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가 좋았어
우리 집 막내 두 살배기 하임이는 자타공인 천사견이다. 하임이와 함께 다니면 수많은 사람들이 말을 걸어온다. 가을장마가 그치고 모처럼 날이 맑게 갠 오후였다. 하임이는 회색 꼬리를 살랑이며 여기저기 스민 비와 풀 냄새를 맡느라 몹시 분주했다. 그때였다. "엄마야. 너 어쩜 그렇게 예쁘니. 야야. 너 참 예쁘다." 할머니 한 분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셨다. "안녕하세요. 하임이도 인사해. 할머니 안녕하세요 해야지(?)." 언제부턴가 이것은 산책 전용 고정 멘트가 되었다. 하임이는 잠깐 동안 할머니의 신발 냄새를 맡더니 바람보다 빠르게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이고. 참말로 작고 귀엽다. 너 어디로 가니? 내가 오늘 너를 한 번 따라가 봐야겠다."
오잉? 내향인인 나는 당황스러워서 순간 걸음을 멈췄다. 할머니 차림새를 보니 수상한 분은 아닌 것 같아서 맘 놓고 말동무를 해 드려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날씨가 좋죠? 어디로 가시는 중이세요?" 할머니는 매일 같은 시각 걷기 운동을 하신 후에 아파트 양로원으로 가신다고 하셨다. 이때부터 할머니의 일장 연설이 시작되었다.
매일 꾸준히 운동해라.
먹는 데 아끼지 말고 좋은 걸 잘 챙겨 먹어라.
60대나 70대 때 아프면 벌어 둔 돈을 모두 까먹게 되니 아파도 80이 넘어서 아파야 한다.
술 먹지 마라.
갖은 세월을 삶으로 살아내신 어르신들의 조언은 마음에 쏙쏙 박힌다. 버릴 게 없다. 노인분들과 대화하는 걸 무척 좋아하는 나는 할머니의 서사에 귀를 기울였다. 할머니는 이 년 전에 할아버지를 떠나보내시고 혼자가 되셨다 했다. 못 말리는 애주가셨던 할아버지는 결국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단다. 마지막 순간까지 술을 못 먹는 게 가장 큰 고통이셨다는 할아버지. 그는 생전에 음식을 드실 때에도 이건 소주 안주, 요건 맥주 안주, 저것은 막걸리 안주 하시며 반주를 즐기는 낙으로 사셨단다. 반면에 할머니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으셨다고 했다. 술을 멀리하고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신 덕분에 할머니는 곱고 젊어 보이셨다.
"내가 몇 살 같아 보여요?"라고 묻는 할머니를 마주하며 여자들의 마음은 매 한 가지구나 싶었다. 나이를 알아맞혀 보라는 요청을 좋아하지 않지만 할머니 앞에선 맘껏 재롱을 떨었다. "할머니 육십 대 아니세요? 육십 대 초중반 같으신데요?" 그러자 할머니께서 내 팔을 찰싹 때리시며 호탕하게 웃으셨다. "내 나이가 벌써 팔십 여섯인데!" 나는 할리우드 액션을 선보이며 "정말 그렇게 안 보여요."를 반복했다. 할머니는 꽃을 한 아름 선물 받은 소녀처럼 기뻐하셨다.
혼자가 되신 할머니를 보며 '먼 훗날 나나 혹은 남편이 혼자가 된다면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적하지 않으시냐 물었지만 할머니께선 그저 할아버지의 술 사랑에 대해서만 언급하실 뿐이었다. 노년 부부의 사랑이란 무엇인고 배우고 싶었지만 도저히 답을 내릴 수 없었다. 할머니는 잠시 함께 공원 의자에 앉자고 청하셨다. 하임이는 무릎에 앉아 얌전히 대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도란도란 말동무를 하던 우리는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회 되면 나중에 또 봬요. 할머니. 건강하세요." 잘 가시라는 나의 인사에 할머니께서 뜻밖의 마지막 말씀을 건네셨다.
"그런데 있잖아.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맛있는 음식 만들어 주고 할아버지 좋아하는 술안주 만들어 주는 재미로 내가 여태 살았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난 그때가 제일 좋았다." 그때가 가장 좋았다는 흔한 한 마디가 어찌나 애틋하게 사무치던지. 할머니의 꾹꾹 눌러 담은 진심은 내게 오래 남을 따스한 교훈이 되었다. 돌아보면 가장 좋을 날이, 가장 많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때가 바로 지금임을 망각하지 않으리라. 그날의 여운을 가슴에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