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날은 꾸물꾸물 흐렸다. 사방에 가득한 비구름은 금방이라도 한바탕 비를 퍼부을 듯 기세등등했다. 하지만 비가 오는 정도론 계속되는 폭염을 막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지상은 간밤에 내린 비가 마르면서 끈적끈적한 더위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간밤에 술까지 마시고 잠들었던 박씨가 일찌감치 깬 것은 더위 때문이 아니었다.
“제길, 요새 계속 저 지랄이야.”
신문을 가지러 나오면서 그는 조그맣게 욕을 퍼부었다. 그의 집 앞에 뚫려있는 도로에서 탱크와 장갑차들이 기세 좋게 달려가고 있었다. 저 육중한 캐터필러 소리는 귀를 간질이는 정도가 아니라 베개를 울리게 할 정도라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축축해진 신문을 가져온 그는 냉수 한 잔을 마신 후 신문을 펼쳤다. 1면의 헤드라인은 ‘대통령 각하, 강릉 사태 해결을 위한 5자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이었다. 그 아래엔 대통령이 선글라스를 쓴 채 공항에서 손을 흔드는 사진이 큼직하게 박혀 있었다. 그간 장관급 회담에선 별 성과가 없었지만, 각하께서 몸소 행차하시는 만큼 이번엔 분명 성과가 있을 것이다. 수 년 전 빨갱이들에 의해 작동이상을 일으킨 후 지금까지 방사능을 사방에 내뿜고 있는 고리 원전, 그리고 이를 둘러싼 ‘놈들’을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박씨는 신문을 내려놓고 티비를 켰다. 저 부대들이 훈련 상황이 아니란 건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향이 달랐다. 저들이 가는 쪽은 북쪽이 아니라 남쪽이었다. 지금도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는 저 대병력은 과연 어디로 가는 걸까? 다행히 그 해답은 긴장한 얼굴의 아나운서가 바로 알려주었다.
“긴급속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북한이 대규모 특수부대를 미주시에 파견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현재 군 병력이 진압을 위해 이동 중입니다. 이것은 훈련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오니 도로에 계신 운전자 분들께서는 당황하지 마시고 협조해 주시길 바랍니다.”
미주시라면 요새 각하에게 반항하는 움직임이 잦았던 곳이었다. 설마설마 했지만 역시 이놈들의 뒤에는 빨갱이 새끼들이 움직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귀신같이 뒤통수를 치는 건 역시 수백, 수천 년간 내려온 이들의 지역적 특성일 터였다.
‘놈들’과의 전쟁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사는 박씨였다. ‘놈들’이 빨갱이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정부에 의해 밝혀진 터. 그 뒤로 박씨는 빨갱이와 ‘놈들’의 뉴스만 나오면 술을 댓 병씩 마셔야 속이 진정되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방 구석에 뒹굴던 소주 한 병을 따 물처럼 마시며 몇 번이고 소리쳤다.
“가서 다 잡아죽여 버려야 해! 빨갱이고, 빨갱이에 찬성하는 놈들이고,
좀비들이고 간에!”
2
“단언컨대 장갑차는 가장 거지 같은 교통수단이야.”
장갑차에 머리를 몇 번이나 찧은 정소위가 이를 갈며 말했다. 184cm의 장신인 그는 장갑차 안에 구겨 타기엔 지나치게 컸다. 임관하고 고작 세 번 탑승해 본 장갑차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168cm의 단신이라 장갑차 구석에 아담하게 앉아 있던 최이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연한 말씀이시지 말입니다. 두돈반(2.5톤 트럭의 애칭)에 타면 그나마 쾌적하게 갈 수 있는데 말입니다.”
최이병은 정소위가 무슨 말만 하면 열심히 반응했다. 그 모습은 정소위의 시선으로도 ‘알랑거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그게 싫은 건 아니었다. 짬이 차지 않은 다이아 한 개는 병사에게도, 부사관에게도 미묘한 존재니까. 정소위는 그런 생각을 하며 최이병에게 해줄 대답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때 구석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끄러, 임마. 그래도 지금 가는 곳은 장갑차에 타는 게 백 배는 나아. 어디서 불만질이야, 짬 찌끄러기가.”
무언가를 적던 김병장이 최이병을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병장의 서슬 퍼런 위엄은 이병의 입을 닥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그 말에는 정소위를 움찔 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었다.
“야, 너 지금 한 말 어째 거슬린다? 나보고 한 말 아냐, 이거?”
정소위는 애써 웃으며 김병장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김병장이 고개를 돌려 정소위를 바라보았다. 핏발 선 눈은 분명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정소위가 발끈하기 직전에 그 시선은 바닥으로 떨구어졌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 짬 찌끄러기가 기어오르려는 것 같아서 한마디 한 것 뿐입니다.”
