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표정과 내 표정이 겹치는 순간,
키보다 높은 나뭇가지에 노란 봄이 맺혔다.
까치발을 들고 팔을 최대한 뻗어 사진에 담으려 애를 쓰는 나를 향한 몇몇 시선이
노란 존재로 향했다.
어김없이 봄이 왔네
등 뒤로 들리는 지나가던 아주머니의 한 마디.
맞아요, 그래도 왔네요. 봄이.
근 2주간 외출을 최대한 줄이고 거의 칩거에 가까운 생활을 하다가 며칠 전 비교적 한산한 오후 시간을 이용해 동네 공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공원 입구에는 열감지 카메라와 손 소독제가 비치되었고, 마주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한 풍경. 몇 달 전이라면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다들 지난 몇 주간 다양한 감정이 오갔을 것이라 짐작된다. 나 역시 공 들였던 또 하나의 스텝을 마치고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출발선에 서있던 찰나였다. 걱정과 기대를 동시에 끌어안고 '신호탄'을 기다리며 마지막 호흡을 가다듬던 중에 경기 잠정 중단 선언이 내려진 것 같았다. 10분 후엔 다시 시작하겠지? 30분 후? 1시간? 그러던 것이 경기 당일을 넘겨 몇 주가 될지 모른다는 소식을 듣게 된 선수 마냥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상황을 파악하고, 받아들이고, 다시금 지금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을 찾고, 한 걸음씩 움직이기까지 꽤 많은 날이 흘러갔다.
처음엔 다소 움츠러들었다. 예상할 수 없는 전개에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저런 허상들이 '걱정'이란 옷을 입고 줄지어 찾아와 북적거렸다. 그렇게 긴 밤이 찾아왔다. 사방이 컴컴하고 도저히 밝아질 거 같지 않은 밤. 그런 밤이면 창 밖에 고양이 울음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려왔다. 눈을 뜨면 천정에 창 모양의 희미한 빛 그림자가 하나 떠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두운 밤은 실은 내 기분에 따라 달리 보였다. 감정적으로 축 쳐진 날은 어둡고 어둡기만 한 '적막한' 밤이지만, 고개를 들면 어두운 밤일 수록 별이 유난히 밝았다. 어두움 속에 비로소 '별'이 더 빛난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또 언젠가는 그 어느 때보다 용기와 위안이 필요한 밤이었다. 불도 다 꺼져 사방은 어두운데 집 현관문으로 향하는 길만 밝은 것을 보고 놀라 그 빛의 출처를 따라 올려다보았다. 뜻밖에 건물과 건물 틈 사이로 그날따라 유난히 밝은 달빛이 레드카펫보다 더 근사한 골드 카펫을 선사했다. 그날 밤의 신비한 장면을 사진에 남기고 싶었지만, 눈으로 보는 것만큼 담을 수 없어서 마음에만 새겼다. 그건 마치 "너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시기를 잘 겪고 나면 이 골드 카펫 위를 걷는 것처럼 장차 꿈꿔왔던 길을 걷게 될 거야."라고 누군가 말해주는 듯했다. (어쩌면 내 안의 소리) 그렇게 마음에서 씌어준 안경을 통해 칠흑 같은 밤도 되었다가 찬란한 밤도 되었다.
밤은 머지않아 새벽의 얼굴을 하고,
새벽은 늘 어김없이 '아침'을 불러온다.
걱정과 우려를 불러일으키는 각종 뉴스의 범람 속에서도 유독 눈길을 끌었던 소식은, 꼭 필요한 자리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사람들, 어려움을 나눠 들겠다고 나선 각지 이웃들의 소식이었다. 자처해서 도움의 손길을 보내고,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소식을 볼 때면 긴 밤을 밀어내는 동트는 새벽의 밝은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칩거에 가까운 생활 중에 넷플릭스에서 보게 된 영화 '눈부신 세상 끝에서, 너와 나(All the Bright Places)' 속의 여느 대사처럼,
"...there are bright places, even in dark times. And that if there isn't, you can be that bright place with infinite capacities..."
어두운 시기에도 밝은 곳은 있기 마련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개개인 스스로가 밝은 곳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주말 오후 마스크를 착용하고 나선 공원에서 며칠 전보다 조금 더 늘어난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이 서로 간의 간격을 무언의 약속처럼 유지하며 걷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이대도 다양했고 따뜻해진 날씨 때문인지 표정들도 한결 부드러워 보인다. 여기저기 연녹색 새순이 돋기 시작했고, 노랗게 붉게 꽃망울도 눈에 띄게 늘었다. 하나 둘 눈에 담으며 걷다가 무언가 알 수 없는 활기가 느껴지는 에너지에 고개를 돌렸다.
공원 한 귀퉁이 너른 공터에 머리를 야무지게 묶은 여자아이 둘이 줄넘기 두 개를 연결해서 길게 만들어 양쪽에서 잡고 크게 원을 그리며 돌리고 있다. 열심히 돌아가는 줄 한가운데 마스크로 얼굴 반을 가렸지만 얼굴에 가득한 흥은 가려지지 않은 여자아이 하나가 힘차게 뛰어오른다. 아이들의 머리 위로 봄 햇살이 부서져 내려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반짝거린다. 잠깐이지만 마스크를 썼다는 것도 잊고 몇 달 전 일상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윽고 나와 같은 표정을 한 사람들이 잠시 멈춰 그들을 바라보는 장면을 보고는 묘한 공감대를 느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진짜 봄은 여기 있었네.'
모두 쉽지 않을, 정말이지 어려운 시기이지만
각자 자리에서 굳건히 버티고
열심을 다하고 있기에
늦게나마 봄은 기어코 올 것이라고
간절히 바라본다.
* 개인의 일상을 뒤로하고 현장에서 발로 뛰고 있는 모든 분들께 너무나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