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ntasy

넌 그 사람을 좋아했던 게 아니라 환상 속 그 사람을 좋아했던 거야

by 흰동

바로 직전에 만났던 연인과 왜 헤어졌냐는 물음에 그 애는 이렇게 답했다. "막상 사귀고 나니 처음에 생각했던 것만큼 멋있는 사람이 아니더라." 만남을 지속하며 좋아하는 마음이 줄어들었고, 결국 상대에게 이별을 통보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넌 ‘그 사람’을 좋아했던 게 아니라, 네 머릿 속이 만들어낸 환상을 좋아했던 거구나." 그 애는 정곡을 찔렸다는 표정을 했다. 그 애가 몇 주간 나에게 했던 모든 플러팅, 칭찬, 스윗한 말들이 실은 나의 본질에 대한 것이 아니고, 그 애가 만들어낸 어떤 환상에 기반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불안해졌다. 직전의 연인은 두 달 남짓 만나고 헤어졌다고 하던데, 나를 향한 마음의 유통기한은 얼마나 되려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존감 높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나였지만, 자존심 상하게도 이 애 앞에선 수시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나를 향한 이 아이의 환상이 영원히 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혹은 내가 이 아이의 환상보다 훨씬 더 대단한 존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애와 난 소개팅 비스무레한 자리를 통해 처음 만났다. 만나기 전까지 큰 기대가 없었는데—분위기 좋은 토요일 저녁이 아닌, 벌건 평일 대낮에 만났다는 사실이 큰 기대가 없었음을 방증한다—실제로 만나보니 상대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는 나보다 먼저 식당에 도착해 앉아 있었고, 뒤늦게 문을 열고 들어온 나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양 볼에 은근한 보조개가 파이는 사람이었다. 음식을 주문하기도 전에, 테이블에 올려둔 그의 스마트폰이 내 폰과 똑같은 기종(아이폰 13 미니 용달블루) 임을 깨달은 나는 호들갑을 떨었다. “우리 폰이 아예 똑같아요!” "그러게요, 여자분이 이 스마트폰 쓰는 거 처음 봤어요." 공통점은 또 있었다. 둘 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특정 도시에 있었다. 또, 나도 그도 (비록 기종은 달랐지만) 습관처럼 이북리더기를 들고 다녔고, 요즘처럼 도파민을 자극하는 숏폼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 무용해 보이는 취미인 독서를 즐겼다. 이 모든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오늘의 만남에 특별한 서사를 부여하고 싶어졌다. 근 1년 넘게 마음을 줄 만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연애 포기를 선언한 상태였는데, 어쩌면 기대를 걸어봐도 좋을 사람이 나타난 것일지도 몰랐다. 와중에 떠오른 어떤 대화. 몇 주 전 일터에서 친한 기혼자 쇼호스트 님이 이런 얘기를 했다. '피디님, 우리처럼 말 많은 사람들은 소개팅 가서 최대한 말수를 줄여야 해요. 열 번 말하고 싶은 거 꾹 참고, 한 번만 해야 돼.'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날 소개팅의 흐름은 쇼호스트 님의 조언과 완벽히 반대로 가고 있었다. 대화의 지분이 온통 나에게 있었다. 코드가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기쁨과 환희에 젖어 나는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10년 전, 유럽에서 교환학생을 하던 시절 겪었던 충격적인 여행 에피소드들을 그 사람 앞에서 탈탈, 작은 빵조각 하나까지 모조리 털어놨고, 그 애가 나의 좌충우돌 모험담에 경탄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주인 앞에 죽은 쥐를 물어다 놓고 의기양양해져 있는 고양이가 따로 없었다. 나의 인생 이야기를 경청하던 그 애는 어느 순간 의미심장하게 이런 말을 남겼다. "OO씨는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만났던 사람들 같지가 않네요. 정말 달라요".


나는 내가 어느 정도 나르시시스트적인 면모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가 나의 특별함을 알아봐 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호감의 감정이 급속도로 커졌다. 그의 외모가 연예인 뺨치게 출중했다거나, 키가 멀대 같이 컸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인생의 가치관 같은 게 나와 굉장히 유사했다. "저는 가끔 일부러 말도 안 되게 원대한 목표를 세워요. 목표를 100% 달성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죠. 어려운 목표니까 대충 60% 정도만 이뤄야겠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져요. 늘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왔어요." "되게 신기하네요. 저도 그런데."


