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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십 년 후에 돌아왔어요.

by 안나B

우리가 살고 있는 마리나에는 9개의 보트가 세워져 있다. 그중 가장 최근에 새로 들어온 보트에는 오십 대 중후반은 족히 되어 보이는 폴란드인 부부가 살고 있다.


밖에서 보트를 청소하고 있자니 남편인 J가 이 때다 싶어 기회를 놓지 않도록 재빨리 걸어오는 게 눈에 들어온다. 180cm는 족히 넘는 키에 작지 않은 몸집은 굳이 얼굴을 들어 보지 않아도 시야에 잡힌다. 몸의 크기에 대비해서 상대적으로 작은 잔에 독주를 잔뜩 담고 와서 훌쩍훌쩍 마시며 대화를 시작한다. 오후 2시에 시작되는 대화에 빠지지 않는 독주는 마치 에스프레소처럼 정신을 차리기 위해 마셔야 하는 마법의 드링크처럼 보인다.

그 부부는 십 년도 더 전에 밴쿠버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캘리포니아를 거쳐 멕시코 갔다가, 다시 캐나다 서부로 돌아오는 일정으로 세일을 시작했다고 말하며 바다 쪽을 무심히 바라보는 J의 얼굴에서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 후에 이어진 말은 예상 밖이었다.


그게, 우리는 멕시코로 가지 않았어. 대신에 하와이로 향했지. 더 가까웠고 더 재밌을 것 같았거든.


하와이에서 다시 밴쿠버로 돌아와야 했지만 그때도 계획을 무시하고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여 타히티로 배를 향했다고. 허허 웃으며 말을 하는 그의 눈빛에는 십 년 전 대담하게 저질렀던 여행의 시작이 아늘 하게 비쳤다.

그가 캐나다 서부로 돌아오기 전의 마지막 종착지는 프렌치 폴리네시아에 위치한 통가였다. 잠시 머물다 가려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들은 그를 이방인으로 있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십 년을 보내고 가족이 되어버린 섬사람들을 떠나기는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고 말끝을 흐리는 그에게서 그리움이 절절히 뿜어 나왔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밴쿠버로 돌아왔다고 말하는 저 멀리 시선을 돌리는 J. 그의 눈 끝에는 그가 사랑했던 통가가 있었다.


J가 사랑하던 통가는 어떻게 그의 눈에 담기고 그의 마음에 남았을까.


코비드로 인해 제약이 많아 밴쿠버에 왔지만 백신을 맞고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간다면 바로 배를 남쪽으로 향할 거라며 말을 끝냈다.


과거를 회상하는 그의 눈빛은 더 이상 꿈을 그저 꿈으로 남기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보트를 타고 세계를 보고 싶다는 우리의 꿈이 현실이 되어 나도 J처럼 내가 다녀왔을 곳을, 그리고 갈 곳에 대해 끊임없이 풀어내고 싶었다. 나도 내 잔에 독주를 더 따르기 시작했다. 오후 네시, 우리는 독주에 취해, 과거에 취해,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미래를 흥분하여 계속 잔을 맞대었다.



아내가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 되었다며 돌아갔던 J가 갑자기 부리나케 돌아와서 말을 이었다. 밴쿠버를 떠나기 전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보트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지금 T가 이 보트에 살게 된 지 5년이 되었으니 필시 그전 두 명의 주인중 한 명이었으랴. 우리 삶의 전체가 된 우리 보트의 이전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니, 새삼스럽게 보트의 나이가 실감 났다. 그리고 돌고 돌아 만날 사람은 결국 다시 만난다는 인연의 기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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