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떨어진 길에서 우연히 지인을 만났을 때 ‘인사를 해? 말아?’ 고민하다가 못 본 척 지나칠 때가 많다. 눈이 딱 마주치지 않는 이상거리 계산까지 하며핸드폰을 만지는 척, 딴 데 보는 척 연기를 한다. 심지어 꽤 친한 지인을 발견했을 때에도 쉽사리 아는 척하지 못하고어벌쩡거리다가 인사할 타이밍을 흘려 보낸다. 오래전부터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나의 성향인데 혹시 대인 기피증이 아닐까 의심도 해보았고 내가 이 정도로 내향적인 인간인가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높은 확률로 후자의 이유 때문에꼭꼭 숨는 어리숙한 태세를 취하는 것 같다. 이런 행동을 함으로써 지인에게 이미 마음의 빚을 지게 되는데 말이다. 내가 먼저 상대를 큰 소리로 부르거나 달려가서 아는 척을 했다?십중팔구 상대가 내 가족인 경우다. 친척 말고 가족!
“길에서 지인을 봤으나 못 본 척하고 지나칠 때 서로가 알았을 확률이 80% 이상이다”라는 글을 읽었다. ‘이렇게나 높은 확률로 눈치를 챈단 말이야?’ 퍽이나 재미있는 이론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농으로치부했다. 그러면서도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앞으로는 어설프게 연기하지 말고 인사를 잘해야겠다.’혹은 ‘더 열심히 못 본 척을 해야겠다.’ 어리석게도 나는 후자를 택했고 무방비 상태로 지인을 스쳐 지나갈 때면 골똘한 생각에 집중하는 척 연기하고 심지어 방향을 틀 때도 있었다.서로 멀찍이 있어 그도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전제하에 그런 행동을 일삼았는데 내가 여태 얼마나 부끄럽고 엉뚱한 짓을 해왔는지 깨닫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평소 내가 좋아하던 동생이 열 걸음 정도의 거리에서 그녀의 지인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횡단보도를 부산하게 건넜다. 나는 통화 중이었고 (실로 통화 중이었음) 그녀는 친구와 이야기하는 데 여념 없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나는 상대를 보았으나 상대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그냥 내 갈 길을 갔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녀를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사실 역 부근에서 널 봤었는데. 네가 친구랑 이야기하면서 지나가더라.” 툭 하고 말을 던졌다. 그런데 동생이 “저도 언니 봤어요.”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아닌데. 넌 분명히 나를 못 봤는데.’ 나는 깜짝 놀라서 그날의 장소와 상황을 설명하며 그때 나를 본 게 맞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똑부러지는 목소리로 하는 말. “네. 거기 앞에서 언니 본 거 맞아요. 언니 예쁘게 차려입고 바삐 지나가던데. 무슨 약속 있었어요?”
와우. 이게 무슨 초능력인가. 우린 눈길조차 주고받지 않았는데 서로를 똑똑히 보았고 심지어 옷차림까지 기억했다. 여우주연상감 연기를 선보였지만너도 나를 봤고 나도 너를 보았다. 어쩌면 여태 모르는 척 지나친 많은 친구, 선배, 동생등태반이 나를 보았으리라. 이제껏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처세술을 부려왔는지 깨닫는 계기였다. 넓은 시야를 가진 것이나의 주특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다들나만큼 곁눈질의 달인이었다.그들이 여태 어색하게 연기하는 나를 눈감아줬다는 생각을 하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무리 못 본 척 지나치더라도 이미 80%의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알아챈다는 말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논리일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자 다짐했건만 몹쓸습관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 부부가 함께 알고 있는 지인이 길 건너편에 서 있었다. “어? 민준이 형이다.” 남편이 지인을 발견했는데 나는 또 부끄럼 병이 도진 나머지 목소리를 낮추고 어깨를 움츠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쉿. 이쪽 봐. 이쪽. 그쪽 쳐다보지 마.” 남편은 당황하며 “응?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니. 남편의 물음에 민망함은 두 배가 되었다. “난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누군가랑 인사하는 게 너무 어색해.”남편은 놀랍게도 “무슨 느낌인 줄 알아. 내성적이라 그래.” 하고 자연스럽게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이렇게 생난리를 피우며 메서드 연기를 할 바엔 그냥 인사를 하는 게 여러모로 편하고 좋을 터. 생각은 이렇게 하면서도 자꾸 어리숙하고 용기 없이 대처하는 나를 누가 말릴까.
한 번은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한 채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못 본 지가 오 년은 족히 된 지인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멀찍이 서 있었고 나는 겨우 눈 두 개만을 드러내고 있는 행색이었다. ‘인사하기엔 너무 어색하잖아. 나를 알아보기나 하겠어? 이번엔 진짜로 모르는 척해도 돼. 안전빵(?)이야’ 여유로운 마음으로 녹색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새 성큼 다가온 그가 내게 말을 걸었다. “누나. 안녕하세요.” 하악. 깜짝이야. “어머. 너구나!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놀란 나는 오버하며 인사를 받았다.
이쯤 되면 모르는 척하고 지인을 지나칠 때 서로를 알아볼 확률이 99% 정도는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여태 모르는 척 지나친 나의 지인들 정말 미안합니다. 의외로 제가 많이 내성적입니다." 앞으론 아는 사람을 발견하거든 어설프게 피하지 말고 인사를 잘해야겠다. 나를 봤을까, 못 봤을까 생각하는 순간 그는 이미 어색해하는 분위기마저읽었을 터.
인사할까 말까 망설여질 땐 침묵을 깨고입을 열자. “안녕! 오랜만이야.”, "안녕하세요."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훤히 보이는 상황에 어리석은닭처럼 내 눈빛만 숨긴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니다.겉으로는 누가봐도 외향인이지만 인사 한 번에도 제법 용기가 필요한 나.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와서 여전히 종종 걸음으로 살 것이냐, 훌륭한 날갯짓으로 활동 반경을 넓힐 것이냐는내 선택에 달려 있다.
아는 캐릭터의 존재감: '인사 해 말아? 날 발견했나? 아나야. 분명 아무도 나를 못 봤을 거야... 옷도 어두운 색 입었고 조용히 있었잖아.' -사진 출처: 미세스쏭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