25분이 다 되어서야 '출발했는데 좀 늦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몇 시에 도착해??" 답은 오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본래 약속 시간으로 정했던 6시 30분이 다 되었다. 마음이 부글부글하다가, 설마 큰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걱정이 먼저 됐다. 일단 회사 일을 마무리 짓고, 만나기로 한 식당 앞으로 부리나케 달려가보는데, 그 애 모습은 당연하게도 보이지 않는다. 이쯤 되니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해 보여 일단 집에 가있기로 한다. 급기야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화장실 청소를 시작한다. 락스를 뿌리고 바닥을 솔로 박박 문지르니 관성이 생겨 멈출 수가 없다. 까먹고 있었다... 대청소의 즐거움. 얼마나 지났을까, 뒷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에서 진동이 온다. 그 애에게서 온 전화다. 고무장갑을 벗고 손을 씻고 전화를 받으려고 하니 뚝 끊겼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후 7시 7분. 전화를 거니 들리는 목소리.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전화로 가족이랑 다투다가 통화가 생각보다 길어져서..."
뭐에 대해 다투었는지는 차치하고 (목소리를 들어 보니 큰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통화를 하는 도중에 늦어질 것 같다는 카톡 한 줄 보내기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원망스럽다. 편할 대로 편해진 동네 친구도 아니고, '나'를 만나러 오는 길이었으면서.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상대방 생각은 안 하나? 주변 사람들 만날 때 늘 이러나. 지금 어디냐고 물어보니 우리 회사 근처 지하철역이라고 한다. 도착을 하긴 했구나. 한 시간 넘게 멀리서 달려왔으니 일단 저녁은 같이 먹기로 한다.
역 앞 출구 벤치에 풀이 죽은 채 앉아있는 그 애를 발견했다. 얼굴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샘솟는데, 그 감정이 말투나 표정에서 실실 새어 나올까 봐 두렵다. 입술을 잘근 깨문다. "가족들이랑 싸우고 기분 메롱일 테니까 밥부터 먹을까?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나중에 할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백만 개면서 괜히 쿨한 척을 한다.
대문자 T인 나는 감정적 사과보다 오늘 사태에 대한 재발방지책을 듣고 싶다. 그런데 그 애는 "진짜 미안해. 너 잘못은 하나도 없고 다 내 잘못이야." 같은 쓸데없는 말만 되풀이한다. 다운되어 보이는 내 기분을 풀어주고 싶은지 "청바지 입으니까 너 다리 되게 길어 보인다" 같은 칭찬을 던지는데 추파처럼 들린다. 문제의 핵심을 똑바로 들여다보지 않고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려는 태도가 괘씸하다. 조용히 그 애 쪽으로 눈을 흘긴다. 엇 근데 뭔가 다르다. "머리 잘랐어?" "응, 여기 오기 직전에. 다섯 시쯤? 자른 게 더 낫지?" 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자른 건가? 흥. 미용실 간다는 얘기 한 마디 없었으면서! (... 서프라이즈였나?) 머리 자른 게 대수인가. 근데 예전보다 훤칠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콩깍지가 씌인 상태라 어쩔 수가 없다. 일상 대화를 몇 마디 나누고 나니 화도 조금 풀리는 것 같다.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간다. 아씨 나 왜 이렇게 나약하지?
이성적 사고를 관장하는 나의 좌뇌는 이 유독한(toxic)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고 경고 메시지를 보낸다. 이런 관계는 절대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너와의 약속을 중대하지 않게 여기는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옆에서 팔짱 끼고 있던 우뇌가 열심히 자기 합리화를 시작한다. "오늘이 정말 예외적인 날이었을 수 있잖아.", "저 사랑에 빠진 눈빛을 봐, 진짜일 거야.", "그래도 같이 밥 먹으니까 너무 좋잖아." 분명 좋긴 했다. 한 시간 넘게 식당에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시간차를 두고 하나씩 나오던 음식도 하나같이 전부 다 맛있었고 ("공깃밥이 없어서 아쉽다!"), 대화 주제도 끊이지 않았고, 식당의 음악 선곡도 좋았다.
밥을 한참 먹다가, 걔가 이런 얘길 꺼낸다. 자기는 예의 없는 사람이 싫다고. 살다 보면 예의 없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되지 않냐고 묻는다. Devil's advocate을 하고 싶어진 나는, 어릴 때부터 사방에 예의 없는 사람들로 가득한 환경에서 자라면 의도치 않게 본인도 예의 없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지 않냐고 받아친다. "그 사람 잘못이 아닐 수도 있어." 그러자 그 애는 '예의'와 '예절'은 다른 개념이라고 답한다. 예절은 교육의 영역이라 익히지 못할 수도 있지만 예의는 사람의 본성 같은 거라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어도 예의 있는 사람, 풍족하게 자랐어도 예의 밥 말아먹은 사람이 얼마나 많아."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나는 더욱 거세게 '예의가 없는 건 주변 환경 탓일 수 있으니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싣는다. 그 순간 나는 내 논리에 발이 걸려 넘어진다. 오늘 그 애가 너한테 한 행동을 생각해 봐. 이해가 돼? 사실 무척 실망했다. 나를 향한 기본적인 예의가 부재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애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 저런 습관을 갖게 되었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나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 밥을 다 먹고 나왔는데, 그 애가 이런저런 생각에 푹 빠져 심각해져 있는 내 얼굴을 보더니 "뽀뽀해도 돼?" 물었다. "되겠어?" 허탈함을 넘어선 실소가 터진다. 분명히 안 된다고 했는데, 신호등을 건너는 도중에 그 애는 내 볼에 뽀뽀를 쪽 한다. 정말 너는...
그 애와 깜깜해진 한강 공원을 거닐며 생각했다. 이렇게 호구의 연애를 시작하게 되는 걸까. 난 왜 처음부터 딱 잘라 끊어내지 못했을까? 산책하는 내내 마음이 복잡했다. 표정이 최대한 드러나지 않도록 얼굴 한쪽을 머리카락으로 가린 채 걸었다. "갑자기 왜 그래? 컨셉을 이상하게 잡았어!" 우리 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그 애의 제안을 뿌리치고 회사 근처 지하철역에서 대충 작별 인사를 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아까 그 애의 얼굴을 처음 마주했을 때, 그때 바로 얘기했어야 했다.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해 그 애가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로 전달하고, 확실한 대답을 들었어야 했는데. 밥 먹고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려다 망했다. 분위기에 젖어 구체적인 내용을 다 까먹었고, 이도 저도 아니게 됐다.
복잡한 마음으로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자기는 집에 잘 도착했다고, 오늘도 너무 즐거웠다는 내용의 카톡이 와 있었다. 답장을 어떻게 할까 10분 넘게 고민하다가... 답장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마지막 메시지를 꾹 눌러 하트만 하나 남긴다. 오늘 내가 느꼈던 널뛰는 감정을 너도 한 번 느껴보시지. 하트 속에 유치한 복수의 마음이 서려 있었다. 그러면서 우습게도 오늘 자고 일어났을 때 그 애로부터 '굿모닝'이라는 카톡이 와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