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기억 속에 나는 여전한가요?
그 사람을 떠올리면 내가 가장 순수했던 나이로 돌아간다.
처음 이성으로 나를 두근거리게 했던 사람,
어린 내가 어려워했던 남녀관계를 서두르지 않고 친구로 옆에서 지켜봐 준 사람이다.
새삼 그 시절 어느 날이 떠오른다.
"너는 참 색깔 있는 사람이야"
그 말의 의미를 다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괜히 무심한 척 대답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만의 색이 있어. 나만 있는 건 아니야."
"아니, 너는 아직 어려서 몰라. 자기 색이 없는 사람도 있어. 그런데 너는 너만이 가진 색깔이 있어. 너는 그런 사람이야."
"You have your own color."
왜 그랬을까. 그 말이 참 듣기 좋았다.
예뻐서 좋다거나, 긴 생머리라 좋다거나, 착해서 좋다는 그런 게 아닌 나를 나란 사람 자체로 알아주는 느낌. 그때는 참 특별하게 다가왔고, 지금도 사회에서 똑같이 다듬어져 간다는 느낌이 들 때면 떠오르는 위안이 되면서 동시에 씁쓸해지는 그의 한마디.
나에게 나만의 색깔이 있었지. 최고는 아니라도 유일성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어느 자리에 가든, 누구에게도 기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최고 위에는 또 다른 최고가 있을 뿐이고 나는 다만 다른 사람과 명백히 다른 '나'자체 이면 충분했다. 그 흔한 엄마들의 단골 멘트에도 비관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이번에 엄마들 모임 갔는데, 누구가 국제고에 들어갔데."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걔는 특별히 공부 머리가 있나 봐, 그것도 재능이지. 공부 재능." 나도 내가 좋아하고 재능 있는 분야가 있었기에 그 친구에 비해 뒤쳐진다거나 낙오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엔 나도 잘 될 것이라는 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나를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유일성'이라고는 무뎌진 나를 다시 찾기 위해.
8년 전, 내가 귀국을 앞뒀을 때 그는 나를 교내 작은 카페로 불러냈다. 나는 며칠 뒤면 돌아가야 하기에 자꾸만 진지 해지는 관계를 회피하고 있었고 그는 솔직하려고 했다. 나는 너무 어렸고, 두려웠고, 불필요하게 현실적이었다. 카페는 커피 한잔으로 아침을 깨우려는 사람들로 시끄럽진 않았지만 적당히 북적북적했다. 그는 조그만 말소리도 카페 안 사람들에게 다 들리는 것쯤은 신경 쓰지 않는 듯 고백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나 너 좋아해."
내가 이곳을 떠나면 현실적으로 그를 다시 만나는 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친구로 남자고 했다. 더 오래 서로의 안부를 묻자고, 언젠가 꼭 스페인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래도 많이 서운했는지 귀국하는 날 배웅을 나오지 않았다. 배웅 나온 친구의 휴대전화를 빌려 전화를 걸었다.
"나 이제 비행기 타러 왔어. 하나만 물어보고 싶어서. 네가 준 이름 계속 써도 될까?" 처음 만난 날 한국식 이름이 어렵다며 스페인 이름을 줬었다. 그 이후로 계속 그 이름으로 나를 불렀다. 나 역시 영어학원에서 단순히 한국식 발음과 유사해서 지은 영어 이름보다는 훨씬 의미 있고 좋았다. "그럼. 당연하지, 나야 좋지. 그런데 지금 와서 이런 생각이 들어. 왜 하필 그 이름을 너에게 줬을까. 우리 엄마 이름도 누나 이름도 그리고 내 조카 이름까지 그 이름인데" 부를 때마다 한동안은 생각날게 분명했다. 그게 마지막 통화일 줄 알았다.
그때는 꿈에도 몰랐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는.
1년도 지나지 않은 내 생일에 그가 메시지를 보내오고, 그로부터 꼭 1년 후 한국의 어느 지방도시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그 해 이후 그는 8년간 매 해 맞지 않는 내 음력 생일을 챙겼다. 음력 생일은 매해 바뀌는 법인데, 음력 생일이란 걸 알리 없는 그는 스물한 살 그 해의 내 생일날에 맞춰 매년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다. 덕분에 나는 수년간을 생일을 세 번이나 보내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친구들이 챙기는 양력 생일, 가족이 챙기는 음력 생일 그리고 그가 잘못 알고 있는 8년 전 생일.
그때의 내 서툴고 어린 감정 덕에 우리는 여전히 좋은 친구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내 손엔 돌을 앞둔 그의 딸 아멜리아의 선물 "한복"이 들려 있었다. 오랜 친구 앞에서 나는 지금의 내 나이를 잠시 벗어둘 수 있었다. 그의 기억 속에 나는 여전히 스물한 살의 나였기에, 반가움의 포옹으로 꿈같은 현실을 체감했다. 그간의 공백이 무색한 듯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는 지난 이야기로 나의 어린 날을 계속 떠올리게 했다. 그와 함께한 시간은 무엇보다 성숙한 사회인의 가면을 쓰지 않고 어린 '나'로 있을 수 있어서 편안했다.
예전에 누군가 나에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왜 어린 시절의 친구일수록 더 소중한 줄 알아요? 그들은 오랜 시간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을 나보다 더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에요." 나라는 사람은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 한마디로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그랬다. 그 말이 맞았다. 나는 주관적으로 내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나를 판단했고,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나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나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내게 보이지 않는 나의 표정 그리고 말투까지.
20대의 어느 시기를 회상하며 지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그녀는 내게 이런 얘기를 했다. "그때의 너는 참 순수했어. 열정적이었고. 물론 지금은 그때보다 더 평정심을 갖게 돼서 감정에 크게 흔들리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모습이 딱딱해 보여서 그때의 네 모습이 그리울 때가 있어"
어떤 부분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냐고 물었다.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나는 내 모습을 지켜보지 못한 채, 나도 모르게 변하고 있었다.
내가 나를 제일 잘 안다는 건 정말 큰 착각이었다.
운명은 거짓말처럼 꿈처럼 영화처럼
그와 나를 이 자리에 마주하게 했다.
그리고 나는, 그를 통해 스물한 살의 나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