또 짬 찌끄러기란다. 정소위의 기분이 더욱 더러워졌다. 사관학교에서 속성으로 졸업하고 임관한 터라 정소위는 김병장보다 나이가 적었다. 게다가 김병장은 부대에서 전역을 포기하고 하사관 지원을 하라고 애원할 만큼의 인재였다. 그를 길들여야 소대원들을 잘 다독일 수 있는데, 정작 김병장은 정소위를 소 닭 보듯 했다. 그러면서 그나마 정소위에게 호의적인 최이병을 보란 듯이 갈궈대니 정소위의 속이 편할 리 없었다.
속이 답답해지자 그는 바람을 쐬고 싶어졌다. 장갑차 안은 찜통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장갑차가 움직이는 게 일반적 목적의 이동이었다면 그는 당장 윗뚜껑을 열고 바람을 맞으며 선탑을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화학전이 의심된다는 상부 지시로 선탑은 물론이고 창을 여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아직 작전구역에서 한참 떨어진 곳인데.
“야, 잠깐 창문 좀 열어.”
정소위가 창가의 하상병에게 턱짓을 했다. 그러자 하상병이 화들짝 놀랐다.
“예? 하지만 MOPP 경계령이 내렸다고……”
‘잘 못 들었습니다’도 아니고 ‘예?’다. 정소위는 다시 배알이 뒤틀렸다. 하지만 이런 데서 화내 봤자 자기가 속 좁은 놈이란 걸 광고하는 꼴이란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말했다.
“괜찮으니까 열어. 애초에 집결지도 MOPP 안전구역이야. 아직 도착도 안 했는데 뭘 겁먹고 그래? 바람 좀 쐬면서 가야 좀 살 것 같네.”
하상병은 창문 손잡이를 잡은 채 머뭇거리다 김병장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김병장은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 다시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내키지 않는 티를 팍팍 내면서 그는 손잡이를 돌려 작은 창을 열었다. 그러자 장갑차 캐터필러 돌아가는 시끄러운 소리가 실내를 가득 채웠다. 귀가 멍멍해져 옆사람과 이야기하기도 힘들 정도였지만, 정소위는 그저 좋다고 창가에 달라붙었다.
“그래, 이래야 좀 살 만하지. 너네 답답하지도 않냐? 진짜 빨갱이들하고 전쟁 나면 이 안에서 어떻게 버텨야 할까 몰라.”
병사들에 비해 긴 그의 머리카락이 갈대처럼 흩날렸다. 좀 편해졌는지 정소위는 창가에 턱 기대고 앉더니 유행가를 흥얼거렸다. 총은 저만치에 던져놓은 채였다. 그 모습을 본 김병장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지금 가는 데가 전쟁터야, 이 꼴통아.”
그의 목소리는 캐터필러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정소위가 통솔하는 2소대가 도착한 시간은 11시 무렵이었다. 거대한 개활지에는 수많은 탱크와 장갑차, 그보다 훨씬 많은 군용 트럭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한쪽에선 식사를 추진하느라 시끌시끌했고, 또 한편에선 신형 보급품을 분배하고 있었다. 정소위는 김병장에게 물품 분배를 지시한 뒤 중앙의 막사로 향했다. 막사엔 이미 수많은 다이아와 무궁화들이 지도를 펼쳐 놓고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제야 실전 분위기가 제대로 느껴져 정소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충성! 소위 정세환, 이동 마쳤습니다.”
정소위가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던 중대장에게 신고했다. 하지만 중대장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파리 쫓듯 손을 내저었다. 분위기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기에 그는 얼른 막사 밖으로 나왔다. 소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 전투식량과 신형 헬멧을 사람 수대로 받아온 게 눈에 들어왔다. 주섬주섬 초콜릿이 있는 전투식량을 골라내자 최이병이 얼른 뜨거운 물을 부어 주었다.
“이제 이걸 며칠이나 먹어야 하는구나. 전투식량은 한 끼만 먹으면 괜찮은데 여러 끼는 금방 질리니...... 야, 누가 고추장 같은 거 안 가져왔어?”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최이병이 선임들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씩씩하게 장갑차로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향해 하상병은 눈을 부라렸다. 원래 자기들끼리 먹으려고 들고 왔는데, 정소위 성격으로 보면 중앙막사의 높으신 양반들에게 알랑거리느라 고추장을 통째로 갖다바칠지도 모를 일이다.
최이병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사이 정소위는 눈앞의 헬멧을 집어들고 손가락으로 빙빙 돌렸다.
“참 미국이 대단한 것 같아. 그렇지 않냐? 게임에나 나올 것 같은 이런 헬멧을 만들 기술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니 말이야.”
그의 손에 들려있는 하얀 헬멧은 하이바와 달리 머리 전체를 덮는 식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오토바이 헬멧과 비슷했다. 하지만 여기엔 미국 기술의 정수가 담겨 있었다.
