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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쏭작가 Dec 19. 2023

따돌림당한 드라이기의 복수

집 나간 두피

 우우우~ 우우~. 고요한 소리와 가녀린 입김. 내가 묵었던 베트남 달랏 호텔의 드라이기 소리다. 드라이기를 귓가에 바짝 대고 있는데도 주변의 모든 소리 렷하게 들린다. 왜 고장 난 드라이기를 갖다 놨담? 다급한 마음에 엄마의 방에 비치된 드라이기의 전원을 켜 보았다. 역시 골골 거리며 다 죽어 가는 소리를 낸다. 풍력은 미니 손 선풍기보다도 한참 못하고 온도까지 모두 비정상이다. 미지근한 바람으론 도통 머리가 마르지 않아 온도를 높이면 열이 오를 대로 오른 고데기로 변신해 버린다. 이러다가 귀가 녹던지 머리카락이 구워지던지 둘 중 하나 대참사가 일어날 것 같다. 긴 머리칼을 가진 내가 드라이기 없이 4박 5일을 잘 버텨낼 수 있을 것인가. 뜻밖의 체험을 통해 절실히 깨달다. 미니멀리스트도 좋지만 본인에게 필요한 것은 적당 갖추 사는 게 지락.


 "짐 챙길 때 다이슨 드라이기 가져갈 거야?" 멀리 여행을 갈 때마다 남편에게 듣는 질문이다.

 "응. 가져갈 거야." 매번 똑같은 나의 답변이다.

 집 떠나는 당일까지도 필수로 매우 잘 사용하는 몇몇 물건들이 있다. 드라이기, 충전기, 에어팟. 이 중 하나라도 빠뜨리게 되면 차를 돌려 말아 할 정도로 심각해지는 나만의 필수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해외에 갈 때마다 부피가 있는 드라이기를 챙기기가 무척 성가셨다. 캐리어를 수하물로 부치는 경우 파손의 위험이 따르기에 옷으로 둘둘 싸서 고정하곤 했는데 그러면 드라이기의 몸집이 두 배가 되었다. 들고 갈까 말까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에이. 어차피 호텔에 드라이기 있을 텐데.' 하고선 조금은 가벼운 상태로 집을 나섰다. 드라이기를 신경 쓰다가 에어팟까지 빠뜨리고 나오는 실수를 범했다. 처음 있는 일이라 약간 불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나에 관해서라면 은근 꼼꼼한 남편이 운전 중에 "드라이기 챙겼어? 에어팟 챙겼어?" 하고 물었다. 모두 못 챙겼다고 말하자 남편이 급기야 차를 돌리려고 했다. 괜찮으니 공항으로 곧장 가도 된다고 그를 말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족들의 의약품이며 세면도구까지 덩달아 챙겼더니 결국 한 짐이 되고야 말았다. 드라이기를 덜어내고 여행길에 나선 것은 나에겐 큰 결심이었다.

 비행기 내에선 필수로 에어팟 착용을 하는 편이지만 이번엔 소지하지 못했기에 꿩 대신 닭으로 이어 플러그를 착용했다. 다행히도 조용히 가는 사람들이 태반이어서 한숨 곤히 잘 수 있었다. 비엣젯을 타고 달랏 공항에 도착했더니 위탁 수하물로 맡긴 캐리어의 커버가 홀라당 벗겨져 있었다. 누가 네 옷을 벗기고 추행하였니? 불길한 마음에 캐리어를 찬찬히 확인해 보니 잠금장치도 부러진 상태였다. 내부의 짐은 큰 문제가 없는 듯했지만 고가품을 안 가져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장 사진을 찍고 공항 직원에게 문의했더니 15만 동을 주겠단다. 15만 동이면 우리나라 돈으로 8천 원인데 돌았..!? 20만 원짜리 캐리어가 망가졌는데 8천 원을 주겠다는 망할 계산법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말도 안 되는 대처라고 했더니 항공사로 이메일을 보내라고 해서 일단 포기하고 호텔로 향했다.


