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가진 능력 중에 가장 부러운 것이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자는 수면 능력이었다. 잘 자라는 인사를 나누고 몇 초가 지나면 금세 잠들어 있는 남편을 보면서 너무나 신기하고 부러웠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나도 남편처럼 쉽게 잠들기를 바랐지만 아까운 시간만 흘러가고 마음은 복잡해지는 저녁을 맞는 때가 많았다. 늦은 저녁 시각 나의 수면을 방해하는 것은 대체로 인간관계에 관한 상념과 고심이었다.
‘그 사람이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혹시 오해한 걸까?’ 하루 동안 있었던 복잡한 일들, 날이 선 이의 언행 등이 떠올라 잠이 달아나기 일쑤였다. 수많은 생각 풍선들이 침실 위를 두둥실 떠다녔다. 내일은 이렇게 말해야지, 저렇게 노력해 봐야지 계획을 세우다가 새벽을 맞는 일도 잦았다. 숙면의 대가 남편에게 이런 고민거리를 털어놓으면 항상 경청하면서 내게 같은 선상의 조언을 건넸다.
내버려 둬.
그냥 무시해 버려.
그러라 그래.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해.
어차피 우리한테 중요한 사람도 아닌데 신경 끄자.
상대방 태도가 그 모양인데 어떻게 무시를 하냐고 말만 참 쉽다는 생각이 들어 종종 발끈했다. 때론 무심하고 성의 없게 느껴지는 남편의 조언이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어차피 내게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진심을 짜내면서 아등바등거리는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점이 되어 버릴 그저 스쳐가는 사람에게 내 시간과 마음을 쓰면서 현재의 행복을 놓치면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 인간은 지금 나를 떠올리지도 않고 본인의 시간을 즐기고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니 나 자신이 바보 같고 억울했다.
나도 남편처럼 단순하고 쿨하게 생각하고 싶은데 과연 그게 가능할까. 아무래도 어려울 것이라는 약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찌 됐든 흉내라도 내면서 닮고 싶은 점을 내 것으로 만들어 보기로 결심했다. 심리 공부도 하고 관련 도서도 많이 읽으면서 나를 더욱 알아갔다. 때때로 스스로를 검열했고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땐 남편에게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그가 진심으로 건네는 조언을 곡해하지 않고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그 결과, 노력한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머리만 대면 잠드는 나를 보면서 (장소가 우리 집일 경우임) 남편이 몹시 놀라워했다. “이젠 나보다 더 잘 잔다니까.” 건강한 마음이 신체를 지배하는 놀라운 변화를 겪으면서 어찌나 신바람이 나던지. 나는 본래 소심하고, 생각이 많고, 잠도 잘 못 자고,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런 것도 노력으로 되다니!
나만의 노력으로 됐다기보다는 안정적인 버팀목의 역할을 해주는 남편의 도움이 컸다. 늘 한결같은 태도와 사랑으로 곁을 지켜주는 남편의 덕이 팔 할은 족히 된다고 본다.
다소 힘든 일이 있어서 잠이 오지 않는 날이면 걱정의 늪에서 헤어 나오려고 힘차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단순하고 유치한 절차이지만 그런 행동이 도움이 되어 과거에서 빠져나와 현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수면의 질이 상승되었다는 건 심리가 안정되고 편안해졌음은 물론 삶의 질이 올라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남편의 조언 중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두 가지였다.
“그러라 그래.”
남의 생각과 태도는 남의 것이니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권리는 타인의 것이었다. 내게 크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이라면 불친절하고 퉁명스럽고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대는 사람라도 ‘네 도끼눈과 못 배운 행동거지는 네 것이니까 네 마음대로 해라.’ 생각하고 선을 긋는 연습을 했다.
누군가 나의 뒷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 “친하지도 않으면서 왜 나에 대해서 아는 척이래? 실컷 이야기하라고 해. 대신 앞에서 하다가 걸리면 죽을 줄 알아.” 하고 쿨하게 넘겨버렸다. (쿨한 게 아니라 무서운 건가? 하하)
“어차피 내 인생에서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이잖아?”
모두와 잘 지내려는 노력을 내려놓았다. 나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려고 애썼던 박애주의에서 벗어나서 내 그릇만큼만 남을 포용하기로 했다. 살면서 함께 갈 사람과 단발적인 관계로 끝이 날 사람을 구분하니 나의 노력과 에너지를 효용적으로 배분하면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너무 많은 노력과 주의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거리를 뒀다. 거리를 두는 것에도 결단과 용기와 노력이 필요하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산과 강이 변해도, 내가 멀리 이사를 가거나 환경이 변해도 함께 갈 사람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이 점이 오히려 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많지는 않아도 깊고 소중한, 미니멀한 인간관계가 나에게 훨씬 잘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깜냥도 안 되면서 모두를 이해하고 아우르기 위해 노력했던 지난한 시간들을 돌아보니 그것은 거의 자기 학대였다.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아무리 노력해 봤자 곁을 내어주지 않는 사람들, 결이 맞지 않아서 함께하면 즐겁지 않은 사람들은 과감히 정리했고 대신 마음에 쉴 공간을 얻었다. 덤으로 새로운 관계를 받아들일 건강한 마음 밭을 일굴 수 있었다. 한땐 어벤저스의 능력처럼 느껴졌던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잠드는 숙면 능력을 드디어 갖게 되었으니 미니멀한 인간관계도 지금의 나도 만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