우리가 두 번째 만난 날은, 점차 봄기운이 완연해지던 3월 중순이었다. 미세먼지 지수는 나쁨이었지만, 드디어 찾아온 영상 10도 이상 기온에 세상 사람들 모두 들떠있었고 (바로 며칠 전까지 눈발이 흩날리는 날씨였다), 우리는 석촌호수와 올림픽공원을 쏘다니며 총합 2만 보를 걸었다. 나는 평소에 잘 입지도 않는 오프숄더 스웨터를 먼지 속에서 털어내 꺼내 입었고, 메종 마르지엘라 Lazy Sunday Morning 향수를 코트에 칙칙 뿌리고—나는 인공적인 향을 싫어해 평소엔 섬유유연제도 쓰지 않는다—여자력을 뽐냈다. 카카오맵 리뷰가 좋은 송리단길 부근 선술집에 가서—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요리는 엉망이었다—화이트 와인을 보틀째로 한 병 시켰다. 밤이 되자 날이 제법 쌀쌀해졌는데, 둘 중 아무도 이제 일어날까? 같은 마무리 멘트를 꺼내지 않았다. 올림픽공원 입구 근처 놀이터 미끄럼틀 위에서 그 애와 다리를 붙이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때까지 서로 손도 잡지 않았고, 포옹도 하지 않았다. 스킨십이랄 게 없었다. 석촌 호수를 돌다가 걔가 마시던 생수를 나도 한 입 마셨는데, 그마저도 최대한 입이 닿지 않도록 주의해 마셨더랬다. 그랬는데... 바로 옆에 밀착해 앉아 있으니 그 애의 빨라진 심장박동이 내 귀에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그 애가 어느 순간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너 입술이 되게 예쁘다'라고 속삭였다. 문득 생각했다. 오늘 얘랑 입을 맞추게 될까? 그 말을 들은 순간 눈을 슬그머니 감고 내 얼굴을 그 애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댔더라면 지금과는 조금 다른 결말을 맞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그날 그러지는 않았다.


마음이 간질간질한 상태에서 막차 시간 핑계를 대고 바로 헤어졌다. 9호선 올림픽공원 지하철역까지 같이 걸어갔다. 열차가 오기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는데 지하철 출구에서 서로 미적대다가 걔가 수줍게 내 어깨를 톡톡 두 번 치고선 "오늘 재밌었어."라고 말했다. 뭔가 잘 되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예감은 예감일 뿐이었다. 세 번째 만났을 때는 그 애가 뜬금없이 미국에서 온 사촌동생과 사촌동생 친구랑 같이 놀면 어떻겠냐고 만나기 몇 시간 전에 즉석으로 제안했다. "아니, 내가 싫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랬어?" "너라면 안 그럴 것 같았어." 우리 둘만의 시간이 외부인에 의해 침범된 것 같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나의 의사를 묻지 않고 약속을 맘대로 조정해버린 것도 무척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새로운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이제까지 그 어떤 연인—물론 그 애와 나는 아직 연인이 아니었다—과도 이런 종류의 만남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연인의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내 친구들은 나의 소개로 내 연인을 만나 본 적이 꽤 되었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나의 구 연인들은 나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나의 연인들은 왜 한 번도 나를 타인에게 소개하지 않았나? 자랑스럽게 전시하지 않았나? 누군가의 트로피 여친이 되고 싶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원치도 않는데 스펙트럼의 극단에 서서 이 부문의 대표자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왜 난 한 번도 나를 본인의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어 안달이 난 연인을 만나보지 못했을까? 어쩌면 이건 내 마음속에 자리하는 'Am I not good enough?'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불안감이기도 했다.


그런데 얘가 본인의 사촌 동생에게 날 소개해주고 싶다는 건... 날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이 아닐까? 돌이켜 보면 별 의미 없는 즉흥적 제안이었던 것 같으나, 아무튼 그날 나는 결국 기분 좋은 마음으로 만남을 수락했고, 심지어는 미국에서 온 사촌동생과 친구를 위해 작은 선물—올리브영에서 산 마스크팩, 오설록 티백 한 상자, 새로 살구 소주 한 병—을 준비했다. 나는 한국을 처음 방문하는 외국인 친구가 있으면 언제나 ‘웰컴 팩’을 준비해 깜짝 선물하곤 했다.


뉴욕에서 온 사촌 동생과 그 친구(알고 보니 그냥 친구가 아니라 사촌 동생의 연인이었다)는 나의 출현이 그다지 놀랍지 않은 모양이었다. 알고 보니 사촌 동생은 그 애가 옛날에 만나던 여자 친구도 한두 번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Honestly, I barely know this guy. This is only the third time we’ve hung out. I’m kinda curious how he described me to you.(솔직히 난 얘가 어떤 사람인지도 아직 잘 몰라. 우리 겨우 세 번 만났어. 얘가 나에 대해서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긴 해.)” ”Well, it’s totally normal in New York to introduce someone you’re seeing to friends or even family. (뉴욕에서는 친구나 가족들한테 만나는 사람 소개하는 거 완전 흔한 일이야.)”


