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D의 봄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파는 건 MD의 일

by 김현호

여기저기 꽃이 피었다. 큰일이다.


우박이 몰아치고, 여전한 꽃샘추위가 발열내의를 찾게 만들지만 남쪽 동네의 꽃 소식은 봄이 왔음을 실감하게 한다. 이때 우리네 MD의 마음은 조급해진다. 사람들이(나도 물론 포함이다) 가벼운 옷을 찾기 시작했기 때문. 나름 적당한 구색의 봄 옷은 이미 준비했지만, 고객이 장바구니에 무엇을 담을지 늘 미지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는데 생면부지 고객의 마음을 어찌 알까. 그래도 이만하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변명은 MD에게 통하지 않는다.


김연수 작가는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라 말했다. 우리네 MD는 이렇게 말하겠다, '파는 건 MD의 일’이라고. 어떻게든 팔아야 한다(물론 준비된 좋은 물건을). 허나 고객과 MD는 건너기 힘든 아득한 심연을 사이에 두고 있다. 그 심연 안에서 빛 없이 감각을 벼렸던 심해어魚처럼 자유롭게 헤엄치고 싶을 뿐이다. 그게 안 되니 앞이 깜깜할 따름. 자신의 뇌를 먹어버린 멍게처럼 뭉툭해진 감각을 가진 나란 MD는 그저 이 시린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벌컥이는 봄이다.


속이 싸한, 봄, 아침이다. 그나저나 볕은 참 좋다고 느끼는 게 다행인 부분이겠다.


비단 MD만 겪는 일은 아니겠다만, 우리네 일은 불확실성과의 싸움이다. 익숙한 일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이쁘디 이쁜 옷들 중 어떤 옷이 고객의 품에 안길까, 같은 옷인데 왜 저 편집숍에서 살까, 나라면 어디서 옷을 구입할까 등등. 확인이 불가능한 물음만 머릿속에서 부유하는 매일이다. 정확한 의견을 제시하고, 세밀한 계획 하에 움직이는 일은 일일 아침 드라마 기획팀 실장님만이 가능한 일이다. 김치 싸대기가 현실과 거리가 먼 것처럼, 알파고 같은 예측은 현실에서 그저 요원하다. 지리한 물음과 알 수 없는 숫자, 민들레 홀씨처럼 사방으로 휘날리는 업무에 납작하게 눌린 채 오전을 보내고 점심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아기다리고기다리던 그 점심시간. 식사를 마치고 팀원과 이런저런 떠다니는 대화를 나누며 무심히 창 밖으로 던진 시선에, 봄은 이미 마중 나와 있었다. 괜히 엉덩이가 들썩인다. 나가자. 뻔한 비타민 음료 하나씩 손에 들고 나와 기어코 와버린 봄을 살짝 누렸다. 서서히 다가오는 봄, 이 시간만은 걱정을 하지 말기로 하죠? 아직 바람은 차지만요.



“운명의 집요한 가혹함에도, 인간이란 언제나 날씨가 화창할 때면 희망을 품기 마련 아니겠는가?”

- <여자의 일생>, 기 드 모파상



가뿐히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하얗게 질려있는 모니터를 바라봤다. 검은 숫자들이 꽃잎 휘날리듯 평면의 모니터 안에서 휘날린다. 눈이 어지럽다. 마음도 그렇다. 그러다 문득, 지난밤 침대 모서리에서 읽은 모파상의 말이 떠올랐다. 인간이란 언제나 날씨가 화창할 때 희망을 품기 마련이니까, 나도 한 번 품어봐? 다시 고객과 MD사이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 본다. 날이 좋으니 심연을 담은 바다에도 빛이 조금 들어오지 않을까.


고객의 마음은 미지수지만, 겨우내 준비한 옷은 봄 타는 고객을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오세요 고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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