 달랏에서의 첫째 날. 개운하게 씻고 화장대에 앉았는데 기온이 후덥하니 살짝 더웠다. 호텔 내부에는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드라이기까지 없으니 내게는 궁극의 미니멀라이프 체험이나 마찬가지였다. 제 본분을 망각한 드라이기는 사용해 봤자 팔만 아팠고 자연 상태로 차차 머리를 말리는 수밖에 없었다. 선풍기와 에어컨이 없는 것은 그럭저럭 견딜만했지만 드라이기의 부재는 결국 지루성 두피염을 떠안게 만들었다. 매연과 미세먼지로 인해 아침저녁으로 샤워를 해야만 했다. 드라이기가 없으니 씻는 게 다가 아니었다. 마트에 가서 하나 장만할까 고려했지만 어쭙잖은 미니멀리스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여행 내내 젖은 머리 하나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했다.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머리를 감아도 안 감은 듯 떡이 지고 두피가 아파왔다.


 어찌어찌 버티고 한국으로 돌아와 손에 익은 나의 드라이기를 사용했더니 숨통이 확 트였다. 호텔 드라이기에 비하면 태풍이요, 헤어숍 전문가의 손길이나 다름없었다. 하필 처음으로 드라이기를 두고 먼 길을 떠났는데 궁극의 미니멀라이프에 두 손 두 발 다 드는 역사를 썼다. 여행은 잘 마쳤으나 지루성 두피염은 계속됐다. 밤낮으로 두피가 너무 간지러웠다. 베개에 닿는 것만으로도 간지럽고 아파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단발로 싹둑 머리칼을 잘라내야 하나 고민이 됐을 정도였다. 머리를 감은 후에 두피 진정제를 뿌려 주고 완벽히 말리기를 반복했더니 차츰 회복세를 보였다. 지루성 두피염을 앓으면서 따갑고 간지러운 것도 문제였지만 두피가 머리카락을 모두 뱉어내는 듯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놔! 다 뱉어. 나 대머리로 변신할 거야!' 머리카락이 마르지 않아 4박 5일 내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었던 시간을 생각하니 바보 같은 몰골에 웃음이 나온다.


 챙길 건 잘 챙기고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연약한 두피로 배워 냈다. 내 몸이 건강해야 미니멀라이프도 계속 실천해 나갈 수 있기에. 나에게 없어도 되는 것과 꼭 필요한 것들을 구분하는 눈을 계속 키워나가야겠다. 의외로 에어팟의 노이즈캔슬링 기능이 없이도 잘 지낸 나의 무던함에 깜짝 놀랐고, 순식간에 대머리가 될 뻔한 내 두피의 민감함에 더더욱 깜짝 놀랐다. 두피마저 나약하고 센서티브 한 나 데리고 살기 참으로 힘드네 그려. 두피가 안정되니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혹시 나처럼 지루성 두피로 인해 고생하는 분이 계신다면 두피도 얼굴 피부라고 생각하고 신속하고 깨끗이 건조하는 습관을 들이시길 바란다. 지루성 두피염은 탈모로 이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에 가벼이 넘길 질환이 아니다.


 클래식 음악보다 잔잔했던 달랏의 드라이기 소리가 이따금 그리운 걸 보니 좋은 경험을 했다는 생각도 든다. 만드는 사람은 제품을 책임감 있게 견고히 만들고, 쓰는 사람은 싫증 내지 않고 오래 잘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미니멀라이프의 소비 패턴이다. 찬 바람, 따뜻한 바람을 번갈아 가며 내 머리카락을 신속하게 말려주는 우리 집 드라이기와 함께한 지도 벌써 오 년이 넘었다. 시간의 흔적이 보이지만 돈값을 꽤 잘하고 있는 녀석에게 고맙다. 내 머리 꼭대기를 책임지는 분홍 드라이기와 오래오래 동행할 수 있길 바라며 Many멀(?)리스트는 오늘도 가진 것을 요긴하게 사용하는 하루를 보낸다.

없어 봐야 소중함을 안다. 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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