우선 헬멧에는 방독면을 능가하는 필터가 내장되어 있어 화학 공격과 바이러스 침투 등을 막을 수 있었다. 즉 이걸 쓰면 좀비 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몇 년 전 두 번에 걸친 좀비 사태가 한반도에 발생했을 때 이런 물건이 있었다면 피해를 상당히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좀비에게 물려서 감염된 사례가 훨씬 많지만, 호흡기에 의한 감염을 배제할 수 없으니 이런 물건은 아주 유용했다.
게다가 이 헬멧의 기능은 하나 더 있었다. 헬멧을 쓰면 시야창에 중앙의 명령이나 작전상황 등이 실시간으로 비쳐졌다. 예전에 개발되었던 안경 형태의 컴퓨터가 헬멧에 재현된 것이다. 정소위도 이 헬멧에 대해선 얘기만 들었을 뿐 직접 보기는 처음이라, 잠시 후 착용해 봐야 기능을 확실히 파악할 듯했다.
하상병은 헬멧을 만지작거리다 문득 생각난 듯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하이바랑 달리 새하얗네요. 이러면 눈에 잘 띌 것 같은데, 무슨 의도라도 있는 걸까요?”
그러자 헬멧을 살펴보던 김병장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딱 보면 휴지 색이지? 휴지는 줄 테니 니들 똥은 니네가 치워라, 이 말이겠지.”
꽤 적절한 비유라 모두가 풋! 하고 웃었다. 한반도에서 좀비 사태가 난 후 세계는 한국과의 접촉을 꺼렸고, 여기엔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한미군은 첫 번째 좀비 사태에선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두 번째 좀비 사태가 일어나자마자 각국 대사관 직원들을 보호해 한반도 옆에 대기하고 있던 항공모함으로 철수했다. 미군이 이렇게 좀비의 위험성을 온몸으로 보여준 터라, 다른 나라에서도 한반도를 직접 도우려는 움직임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처럼 멀찍이서 장비와 물자를 지원해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할 정도였다.
“씨발, 천하의 미군도 겁먹은 놈들을 우리가 없애러 가는 거네요.”
“벌써 두 번이나 한 일인데, 세 번은 못하리? 겁먹을 거 없어. 저기 정소위님이 다 알아서 해주실 거야. 그렇죠?”
김병장이 웃지도 않고 농담을 던졌다. 정소위는 잠시 당황했다가 곧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 그래. 그러니 너희 모두 내 지시에 잘 따라야지. 알았지?”
“네!”
최이병의 목소리에 묻혀 하상병과 김병장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헬멧을 내려놓고 전투식량을 기계적으로 씹으며 김병장은 ‘두 번이나 한 일’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우선 첫 번째 좀비 사태는 일본을 거쳐 귀순한 탈북자들이 날뛰며 일어난 일이었다. 이들을 진압하러 간 경찰이 모조리 이들에게 물려 이들과 같은 존재가 되었을 때, 언론은 신속하게 이들을 ‘좀비’로 불렀다. 총을 아무리 맞아도 죽지 않고, 인간보다 신체 능력이 우월해진 데다, 주위의 사람을 닥치는 대로 좀비화시키니 진압하는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나마 머리를 날리면 죽일 수 있다는 약점이 있긴 했지만(아니, 이걸 굳이 ‘약점’으로 불러야 하나?), 짐승처럼 달려오는 그들의 머리를 정조준해 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덕분에 천 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낸 끝에야 사태는 간신히 수습되었다. 나라 전체의 무능함을 보여준 이 사건 때문에 각하는 구국의 결단으로 혁명을 준비했고, 혁명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절대 다수의 국민은 각하를 열렬히 지지했고, 일부 불평세력들은 북한과 연계해 나라를 전복하기 위해 지하에서 암약했다.
1년도 되지 않아 두 번째 좀비 사태가 터졌다. 이번엔 남한 동북쪽에 있는 고영시에서였다. 이곳에는 노후화된 원자력발전소가 밀집되어 있었는데, 이를 마비시키기 위해 북한이 간첩을 파견했다는 게 정부의 공식 발표였다. 간첩들은 원자력 발전소의 기능을 정지시켜 이곳을 과거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후쿠시마 같은 곳으로 만들려 했다. 그리고 이걸로도 모자라 자기들이 가져온 좀비 바이러스를 고영시에 퍼뜨렸다. 그 결과 고영시 주민들이 집단으로 좀비화되어 사방에 퍼졌다. 직전에 사태를 예견한 군은 고영시를 봉쇄하려 했지만, 군의 포위망이 곳곳에서 뚫리며 사태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사태가 워낙 심각해 정부는 한강 다리 일부를 폭파하고 몇몇 다리를 집중적으로 방어하기로 했지만, 정작 좀비들이 한밤중에 한강을 헤엄쳐 건너오면서 방어선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때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서울은 아직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에 각하는 부득이하게 대전으로 천도해야 했다.
