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거래에 단골로 사용되는 문구가 있다. “예민한 사람 사절입니다.”, “한두 번 사용했고 생활 흠집 있습니다. 예민한 분은 피해 주세요.” 나 역시 이 문구를 사용한 사람에게 요거트메이커를 구매해 본 적이 있는데 도무지 ‘한두 번 사용했다’라는 말이 믿기지 않을 만큼 역한 음식 냄새에 흠집이 많은 물건을 받아 들고 적잖이 당황한 경험이 있다. 플라스틱이 두부도 아니고 한두 번 사용만으로 어찌 그런 상태가 됐을까? 구매한물건은 결국 사용하지도 못했지만 이보다 씁쓸했던 건 ‘예민한 사람 사절’이라는 문구였다. 여전히 '예민'이라는 말은 오남용 되고 있다!
한자어 ‘예민(銳敏)’에는 ‘날카롭고, 민첩하고, 재빠르고, 영리하다’라는 뜻이 담겨있다. 그렇기에 “예민하다.”라는 말이 그저 성격적으로 까칠한 것, 타인의 단점을 칭할 때만 통용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몇 년 전에 미용실에서 염색을 하다가 난감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 염색약을 바르고 기다리던 중이었는데 그날따라 눈이 너무나 맵고 두피도 화끈거렸다.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꾹 참고 견뎠는데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나는 미용사분께 증상을 설명했다. “어머. 정말이네!? 두피에서 열감이 엄청나게 올라오고 있어요. 일단 머리를 감아야겠네요.” 급하게 머리카락과 두피를 헹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연신 참다가 혼쭐이 난 내게 미용사분이 말씀하셨다. “예민한 편이신가 봐요.”
에? 셀프 염색은 물론 날짜가 한참 지난 샴푸를 사용해도탈이 없던 나였다. 염색이 제대로 되지도 않았으나 제값을 결제한 후에 인사를 꾸벅하고 미용실을 나왔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초면의 미용사가 “예민”이라는 단어를 언급했을 때 나의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예민함은 좋은 성격과는 거리가 먼 성향처럼 느껴져서 항상 무던한 척 연기하고 나다움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그렇게 애쓰며 살다가 번 아웃이 되었을 때 비로소 나의 예민함을 인정하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느끼며 사는 나를 표현하기에 “예민”보다 적합한 단어가 또 있을까.
“이 샤워기 좋은 것 같아. 어때?” 성능이 뛰어난 샤워기를 구매하고 싶다던 친구가 나에게 제품 홍보 영상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런데 내 눈에는 샤워기 헤드 아래로 뚝뚝 새는 물줄기가 소나기처럼 보였다. “샤워기 헤드 아랫부분에서 물이 샌다. 물 낭비가 엄청나겠는데?” 그러자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와. 너 진짜 신기하다. 단 몇 초 만에 그걸 발견하냐?”
옷을 살 때도 마찬가지. 남들은 발견하지 못하는 부분이 내 눈에는 훤히 잘도 보인다. “야. 이 옷 어때? 예쁘지?” 하고 묻는 친구에게 나는 “소매 부분에 올이 풀려 있어. 새 옷 받아서 확인해 봐.”, “밑단에 얼룩이 있는데 괜찮겠어? 새 상품 있는지 여쭤봐.”라며 사장님 몰래 귀띔을 할 때도 있다. 이런 이유로 하자 없는 물건을 사기 위해 나에게 확인을 요하는 지인들이 많다.
단 몇 초 만에 느껴지는 것들이 남들에게는 띄지 않는 것이 참 희한하다. 남들 눈에 내가 신기하게 비치는 것처럼 나도 내가 훤히 보는 것들을 보지 못하고, 내 귀에 뚜렷하게 들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신기하다. 같은 장소에 함께 있는데 내 귀에만 들리는 소리, 내 코에만 맡아지는 냄새들이 간혹 원망스러울 때도 있다.
우리 집 반려견과 거의 같은 속도로 현관문의 소리에 반응하고 아빠가 몰래 피우고 온 담배 냄새도 지독하게 잘 맡는 나. 예리하고 예민한 습성 덕분에 가족들은 나를 이렇게 부른다. “사냥개”, “소머즈”, “피콜로” 그렇다. 나는 육백만 불의 감각을 가진 존재다.
예민한 사람들은 물론 남들보다 힘들게 산다. 몸의 감각들이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몸과 정신에 피로를 자주 느낀다. 날카로움을 잘 다룰 줄 아는 예민한 사람이 되는 것은 나의 오랜 과제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가장 먼저는 말을 아끼는노력을 하고 있다. 타인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굳이 나만 알고, 나만 느끼는 것들을 일일이 전달하지 않는다.
나는 아주 무던한 사람보다는 조금은 예민한 사람이 좋다. 날카로움을 잘 다를 줄 아는 예민한 부류의 사람들은 특히 나와 통하는 바가 많다. 내가 느낀 것들을 공유할 때 “난 전혀 몰랐는데?”라는 의아함보다는 “너도 느꼈어!?”라는 공감이 반갑다.
나도 남들처럼 덜 듣고, 덜 느끼고, 에너지를 덜 쓰면서, 덜 피곤하게 살고 싶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감각은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타고 나는 특성이라고 하니 잘 구슬리며 데리고 사는 수밖에. 신이 나를 이렇게 빚은 데에는 다 그럴 만한 목적과 이유가 있음을 믿는다.
나와 달리 내 짝꿍은 예민과는 매우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는 여전히 무던하지만 나를 닮아 전에는 못 느끼던 것들을 알아간다. 하늘을 좋아하는 나와 함께 예쁜 노을과 달을 감상하거나, 형광등을 훤히 켜놓고 자던 남편이 이제는 보조 등도 거슬린다며 “불 좀 꺼줄래?”라는 요구도 한다. 그러면 나는 “어머. 예민하시네요!” 하고 깔깔 웃는다. 그가 나를 닮아가는 모습을 볼 때 흥미롭고 신기하다. 나 역시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짝꿍의 무던함을 배워가고 있다. 서로에게 적당히 물들어가고 맞춰가면서 사는 것이 행복하고 재미있다. 앞으로도 무던한 사람의 장점을 부러워하고 예민한 사람을 반가워하면서 나는 그렇게 살아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