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을 앞두고 교통사고를 당했다.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팔다리가 저리고 통증이 심해서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교통사고 후유증을 알아보다가 새벽에 겨우 잠들었다. 짧은 기도로 생일 아침을 열고 부랴부랴 출근 전쟁에 돌입했다. 버스에 몸을 싣고 일찍이 도착해 편의점에 들러 두유 한 팩을 마셨다. 단출한 아침 요기를 마치고 출근 시각 십 분 전 사무실로 들어가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역시 소수정예로 단 두 명의 팀원들만 인사를 받았다. '인사 좀 받아 주면 어디 덧나냐.' 생수로 씁쓸함을 달래고 직장인 모드로 돌입. 생일이란 사실을 잊고 일하다 급식을 먹으러 갔는데 미역국이 나왔다. 그다지 맛있는 미역국은 아니었으나 반갑고 기뻤다.
오후 두 시쯤이었을까. 아픈 몸의 한계를 체감했으나조금도티 내지 않았다. 어차피 알아줄 사람도 없으니까.오픈런처럼 이어지는 통화 대행진.
"작년부터 쭈욱 통화했던 담당자에게 확인할 사항이 있어요." 담당자의 성함을 알려 달라고 하자 이름이기억나지 않는다는 민원인. 유사 업무를 수행하는 타기관의 연락처를 안내했으나 실패. 나는 권한이 없는초단기 행정 체험 인턴일 뿐인데 응대해야 하는 민원의 깊이와 범위가 너무 방대했다. 팀에 공석이 생긴 상황이기도 하고 내키지 않았지만 마냥 민원인을 기다리게 할 수 없으니옆자리 공무원에게 전화를 돌려줬다. 전화벨이 울리자 옆 자리의 그녀가 받아야 하는 전화는 받지 않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채근하기 시작했다. 민원인은 계속해서 통화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 전화 돌린 거예요?"
"네."
"저한테요? 왜요?" 잡아먹을 듯한 표정을 짓는 그녀. 어린 친구가 참 무섭다.
"요양 시설 직원분인데요. 작년부터 통화했던 직원이 있다고 좀 바꿔달라고 하셔서요."
"그게 저예요?"
"담당자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신다고 해요. 다른 곳 안내해 드렸는데도 직원을 바꿔달라고 하시네요."
"그 사람이 누군데요? 뭐 때문에요. 근데 왜 저한테 전화를 돌리세요?" 하아. 낸들 아니? 입씨름할 시간에 전화받고 처리까지 끝냈겠다.
"민원인이 팀 내 담당자를 바꿔달라고 재차 요청하시면 저도 별 수가 없어요."
같은 사무실 내에서도 더없이 친절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종전 일하기를 싫어하고 업무를 폭탄 돌리기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딜 가나 흔한 광경이지만 해야 할 일을 회피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보면 많이 안타깝다. 그들의 냉대와 눈치로 인해 어떻게든 내 선에서 모든 걸 처리해 보려 고군분투하는 나도 딱하다.
그저 몇 개월 행정 체험 직분으로 온 내게 출근 첫날부터 과중한 업무가 주어졌다.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면 부재중 전화가 13건씩 찍혀 있는 내 자리의 전화기. 심지어 통화 중에도 부재중 전화가 6건이나 쌓였다. 기관의 대표 번호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내가 답할 수 없는, 직무에서 벗어나는 질문도 줄기차게 이어졌다.그래도 열심히 도우면 그들이 조금이라도 고마운 마음을 가질 줄 알았다. 멍청한 착각이었다. 나는 목이 쉬도록 전화를 받는데 어째서인지 그들은 한가해 보였다. 옆에서 과자를 먹고 수다를 떨며 나보다 훨씬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말단 사원, 나는 말.말.단 인턴이다 그건가. 고생한다는 인사치레는커녕 점심시간이 한참 남은 시간에 홀로 남아 전화를 받기도 했다.
이따금질문을 하면 "그걸 왜 여기다가 물어본데요?", "엥? 잘 모르겠는데요." 혹은 못 들은 척이 기본값이고 단 한 번이라도 업무를 매끄럽게 이어받는 법이 없어 난감했다. 옆자리의 그녀는 내가 오자마자 일주일 동안 휴가를 떠났고 백지상태였던 나는 포털 사이트 검색에 여러 서류를 뒤져가며 긴장 속에서 일했다. 폭염에 사무실 에어컨 고장으로 땀을 뒤집어썼지만 친절하게 민원인을 응대하고 열심히 메모하며 일을 배웠다. 옆 사람이 휴가를 갔기 때문에 일이 그렇게 힘든 줄로만 알았는데 또한 나의 착각이었다. 그새 업무에 익숙해진 내가 어쩌다 해결되지 않는 난관에 부딪쳤을 때 그들이 원하는 건 오로지 내 선에서 전화를 끊어내는 것이었다. 끈질긴 민원에 도움을 요청해야 할 때 흔쾌히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팀원 모두가 반복되는 업무에 지쳐 있음을 안다. 그렇기에 이 땅의 악성 민원과 갑질이 근절되길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그들 또한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게 갑질을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그곳을 나서는 순간 나 역시 그들의 민원인이 된다. 사람은 돌고 돌아 만난다는 게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아직은 배움이 고팠던 청년이기에 행정 체험 인턴에 도전했는데 그들은 나를 그저 돈이 고픈, 휘뚜루마뚜루 쓰고 버려도 되는 짧은 인연으로 받아들였나 보다.난 아쉬울 게 전혀 없는데 말이다. 진심으로 도움이 돼 보려 했지만 교통사고 후유증을 참아가며 그 많은 민원 전화를 받아 줄 필요를 더는 찾지 못하겠다. 어쩌다 한 번씩 생기는 전달 사안에도그렇게나 불쾌함을 표출한다면 누가 그들과 함께 일할 수 있을까.자기의 일과 복은 결국자신이 만들어 나가는법. 내가 바라는 건 인턴 나부랭이에게 베푸는 친절이 아니라 각자의 의무를 이행하는 정상적인 일터였다. 짧은 시간 동안 감사한 인연도 만났지만 작은 것 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몇몇 사람들의 꼬인 심성이안타깝다. 그렇게 사는 본인은 또 얼마나 힘이 들고 괴로울꼬. 내일은 회사 말고 병원으로 출근하겠다는 연락을 마쳤다.민원보다 더한 사내 감정노동을 해고하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