다행히 이 혼란을 틈타 북한이 쳐들어오는 일만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그들이 양심에 눈을 떴다든가 한 게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도 좀비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전쟁준비에 골몰해 온 북한도 괴물들과의 전쟁에선 영 신통치 않은 모양을 보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최초 발병자의 수가 워낙 많았다고 하니, 초기 대응에 많은 어려움을 겪은 모양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오지 탄광 일대는 최초 발병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북한 군부는 이곳을 군의 중심기지로 삼았다고 한다. 평양을 모루로 삼아 방어하고 아오지 탄광에 집결한 군대가 사방의 좀비를 소탕한다는 작전은 당연히 주민의 엄청난 희생을 강요했다. 게다가 한국과 중국에선 전염의 우려 때문에 이들의 탈북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주민들은 아예 무기를 들고 좀비와 군부 모두에 맞서는 실정이었다. 지옥이 바로 머리 위에 펼쳐져 있다는 건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런 사태를 불러일으킨 대가라 생각하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결말이었다.
그런데 이놈들은! 자기네가 불리한 사이 남한에서 쳐들어오는 게 겁이라도 났는지, 특수부대를 미주시에 파견해 세 번째 좀비사태를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고영시에 비해 전략적으로 별 가치가 없는 미주시를 습격한 것은 역시 후방 교란이 목적인 걸까,아니면 높은 자들만 아는 고도의 전술 중 일부인 걸까? 김병장을 비롯한 누구도 대략적인 작전 의도만 들었을 뿐, 구체적인 지시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어쨌든 하나만 기억하고 있으면 된다.
북한의 목적이 무엇이든, 자신은 군인으로서 조국을, 부모를,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야 한다.
멀리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김병장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점심 식사가 끝날 때쯤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비가 온다고 작전이 중지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병사 전원은 판초우의를 뒤집어쓰고 헬멧까지 착용한 후 공터에 정렬했다. 다들 우려했던 MOPP 4단계 같은 건 발동되지 않았기에, 무거운 방호복을 입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한 개 연대가 실전에 투입되는 건 과거 좀비 사태 이후 처음이었기에 병사들 모두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연대장님 올라오십니다. 부대 차렷!”
구령에 맞춰 모두 일사불란하게 차렷 자세를 취하자 연대장이 걸어와 급조한 발판 위에 올라갔다. 번쩍거리는 군화에 진흙이라도 튈까봐 발판 아래에 방수포를 미리 깔아둔 게 보였다. 연대장과 부관들도 헬멧을 착용하고 있었고, 그래서 우산은 따로 쓰지 않았다.
“연대장님께 경례!”
“충! 성!”
헬멧을 쓰고 경례를 하는 건 병사들에게 처음 있는 경험이었다. 그리 답답하진 않았지만 음성이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헬멧 안에서 울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공터에 울려퍼진 이들의 목소리는 인원에 비해 그리 크지 않았다.
“쉬어. 그리고 스위치 켜라고 해.”
연대장이 딱딱한 표정으로 지시했다. 그러자 부관이 막사를 흘끔 본 후 복창했다.
“쉬어! 스위치 켜!”
스위치? 모두는 당황했다. 오면서 헬멧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스위치라고 부를 만한 돌기는 헬멧에 달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자기 헬멧이 불량품이거나 자신이 고문관이란 두 가지 불쾌한 결론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필요는 없었다.
헬멧의 ‘스위치’는 저절로 켜졌다.
“……어…어어어?”
헬멧 안, 시야에 비치는 덮개 부분이 마치 모니터처럼 변했다. 눈앞에 지시사항이 주르륵 나오고, 시야에 비친 동료들 각각의 정보가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뭔가 생각보다 대단한 게 나올 거란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SF영화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었다. 과거의 영화 중 슈트를 입고 날아다니는 히어로 영화가 있었는데, 그 주인공이 슈트를 조종할 때의 장면 같았다.
“이야, 이거 쩌는데!”
병사들 모두 젊은 연령대다 보니 헬멧의 기능에 금세 적응되었다. 사실 본인이 뭔가를 복잡하게 조종할 것도 없었다. 그냥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기만 하면 정보는 끊임없이 갱신되었다. 군번, 이름, 나이, 계급, 소속부대……
김병장은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헬멧의 기능이 작동된 순간부터 바깥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 정도의 헬멧이라면 오히려 더욱 잘 들려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생생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헬멧에 대해 지금부터 설명해 주겠다.”
연대장의 목소리는 김병장뿐 아니라 연대원 전원에게 전해졌다. 전원은 소란을 멈추고 다시 꼿꼿하게 섰다.
“이미 들은 사람도 있겠지만, 이 헬멧은 미군이 우리에게 양도한 물품이다. 좀비는 한번 발병하면 치유할 수 없다는 게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발병의 징조가 없어 발병 직전까지 당사자를 포함한 누구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미군은 이런 사실에 착안해 좀비 바이러스 보균자를 가려내는 기술을 개발해 이 헬멧에 적용했다고 한다.”
‘그런 기술이 있었어?’란 웅성거림이 헬멧을 타고 들려왔다.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니 연대원 전원이 아니라 2소대원의 목소리만 들렸다. 아무래도 헬멧의 통신기능은 자신의 소속 소대와 상급자들로 엮인 듯했다. 외부로부터의 소리를 완전히 차단하고 작전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 주려는 게 제작자의 의도인 듯했다.
