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도 되지 않아 이런 글을 쓰게 되다니
어차피 내려올 산, 왜 오르는 건지 모르겠어.
등산을 즐겨하시는 아빠가 "산에 같이 갈래?"라고 물으시면
늘 '나는 굉장히 합리적인 사람이야'라는 눈빛으로 대답했던 말.
나는 마흔이 돼도 오십이 돼도 등산 좋아할 일은 없을 거야. 그건 내가 장담해. 그랬던 나였다.
그런 내가 스물아홉. 내 발로 내 뜻과 내 의지로 동네 산도 아닌 한라산을 오르겠다고 마음먹었다.
아홉수 믿지도 않았고 당시엔 그런 게 진짜 있나 했었다. 지나고 보니 왜 유난히 스물아홉 해가 그리도 시끄러웠는지.
갑자기 한라산을 가려고 했던 이유가 그 아홉수를 털어버리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한라산 이후로 확실히 깨달은 점이 있다.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할 때는 앞으로 얼마나 많이, 얼마나 힘들게 걸어야 하는지
몰라도 된다는 것이다.
미리 알고 가는 인생이 없듯이.
산을 오르기 전에 그 무자비한 오르막 길을 미리 알았다면 나는 아마 겁을 집어먹고 출발도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 길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잡생각이 정제되는 경험,
식은 김밥 한 줄, 따끈한 라면 한 사발의 맛,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미풍, 높은 곳에서 바라다보는 작고 작은 세상,
정상에서 느끼는 성취감, 스스로에 대한 믿음, 내딛는 걸음마다 다져지는 생각들도 모르고 살았겠지.
오르고 싶은 산이 무엇이든 걸음을 내딛을 준비가 되었다면 눈 앞에 펼쳐진 그 길만 걸으면 된다.
다음 고개 너머에는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과연 끝까지 갈 수 있을지 고민하느라 힘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는 그 스릴과 모험을 온몸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기면 된다.
핵심은 지금 당장 떼야할 한 걸음. 거기에만 집중하면 된다.
힘이 더 들지만 풍경이 아름답다는 관음사 코스를 올랐다.
정상에 올라서 아빠와 영상통화를 했다.
"우리 딸, 안 힘들었는가? 오를 만했는가?"
"응, 나 잘 올라왔어요. 그런데 한동안 다시 올 일은 없을 거 같아요, 하하하"
정상 직전에 꼴딱 고개는 정말이지 숨이 꼴딱 넘어가는 나 자신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동안 내려놓고 싶던 잡다한 고민과 걱정, 미련과 후회 그 밖에 하고 싶지 않지만 떠오르던 생각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무거운 발걸음에 반해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오히려 내딛는 순간에는 먼발치의 그곳에 대해 미리 '언제 도착하나..' 걱정하지도 좌절하지도 않았다.
그냥 묵묵히 내 발 밑만 보며 이 한걸음 한걸음이 모여 정상이 되는 거라 믿고 걸었다.
숨이 끊어질 듯 차올라도 멈추지 않고 천천히라도 걸었다. 걸음을 멈추면 차오른 숨이 몰려와 더 힘이 들었기에 거북이걸음이라도 걷고 있을 때가 나았다.
멈춰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멀게만 보이는 목표에 한숨짓는 것보다 작은 일이라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이러니하게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등산을 통해 깨달았다.
누군가 그랬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슬럼프다.
중국의 속담에도 이런 말이 있다.
不怕慢, 就怕站
(아닐 부, 두려울 파, 느릴 만, 바로 취, 두려울 파, 멈출 참)
느린 것을 겁내지 말고, 멈춰있는 것을 두려워하라.
마흔이 되지 않았어도 이제는 더 자주 '오르는 일'을 즐길 수 있을 거 같다.
돌아오는 1월엔 늘 딸과의 등산을 원하셨던 아빠와 겨울 한라산을 오르려고 한다.
글을 보는 당신이 단 한 번이라도
산에 올라보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나의 이야기가 아닌 당신의 이야기.
One may walk over the highest mountain one step at a time.
최고 높이의 산을 오를 때에도
한 번 한 걸음에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