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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본 로또 당첨 번호

일 등 담청을 두고 미리 고민하다

by 미세스쏭작가

무의식 중에 꾼 꿈은 눈을 뜸과 동시에 초침을 다투며 증발되기 마련이다. 며칠 전 물을 많이 마신 탓에 자다가 깨서 볼일을 봐야만 했다. '어휴 귀찮아. 얼른 다시 자러 가야지.' 화장실로 향하는데 일렬의 숫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막냇동생이 꿈에서 불러 준 숫자들이었다. "누나. 받아 적어. 일. 육. 십일..." 신기할 만큼 또렷하게 기억나는 숫자들을 얼른 핸드폰 메모장에 기록했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로또 당첨 예지몽인가.


로또 일 등에 당첨 된다면 당장 뭐부터 할까? 이사부터 갈까. 집은 그대로 두고 부지런히 여행을 다니는 게 좋겠다. 갑자기 큰돈이 생기면 고민이 많아지겠는데? 당첨금 절반은 남편한테 줄까? (희대의 사랑꾼) 그렇게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켠 후에 겨우 다시 잠들었다.

복권을 사기 위해 생전 가보지도 않은 복권 가게로 향하는데 웃기기도 하고 긴장도 됐다. 혼자서 복권을 사 본 경험이 없던지라 복권 가게를 들르는 것 자체가 영 어색하고 민망했다. 딸랑딸랑. 요란하게 종이 울리는 가게의 문을 열고 영업장으로 들어섰다. 이게 뭐라고 공항 수색대를 통과하는 기분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밝은 목소리로 사장님에게 인사를 건네고 출입구 가까이에 자리를 잡았다. 담배 냄새가 몸에 밴 아저씨들이 네 명이나 계셨는데 범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두근두근. 가게 손님들을 곁눈질로 훔쳐보며 소심하게 사인펜을 집어 들었다. 핸드폰에 적어 놓은 숫자를 소중하게 하나씩 붉은 종이 마킹했다. "사장님. 여기요."

드르륵. 복권이 읽히는 소리인지 씹히는 소리인지. 미래에 불어날 내 돈을 세는 소리인지. 요란스러운 기계음이 끊김과 동시에 이런 경고를 받았다.

"이렇게 쓰시면 안 돼요."

"네? 왜요?"

"숫자를 여섯 개만 마킹하셔야 되는데 일곱 개를 체크하셨어요."

"아... 네. 다시 수정할게요." 맙소사. 행운 숫자인지 뭔지까지 미리 표기해 버린 자신이 어찌나 부끄럽던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가게에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에 조금 전보다 두 배는 민첩하게 손을 움직였다.


드르륵. 드디어 내 손에 반질반질한 윤기가 나는 작은 로또 복권 한 장이 쥐어졌다. "감사합니다. 계산할게요." 민망함을 무릅쓰고 얻은 복권을 호주머니에 고이 집어넣었다. 그리곤 사장님께 볼이 발그레한 춘식이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 안 되는데?"

"아!" 아오씨. 등줄기에 눈물이 주르륵. 복권 계의 도사인 아저씨들의 시선이 뒤통수에 나란히 꽂히는 것 같았다.

벽에 붙은 종이를 보고 계좌이체를 해 달라는 아저씨에 요청에 따라 내향인인 나는 손을 떨며 마지막 임무를 완수했다. 'Wow! like a 등신st.'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내겐 복권을 사는 게 천국의 계단을 오르는 것보다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입금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나직한 목소리로 인사를 한 후 드디어 가게에서 탈출했다.


대망의 토요일. 복권 추첨일이 당도하자 나는 꼭꼭 숨겨 놨던 복권을 남편에게 하사했다.

"오. 뭐야?"

"일 등에 당첨될 복권이야. 확인해 봐." 그는 아내가 홀로 복권을 구매했단 사실에 놀라며 하하 웃었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큐알 코드를 찍은 남편은 이번엔 더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왜 그래. 이리 내놔."

"응. 가져." 아무런 미련도 없이 순순히 복권을 넘기는 걸 보니 꽝이 될 상이로소이다. 그래도 최소 오천 원은 됐겠지 약간의 희망을 품은 채로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숫자 삼십 개 중에 들어맞은 숫자가 무려 한 개였다. 아쉬울 것도 없는 낙첨이었다.


어이. 로또 양반. 내 춘식이 카드에서 빠져나간 돈의 40%는 꼭 기부금으로 사용해 주슈.


로또 이야기를 빌어 마음을 털어놓자면 요즘 글을 쓰는 게 로또 복권을 사는 것보다 더 허황된 꿈처럼 느껴졌었다. 이 년이 넘도록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쓰거나 구상해 왔으나 현실은 낙첨보다 더 썼다. 브런치 제안 메일을 받을 때마다 약간의 고민과 함께 내 꿈은 오르락내리락 멀미를 겪었다. 너무 진심이라서 뭐든 더 어렵게만 느껴지는 것 같다. 권태로운 감정이 나를 휘감을 때마다 미세스쏭작가의 글을 기다려 주시는 구독자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구독자 여덟 명에 호들갑을 떨던 내게 어느덧 팔백 명이 넘는 구독자가 생겼다. 조회수 1,361,200을 달성하기까지 얼마나 긴 엉덩이 싸움을 해 왔던가. 오늘 내가 바라는 당첨은 누군가 내 글을 읽으며 피식 웃음 짓는 것이다. 외롭지만 마냥 허황되지 않은 꿈을 다독이며 복권을 사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적어도 내가 쓴 글에는 꽝이 없으니 어떤 면에선 내 글이 로또보다 낫지 않겠는가. 로또 낙첨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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