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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B Nov 28. 2020

남자 친구 말고, 인생의 동반자

고작 4번째 만남이었다. 그 날, 만나자고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다. 몇 번 문자를 주고받던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오늘 만날까요?"라고 물었다.


나중에 그가 말하길, 다른 소개팅이 잡혀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만나지도 않은 사람에게 기대를 가지기보다, 이미 관심이 있는 나를 만나 결정을 짓고 싶었다며 멋쩍었던지 웃었다.


만나기로 한 펍에 도착해 호스트의 안내를 받으며 찾은 테이블에는 T가 이미 앉아있었다. 인사를 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문자로 열렬하게 관심을 표현한 것에 비해 실제로 얼굴을 맞이하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어색함이 우리를 감싸는 동안에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T도 나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는 점. 눈은 점점 초승달처럼 얇아지고 입꼬리는 살살 올라가고 있었다. 입꼬리가 최대한으로 올라가자,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편안해졌다.


한참을 웃던 T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T가 무슨 말을 할지 상상도 못 한 채로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T는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난 네가 나만 만났으면 좋겠어."


주저 없이 스트라이크를 날렸다. '사귀자'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았지만, 명백히 '오늘이 1일이야.'라고 선을 긋는 말이었다. 조금씩 닳아 오르는 열기를 볼에서 느끼며, 나는 이미 다른 사람을 만날 생각이 없었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우리는 공식적으로 연인이 되었다.


사랑을 쌓는 방식은 사랑 할 때마다 다르다. 당시의 상황, 상대방, 주변의 반응 등 여러 요소가 버물러지며 탄생한다.





T와의 연애는 사뭇 달랐다. '오늘이 1일이야'를 시작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만났다. 일이 끝나면 만나서 저녁을 먹고 다음 날 출근을 하면서 헤어졌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다시 만났다.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이면 함께 보내는 게 당연했다.



누구와 이렇게 자주 만난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보면, 서로에게 관심이 생기고, 몇 달이 걸려 연인이 되었다. 여자 친구/남자 친구의 호칭을 가지되, 만나기 전의 생활이 완전히 변하지는 않았다. 연인이 되면 전화를 통해서 만나지 않을 때 생긴 일을 공유하며 일주일에 한두 번에 하는 데이트로 관계를 유지했다. 그에 비해 T와의 만남은 뭐, '사귀자'라는 말이 '같이 살자'가 되어버렸다. 같이 보낸 시간으로 따지면, 만난 지 두 달만에 최소 일 년은 함께한 연인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공간이 있다. 나는 고양이 두 마리와 콘도(한국식 저층 아파트)에 살고 있고, 그는 고양이 한 마리와 살고 있다. 그의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면, 다음 날은 우리 집에서 지내는 것으로 장소만 바뀔 뿐, 그가 내 일상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동일하다.


일을 할 때 종종 T가 생각나지만 그리워하지는 않는다. 몇 시간 후면 다시 함께가 될 것임을 알기에,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해서 안달 나는 초초함이 이 관계에는 없다. 가족이 주는 안정감을 연인인 T에게서 받는다.



T와의 연애가 기존 연애와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인 건, 조금이라도 시간을 낭비하기 싫어서 일까. 아니면 연애, 결혼 그리고 이혼을 통해 상대방에게 바라는 점이 선명해져서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은 걸까. 어쩌면 둘 다 해당되는 걸지도.


T와 나는 연인이 맞지만 남자 친구라는 명칭으로 부를 때면 언제나 마음 한켠에 아쉬움이 남는다. 연인보다 더 가까운 우리. 나는 T를 보통 이렇게 부른다.


‘일생의 사랑

혹은 인생의 동반자’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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