연대장은 ‘조용히!’라고 호통친 후 이어서 말했다.
“헬멧에는 웹캠과 무전 기능, 제독 기능 등이 내장되어 있다. 그러니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은 낱낱이 우리에게 전달되니, 문제가 생길 시에는 바로 보고하면 된다. 설정은 모두 외부에서 관리되니 여러분은 헬멧을 쓰고만 있으면 된다.
그럼 이제 작전을 설명하겠다. 미주시에서 아직까지 좀비화된 인원은 소수라는 게 정보부의 판단이다. 하지만 북한 공작원들은 바이러스를 대거 살포해 감염자의 수를 지속적으로 늘리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여러분이 쓰고 있는 헬멧은 본 작전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다. 감염자, 보균자로 인식되는 자는 가차없이 사살하는 게 바로 여러분의 임무다. 반복한다. 감염자, 보균자로 인식되면 즉각 사살하라. 사사로운 정에 끌려 작전을 망친다면 내가 몸소 그 자를 즉결처분할 것이다. 그리고 헬멧을 쓰고 있어야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걸 막을 수 있는 만큼, 헬멧을 벗는 자도 감염자에 준하는 것으로 알고 즉결처분하겠다. 알았나?”
“네!!!”
일단 반사적으로 대답을 했지만 김병장은 속이 뒤틀리는 걸 느꼈다. 간첩이라면 문제 없이 사살할 수 있겠지만, 민간인은 감염자든 보균자든 간에 뒤끝이 찝찝할 것이다. 뭐라고 한 마디 투덜대고 싶었지만, 곧 그 말이 어느 선까지 전해질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다른 소대원들도 침묵을 지키는 걸 보니 김병장과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간부가 실시간으로 모든 소리를 듣고 있는데 누가 허튼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좋다. 여러분은 자랑스런 대한의 건아들이다. 나는 여러분을 믿고, 이 작전이 승리로 끝나길 믿어 의심치 않겠다. 그럼 해산!”
“해산!”
연대장이 내려가자 병사들은 일제히 작전 위치로 향했다. 정소위는 2소대원을 이끌고 장갑차에 들어갔다. 좀비 사태 전에는 한 소대에 열 명이 넘었던 때도 있었다곤 하지만, 전체적인 인구가 줄어든 요즘엔 4~6명 정도가 평균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실전에 투입될 때는 역시 소대원이 많을수록 좋겠다는 생각이 정소위에게 문득 일었다.
장갑차 해치를 닫고 착석하자 정소위에게 중대장의 명령이 전해졌다. 늘 발음이 새는 중대장이었기에, 문자 메시지 형식으로 보이는 게 매우 좋았다. 우상단에 비친 명령에는 바로 진군을 시작하겠다는 내용과 장갑차 출발 순서 등이 자세히 나와 있었다. 이를 그대로 조종수와 소대원들에게 전달하며, 정소위는 비로소 모든 불안에서 해소되는 걸 느꼈다. 자신이 판단할 필요 없이, 모든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달 받는 상부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점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는 머리를 비우고 오직 주어진 명령에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연대가 드디어 진군을 개시했다. 모두가 차량에 탑승하고 있어 대지엔 굉음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평소라면 귀가 멍멍할 만큼의 그 소리들은 헬멧 안까지 파고들지 못하고 허공에서 서로 부딪쳐 흩어질 뿐이었다.
사전 정찰을 위해 트럭을 타고 전진하던 정찰대가 첫 사냥감과 조우한 것은 5시 18분 경이었다.
그 대상은 도시 외곽의 실개천에서 첨벙거리며 더위를 식히던 천진한 아이들이었다.
“감염자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들은 총을 들었다. 아이들의 머리 위에는 ‘대상 확인. 즉각 구축.’이란 메시지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모든 병사에게 스코프가 선지급된 상태라 이 거리에서도 언제든 저격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들은 선뜻 방아쇠에 힘을 주지 못했다.
-즉각 사살
-즉각 사살
-즉각 사살
-즉각 사살
-즉각 사살
화면 우상단에는 계속해서 무미건조한 명령들이 떠올랐다. 이미 이들은 조준을 마친 상태였다. 그래도 여전히 방아쇠를 당기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한 아이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인식되었다!”
여자아이 하나가 손에 무언가를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런 목표물의 변화에 군인들은 당황했다. 그리고 목표물이 이쪽을 향해 천천히, 그러다 점차 빠르게 다가오자 그들의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소대장이 마침내 절규했다.
“쏴!”
탕! 소대장이 쏜 총알이 여자아이의 목을 꿰뚫었다. 뛰어오던 여자아이가 그 충격에 뒤로 넘어졌다. 머리가 아니라 목을 맞아서 그녀는 즉사하지 않고 몸을 꿈틀거렸다. 이를 본 소대원들은 비명을 지르며 그녀에게 총을 난사했다. 어린 육체는 열 발도 넘는 총알을 맞고 산산히 부서졌다.