...하지만 여긴 서울이라고!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식 연애를 해온 내게 왜 뉴욕 법을 들이미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넷(사촌동생, 사촌동생 남자친구, 그 애와 나)은 서순라길을 조금 거닐다가, 어느 느낌 좋은 바를 하나 발견해 야외 벤치에 자리를 잡았고, 치즈와 크래커를 곁들인 와인을 마셨다. 돌아오는 길에 인생네컷 부스를 발견해 같이 사진도 찍었다. 그 애는 사진을 찍다가 은근슬쩍 내 어깨에 팔을 올렸다. 짜식...


사촌동생 커플이 피곤하다며 일찍 숙소에 돌아간 뒤에도 우리는 종로 일대를 계속 거닐었다. 기온이 훅 떨어졌음을 느꼈다.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 따땃하게 데워진 꿀홍차를 마셨지만 여전히 너무 추웠다. 근처에 밤늦게까지 영업하는 카페가 유독 없었다. 그 애가 불쑥, 자기 집에 가서 차를 마시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여기서 버스 타면 집까지 한 번에 간다며. 우리는 일전에 차에 대한 대화를 몇 번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카페인에 취약한 편이라 커피를 마셔야 하면 늘 디카페인을 시켜. 커피보단 차 마시는 걸 더 좋아해." 그 앤 내가 차 마시는 걸 좋아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도 모조리 다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핀란드에 사는 펜팔 친구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는데, 그때 경험한 이른 아침의 티타임, 차 한 잔이 선사하는 여유가 무척 마음에 들었노라고 첫 번째인가 두 번째 만남 때 고백했다. 그 모든 걸 기억하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암튼 나는 그렇게 차를 마시자는 그의 꼬드김에 폭싹 넘어가서, 심야 버스를 타고 그 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그 애의 집이 있는) 혜화로 향했다.


유럽에서의 생활이 나에게 남긴 유산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오슬로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는 특정 조명색과 조도에 대한 선호를 분명히 갖게 되었다. 한국에서 많이 쓰이는, 창백하고 푸르뎅뎅한 주광색 조명을 점점 싫어하게 됐다. 따뜻한 온도의 간접등이 은은하게 켜져 있을 때 비로소 안정감을 느꼈다. 그 애의 집에 들어섰을 때 참 신기했던 건, 이곳은 분명 한국의 평범한 자취방인데, 헬싱키와 코펜하겐에서 카우치서핑을 했을 때 호스트들의 집에서 받은 인상을 비슷하게 받은 것이다. (... 아무래도 그 애 집을 너무 올려치고 있다). 형광등은 모두 꺼져 있었고, 탁상 램프에서 나온 노오란 빛이 거실 공간을 가득 채웠다.

램프 옆엔 메종 마르지엘라 향초가 켜져 있었다. 그 애는 테이블 옆에 삐뚜름하게 서서 요가원에서나 볼 법한 인센스 스틱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전기포트의 물이 끓기 시작했고, 우리는 걔네 집에 있던 (나는 이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비싼 수제차 티백을 티포트에 우려 마셨다. 입이 허전해서 생 아몬드를 안주 삼아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 걔가 아몬드를 먹는 나를 보더니 강아지 같다고 했다. 그 애 집 벽엔 뉴욕 MoMA에서 봤던 그림들이 몇 점 붙어져 있었다. (당연히 진품은 아니고 컬러 프린터기로 뽑은 듯한 조악한 종이 포스터였다) 미국에 있는 걔의 친척누나가 직접 공방에서 만들었다는 머그에 차를 담아 마셨다. 친구가 MoMA에서 사서 선물로 줬다는 또 다른 머그컵은 몬드리안 굿즈인 것 같았는데, 따뜻한 액체를 부으면 머그 표면에 빨강, 파랑, 노란색의 직사각형들이 스르륵 피어올랐다.


걔가 사운드바로 은은하게 어떤 노래를 틀어놨는데, 그 노래 선곡마저도 마음에 쏙 들었던 것 같다. 큰일이 난 것이다. 이 사람에게 단단히 빠져들었다. 솔직히 나는 이런 취향을 가진 남성을 근래 들어... 아니 평생 동안 (... 당시엔 환상에 푹 젖어있었던 상태라 이런 수식어도 과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 애가 일전에 전 연인과 헤어진 이유에 대해 털어놓았을 때 난 내가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환상에 푹 빠져버린 쪽은 어쩌면 걔가 아니라 나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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