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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ventud Mar 13. 2016

이루어졌다, 꿈처럼

말하는 대로

오늘 아침엔 분명 서울 내방에서 못 다 싼 짐을 이리저리 구겨 넣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 스페인 마드리드 호스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묘하다, 굉장한 모험가 혹은 여행자가 된 기분.


누구나 다 한다는 시차 적응 같은 거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아침 7시가 되니 눈이 번쩍 떠졌다. 출근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아, 여기 스페인이지..' 다시 눈을 감아도 되는 "시차 적응"이라는 명분이 있음에도 다시 눈을 감기 싫었다.

한국에서라면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어 5분 만을 외치며 30분 후에 일어나기도 힘들었는데.


다시 눈을 감기 아깝다.



아직도 잠에 푹 빠져 있는 사람들이 깰까 노트북을 챙겨 살금살금 방을 나왔다.

한 달이 넘는 여행을 2주 만에 준비해야 했기에 매일매일의 세부 일정까지는 정하지 못했다.

시간이 없어서 세부일정 준비를 못한 것인데 오히려 매일 아침 현지의 아침을 먹으며

오늘은 어디로 향할지를 계획하는 시간이 하루 중에 가장 행복했다.

무엇보다 '오늘 계획은 여길 가고, 여기도 가고 그리고 여기서 뭘 먹어야 해'라는

숙제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아 좋았다.



이제까지 충분히 시간에 쫓겨 살아왔기에 이제는 내가 시간을 운용하고 싶었다.

나가고 싶을 때 나가고 걷고 싶을 때 걷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추고

하늘도 올려다보며 한량 노릇도 하리라.



그리고 그 사람을 만나기로 했다.

나의 스물한살을 나보다 더 잘 아는 그 사람.



Buenos días!

오늘 저녁 8시, 데리러 갈게.



1층 카페테리아에 내려와 한 번 둘러보고 테이블과 의자가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어제 도착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잤던 터라 배가 몹시 고팠다.


"나 뭐 먹을 수 있어? 배고파 죽겠어"

"츄러스 두 개 아님 구운 식빵"

"(츄러스는 포기할 수 없어, 그래도 츄러스만 2개는 너무 작다.)둘다는 안돼? 둘 다 먹고 싶은데"

"그래 (돼지야), 그럼 츄러스 하나에 식빵 좀 줄게, 많이 묵어라"



토스트는 준비된 mixed tomato(으깬 토마토소스)와 올리브 오일 그리고 소금을 살살 뿌려서 먹는다.

별거 아닌 거 같은데 너무 맛있다. 시장이 반찬이 됐고 식욕이 MSG가 됐나 보다.

무엇보다 풍미 가득한 올리브 오일과 토마토의 조합이 내입에 딱 맞았다.


츄러스는 스탭에게 우유를 데워주라고 한 뒤에 준비된 핫쵸코 가루를 듬뿍 넣어 휘휘 저어 푹~ 찍어 먹는다.

입안 가득 퍼지는 올리브 오일의 향과 츄러스의 바삭함, 기분 좋게 씁쓸한 커피 한 모금이 뒤섞여 굶주린 내 입안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춤을 추었다.



스페인에서 살아도 되겠다. 음식이 너무 잘 맞다. 물론 일주일도 되지 않아 천상 한국인임을 깨달아야 했지만.

오전 시간은 처음 만난 청춘들과 아침식사를 하며, 서로의 여행의 동기를 나누었다. 그 후엔 마드리드에서의 일정을 계획하며 여유 있게 보냈다.



점심은 푸드마켓 "Sanmiguel Market"으로 향했다.

그곳은 내게 신세계였다.



20대 초반 어학연수 시절, 외국 친구의 초대로 갔던 홈파티에서 모두 와인이나 맥주 한잔씩 들고 서서 처음 본 사람들과 서로의 이야기를 열띠게 나누는 장면 그리고 그 분위기에 흠뻑 빠져들었던 경험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 분명 조금 세련되 보이는 시장인데 사람들이 어디선지 와인잔을 받아 들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타파스를 즐기고 있었다.

* 타파스: 스페인에서 식전에 술과 함께 간단히 곁들이는 소량의 음식. 절인 올리브, 치즈, 하몽, 튀긴 해산물 등이 있다.


마치 규모가 큰 스탠딩 파티에 온 듯한 느낌. 백주대낮에 고상하게 음주가 허용되는 안주 뷔페랄까. 매일 오는 사람인 것처럼 냉큼 와인샵을 찾아갔다. 와인은 취향별로 골라 한잔에 3유로(대략 3800원). 다 마시고 나면 잔은 마켓 안에 두고 가면 된다.


What a wonderful idea!

얼마나 멋진 생각인지!



각종 절인 올리브도 먹어보고, 하몽을 썰어 넣은 샌드위치도 하나 주문했다.

하몽은 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건조 숙성시킨 스페인식 생햄이다. 여기 오면 꼭 먹어보고 싶었다.

수많은 뒷다리가 빨래 널리듯 걸려있는 모습이 신기해서 바쁘게 사진을 찍어대는데 종업원이 그런 나를 보더니

"너도 한 장 찍어줄까?"했다. 사람이 많이 몰려 주문받기도 바쁜데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한다.

염치없지만 핸드폰을 넘겨주며 바로 프로답게 웃어 보였다. 


"하~~ 몽:D"






날씨가 흐려지는 듯하더니 비가 한두 방울 내리기 시작했다. 약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서둘러 호스텔로 향했다. 지하철을 내려 출구로 나왔는데 아침에 들어왔던 입구랑 달랐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것이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의 시작임을.


호스텔이 위치한 거리 이름을 알고 있었기에 금방 찾을 거라고 생각하고 감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처음 보는 곳이다. 공교롭게도 빙글빙글 돌아가는 도로를 중심으로 많은 거리가 가지처럼 뻗어나가고 있었다.


'여기 어디지...'



빗줄기는 더 굵어져 가고 판단력은 더 흐려졌다.

사람들을 붙잡고 묻기 시작했다. 다들 너무 친절해서 고마웠는데, 친절해서 길이 더 헷갈렸다. 잘 모르는 사람들 역시 돕겠다고 구글맵을 켜서까지 거리를 찾았는데 알려준 방향이 다 아니었다. 온갖 거리를 다 돌다가 가랑비에 머리와 옷이 다 젖고 나서야 찾았다. 10분 후면 그가 도착하는데 나는 "비 쫄딱 맞은 생쥐"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7-8년 만에 만나는데 이 꼴로 나갈 수는 없다. 급하게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메시지가 왔다.


"나 도착했어"



스페인에 언제 올 거냐는 그의 물음에 매번 '갈 거야, 가야지'로 대답하다가 어느 날 말했다.

"서른 되기 전에 꼭 갈 거야. 그때 나한테 밥 한 공기 사줘야 해. 그래 줄 거지?"

서른이라는 시점은 그에게 말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나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서른이 되기 전엔 꼭 가자.


그리고 오늘이 그날이 된 것이다. 이루어졌다. 꿈처럼. 말하는 대로.



그 앞에 서면 우쭐거리는 표정으로 얘기할 거다. "거봐 내가 뭐랬어? 서른 되기 전에 온다고 했지?"

급히 축축한 옷을 갈아입고 아멜리아에게 줄 한복 선물을 챙겨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문 앞에 서있는 그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건장한 어깨. 특유의 하얀 새치 섞인 웨이브 진 머리.



그와 마주 서자, 나는 스물한 살의 나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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