아이들이 놀라 물에서 뛰쳐나왔다. 그들은 도시를 향해 달음질쳤다. 소대장이 손으로 그들을 가리키며 외쳤다.
“쏴! 저 놈들을 놓치면 우리가 처벌받아!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어서 쏴!”
“으아아아아아아아!!!”
더 이상 조준 사격은 없었다. 과거 좀비 사태에 참전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이들은 첫 실전을 겪는 초보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여섯 명이 3점사에 놓고 갈겨대는 것만으로도 네 명의 아이를 육편으로 만들기엔 충분했다.
“보고! 보고! 지금 막 다섯 마리를 제거했다!”
“장애물은 있는가?”
“아직까진 없다!”
“좋아, 계속 전진하라! 후발대가 바로 뒤따라가겠다!”
어서 후발대가 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자신이든, 부하든. 헬멧 안에서 부하들의 거친 숨소리가, 낮은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작전에 방해가 되는, 나아가 자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들을 갉아먹는 요소들을 날려버리기 위해 소대장은 있는 힘껏 외쳤다.
“전진! 전진!”
“넵!!”
참상을 눈앞에서 본 운전병이 뭔가에 홀린 듯 페달을 격하게 밟았다. 트럭의 이동 경로에는 최초로 사살한 소녀의 시체가 있었다. 그렇지만 차의 진로는 바뀌지 않았다.
으직! 간신히 남아 있던 사체는 이번에야말로 산산이 조각났다.
작은 손에 들려 있던 꽃잎들도 갈기갈기 찢겨져 흩날렸다.
헬멧을 얻었으니 바이러스 걱정 없이 선탑해도 될 텐데, 정소위는 아까까지와 달리 몸을 사렸다.
“야, 헬멧을 쓰고 나니 어째 눈앞이 좀 흐려졌네? 이거 불량인가?”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비비적거리는 그를 모두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들어가는 곳이 전장이니, 선탑하면 표적이 될 거라 겁내고 있다는 게 빤히 보였다. 하지만 이제부터 선탑은 필수였다. 결국 정소위 다음으로 짬이 높은 김병장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선탑해야 했다.
하지만 김병장은 도시에 들어서자마자 정소위에게 외쳤다.
“제기랄! 선탑 바꿔요!”
“왜… 왜?”
“시발, 나와서 한번 직접 봐요!”
김병장이 아예 내려와버려서 정소위는 별 수 없이 주춤주춤 올라갔다. 김병장은 숨을 몰아쉬며 얼굴을 손으로 감싸려 했지만, 헬멧에 막히자 다시 욕을 퍼부어댔다.
“병장님, 왜 그러십니까?”
하상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김병장이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모, 모두 올라와! 명령이다! 당장 올라와!”
“굳이 올라가지 않아도 창문 열면 되지 않습니까!”
김병장이 짜증난다는 듯 대꾸하며 창문을 열어제꼈다. 바깥이 궁금해진 하상병과 최이병은 무서운 줄 모르고 창 밖으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비명을 질렀다.
“뭐야, 이 동네! 감염자 천국이잖아!”
“감염자가 아닌 사람이 없지 말입니다!”
그들의 헬멧에 떠오른 건 수도 없는 감염자 표시였다. 헬멧을 쓴 군인들 외에는 모두가 감염자라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 중 확실한 좀비는 아무도 없었다. 일부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일부는 허술한 바리케이트 뒤에서 돌멩이를 던지는 모습은 이상하게도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들의 소리가 귀에 닿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그들을 벌레 죽이듯 처치하는 동료 병사들 때문일까?
지금도 줄줄이 도착하고 있는 트럭에서 병사들이 계속 내렸다. 이들은 합류하기가 무섭게 감염자들에게 총을 난사했다. 아이도, 학생도, 아가씨도, 어른도, 노인도 모두가 감염자니 구별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누군가 최루탄을 터뜨렸는지 자욱한 연기가 도심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아직 학생인 듯한 감염자 하나가 한쪽 눈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게 보였다. 몸부림치던 그는 총알세례를 받고 옆에 흐르던 하천에 처박히더니 둥실 떠올랐다. 마른 체격의 남자가 웃통을 벗더니 커다란 태극기를 손에 들고 뛰쳐나오며 울부짖었다. 아마 쏘지 말라는 외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닿을 리 없는 그의 외침은 무수한 총알로 보답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는 어째서 태극기를 손에 들고 있었던 걸까?
저만치 떨어진 아파트에 뭐라고 쓴 플래카드가 보였다. 그 옆에서 가재도구를 집어던지며 저항하는 감염자 몇 마리가 있었다. 플래카드에 뭐라고 써졌는지 읽어보기도 전에 탱크 몇 대가 아파트에 사격을 개시했다. 감염자들이 있던 자리가 순식간에 커다란 폭심지로 변했다. 핏방울도 남기지 못하고 날아간 감염자들, 그리고 재가 된 플래카드. 탱크는 더 이상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고 포신을 돌렸다. 이번엔 바리케이트다. 쾅! 이번엔 사격이 정확하지 않아 바리케이트의 일부만 날아갔다. 그러자 탱크는 아예 그대로 전진해 남은 바리케이트를 뭉개버렸다. 돌아가는 캐터필러에 잠시 후 인간의 살점과 피가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하지만,
세상은,
지독히도 조용했다.
피의 살육은 정소위의 안에 있던 무언가를 눈뜨게 한 모양이었다.
“우리도 전진! 지원 사격을 하러 간다!”
그는 선탑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올라가 지붕 위에 설치된 k-3 경기관총을 잡고 사격을 실시했다. 도로에 있던 가게들의 유리창이 와르르 깨져나가자 안에 숨어있던 몇몇이 놀라 뛰쳐나왔다. 그리고 불과 몇 초 만에 그들의 운명은 길바닥에 널린 시체들과 마찬가지로 변했다.
그때였다. 장갑차 앞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그리고 제2, 제3의 불꽃이 군인들이 밀집한 장소에 떨어졌다. 감염자가 던진 화염병이었다. 새하얀 헬멧은 뭔가 처리가 되었는지 조금 그슬리는 정도였지만, 군복은 그렇지 않았다. 몸에 불이 붙은 군인들은 불을 끄려 바닥에 뒹굴었지만 바닥엔 유리 파편이 가득했다. 피투성이가 된 그가 흥분해 총을 난사하자 감염자는 물론 주변에 있던 군인들까지 다치기 시작했다.
“저런 머저리가!”
어쨌든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지붕 위에 막 올라온 김병장이 한탄했다. 저걸 그대로 둬야 하나? 싶을 때 갑자기 그가 헬멧을 손으로 붙잡고 필사적으로 벗으려는 몸짓을 했다. 마치 전기의자에 올라온 사형수처럼 절박한 몸짓이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곧 멈추었고, 그는 맥없이 쓰러졌다. 몸이 타들어가는데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죽은 게 확실했다.
김병장은 정소위를 힐끔 보았다. 하지만 정소위는 그 장면을 보지 못했는지 신나게 사격에 열중하고 있었다.
‘처형이다.’
하마터면 입 밖에 낼 뻔했지만, 김병장은 겨우 그 말을 삼켰다. 이 헬멧을 벗지 말라는 이유를 이제 알겠다. 아까 연대장이 직접 즉결처분을 한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이런 기능이 헬멧에 탑재된 이유라면 몇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혹시라도 감염된 병사에 대한 즉결처분, 반항하는 병사에 대한 즉결 처분, 그리고……
쾅! 김병장의 헬멧에 갑자기 묵직한 충격들이 가해졌다. 그의 몸이 붕 떴다가 장갑차 뒤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는 떨어지기 직전에 간신히 끄트머리에 몸을 걸쳤다. 몸을 지탱하려 장갑차에 손을 짚자 손가락 두 개가 떨어져나간 게 보였다. 보통 줄줄 흐르는 피 때문에 패닉을 일으켜야 하겠지만, 뇌진탕 증세가 있는지 김병장의 정신은 흐릿했다.
그는 목소리를 쥐어짜 정소위에게 경고했다.
“소위님, 감염자가…… 사격을……”
좀비 사태 전의 대한민국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지금의 한국에서 총을 구하는 건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다. 좀비 사태 이후로 미반납된 총기가 꽤 많았는데, 그중 일부가 여기에 흘러들어왔을 것이다. 아니면 이곳의 무기고가 털렸거나.
하지만 보고를 받아야 할 소위는 k-3에 몸을 기댄 채 축 늘어져 있었다. 그 아래로 피가 줄줄 흐르는 걸 보니 김병장과 달리 몸에 제대로 맞은 모양이었다. 피가 번지는 부위를 보니 살아나기 어려울 듯했다.
김병장은 하상병과 최이병을 불렀다. 하지만 둘 다 대답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시야가 매우 허전했다. 사방에는 아직 감염자가 남아 군인들에게 사격을 가하고 있었지만, 이들에겐 아무 표시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총에 맞으면서 헬멧의 기능이 정지된 듯했다.
정소위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걸 알았는지 장갑차가 멈춰섰다. 김병장은 그 진동을 견디지 못하고 장갑차 뒤에 머리부터 떨어졌다. 반쯤 부서진 헬멧이 그 충격에 김병장의 머리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세상의 소리가,
순식간에 밀려들어왔다.
-민주주의여, 만세!
-독재정권 타도하라!
-미주시에 누명을 씌우지 말라!
-시민에게 최루탄과 총을 쏘지 말라!
-이성을 상실하고 남을 공격하는 게 좀비라면, 우리가 아니라 너희가 좀비다!
-너희들과 현 대통령 모두 살인마들이다!
-역사가 부끄럽지도 않느냐!
김병장의 의식이 흐려질수록 소리들은 더욱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의 귀에서부터 시작한 진동이 뱃속에 들어올수록 더욱 커져 온몸을 흔들고 있었다.
기절할 수 있음을 하늘에 감사하며 그는 의식을 잃었다.
3
김병장이 의식을 회복한 장소는 군병원이었다.
“제3차 좀비 사태의 영웅이 깨어났습니다!”
“지금 기분은 어떠십니까?”
“손가락이 날아간 뒤에도 총을 잡고 불굴의 용기로 좀비들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요?
김병장은 무수한 카메라 플래시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들이야? 총 한번 제대로 쏘지 못하고 부상으로 쓰러진 자신이 어째서 전쟁 영웅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설명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니, 머리맡에 각하의 초상화가 걸린 게 보였다. 당연하지만 근엄하게 다문 입에선 어떤 설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그를 구원해준 건 불쑥 나타난 연대장이었다.
“추, 충성!”
김병장은 본능적으로 경례부터 했다. 그러자 연대장은 “쉬어”라고 말하고 바로 그를 포옹했다. 악수도 아닌 포옹이라니! 자신의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그는 사태를 이해하지 못한 채 관등성명부터 댔다.
“병장 김대삼!”
“그건 됐고, 다들 갈 때까지 입 다물고 있어.”
김병장의 등에 가 있던 손이 그의 등을 푹 찔렀다. 한기가 느껴지는 속삭임에 김병장의 몸이 굳었다. 연대장은 언제 그렇게 속삭였냐는 듯 호탕하게 김병장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이 친구가 좀 숫기가 없는 편인데, 일어나자마자 사람들이 잔뜩 있으니 놀란 모양이야. 오늘은 그냥 ‘영웅, 각하의 초상화 아래에서 깨어났다.’식으로만 기사 쓰고, 본격적인 인터뷰는 내일 하자고. 그럼 다들 나가 주게.”
기자들은 그의 부하라도 되는 것처럼 어떤 반론도 하지 않고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니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듯했다.
마지막 기자가 문을 닫고 나가자 연대장은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한 대 피우겠나?
“네!”
생전 담배를 입에 대 본 적 없는 비흡연자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곳이 병실이란 점도, 자신이 환자란 점도 중요한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연대장의 권유란 점이었다.
“우, 큭! 콜록!”
불 붙은 담배를 입에 물고 빨자 머리가 찡해지며 기침이 터졌다. 연대장은 이를 보며 껄껄 웃었다.
“초심자들이란 다 똑같군. 연기를 들이마시면 안 돼. 처음부터 연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것처럼 내뿜어야지, 이렇게.”
연대장이 내뿜은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는 곧장 환풍구에 빨려들어갔다. 김병장도 이를 따라 연기를 후 내뱉었다. 그러자 속이 좀 편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연대장은 이웃집 아저씨처럼 자상하게 말했다.
“그래, 어디까지 들었나?”
“뭐, 뭘 말입니까?”
“시치미 뗄 거 없어. 자네, 헬멧이 벗겨졌잖나. 그 동네 사람들이 뭘 외치며 죽었는지 들었을 거 아닌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악을 쓰며 죽어갔으니.”
김병장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 새하얀 헬멧들이 다시 떠올랐다. 그 하얀 색은 순수함을 의미하는 흰 색이 아니라, 모든 진실을 죽음으로 바꾸는 백골 사신의 색이었다. 짓밟힌 사람들이 흘린 붉은 피를 표백하는 석회의 색이었다.
“대답하지 않을 건가? 그렇다면 좋네. 내게도 생각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김병장은 다급하게 외쳤다. 그 짧은 시간에 그의 등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빛을 잃어가던 연대장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그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네! 분명 무슨 말을 듣긴 했지만,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런가.”
연대장은 담배를 빨고 연기를 후 내뱉었다. 그리고 김병장의 손을 내밀게 하더니 그 위에 재를 털었다.
"이제 담배를 피울 줄 알게 되었군."
김병장의 손에 불 붙은 담배가 짓눌려졌다. 갑작스런 고통에 김병장은 짧은 비명을 질렀다. 그 서슬에 떨어진 담배를 연대장이 줍더니 자신의 입에 물었다.
“자네가 자랑스럽네.”
칭찬인지 비웃음인지, 아니면 한숨인지 모를 말을 남기고 그는 병실에서 나갔다.
소등 시간이 되자 자동으로 병실의 불이 꺼졌다.
1인실 안에 드리워진 어둠은 빛도, 소리도 집어삼켰다.
그럼에도 그는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눈앞에서 찢겨지는 태극기를, 바닥에 흐르던 붉은 피를, 소리 없는 아우성을 견디며 그는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좀비 몇 마린 있었을 거야. 분명 그랬을 거야…… ”
머리맡에 걸린 초상화 속의 각하가 어둠 속에서 침묵하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