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D의 계절은 간주 점프
막바지 더위가 한창이었고 그 무렵 가장 더운 날이었다. 내가 탄 기차가 터널을 빠져나와 햇빛 속으로 뛰어들자 내셔널 비스킷 컴퍼니 사의 뜨거운 경적 소리만이 정오 무렵의 숨 막히는 적막을 깨고 있었다. 객차의 밀짚 좌석은 열기로 거의 타버릴 지경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여자는 흰 블라우스를 입은 채 우아하게 땀을 흘리고 있다가, 손에 쥔 신문이 척척하게 젖어가기 시작하자 더위를 못 이기고는 절망적으로 처량한 소리를 냈다.
-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김영하 역
폭염 뉴스가 매일 귓가에 때려 박히던 여름의 일이다.
평양냉면 육수 같은 땀을 삐질삐질 쏟아내며 협력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커피? 녹차? 어떤 걸로 드릴까요? 그냥 시원한 얼음물이요. 42.195km 골인점을 앞둔 마라톤 선수가 물병 낚아채어 마시듯 냉수 한 사발 들이켜고 나서야 주변이 밝아졌다. 덥다. 더워란 말이 안녕하세요 보다 많이 쓰이던 여름. 징징징 안팎으로 열일하는 에어컨도 이런 폭염에 그저 날개 한 짝 잃은 선풍기 바람처럼 허무하게 느껴질 뿐이다. 긴 기장의 옷을 쳐다만 봐도 답답한 날. 가을 상품 샘플을 체크하러 왔다.
“이 트렌치 코트가 좋을 것 같네요.”
쳐다만 봐도 등에 땀띠 돋을 것 같지만, 오버사이즈 트렌치 코트 안에 내 몸을 기어코 밀어 넣어 봤다. 낙낙하게 떨어지는 핏, 적당한 기장감, 어느 코디와도 잘 어울리는 컬러, 단단한 박음질. 모두 맘에 든다. (참고로 이 트렌치코트는 여성용이다) 열기에 쩔어있는, 더위에 지친 나지만 선선한 가을에 이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을 내 모습과 고객의 모습을 상상했다. 등 뒤에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 같다. 시월 어느 날 오후 세 시쯤의 온도다.
옷의 구석구석을 체크한다. 옷을 만든 이와 판매를 책임질 이의 고양된 감정이 사무실에 가득 채워진다. 하지만 진짜 일은 지금부터. 만족스러운 옷을 확인했으니 이제부터 챙길 것이 많다. 상품의 수량, 생산 일정, 오픈 일정, 프로모션 방식, 사은품, 가격, 할인율, 수수료, 화보 일정, 모델, 방송 일정 등등. 상품이 세상에 나와 고객의 손에 닿기까지 거쳐야 할 단계가 산적하다. 가시 많은 생선의 살 발라내듯 중요하고도 사사로운 작업이다.
일정
이 샘플로 바로 생산 가능할까요, 원단 재고는요, 생산 기간은 얼마나 걸릴까요, 저희 센터(물류창고) 입고는 언제쯤 가능할까요, 1차 2차 나눠서 보내주시는 건가요, 1차 2차 생산 수량은 어떻게 될까요, 행사 오픈은 이때가 좋을 것 같아요, 노출 구좌는 이렇게 잡아볼게요. 대화를 되새기며 활자화하는 지금, 문장 끝에 굳이 물음표를 적지 않은 건 모든 문장이 물음표로만 끝날 것 같아서다. 어느 한 구석 놓치면 모두가 곤란한 상황. 그렇기에 서로 한바탕 물음을 끼얹는 것이 겸연스럽지 않다. 생산에서 입고까지의 일정을 살피고 고객에게 상품과 혜택을 보여주기 위한 행사 일정을 살폈다. 사무실 밖 파닥파닥 돌아가는 에어컨 외풍기처럼 머리가 미지근하니 달아오른다. 대략적인 행사 일정까지 픽스하고 나서야 조금 남았던 얼음물을 들이켰다. 어느새 얼음은 녹아 물과 아이스가 한 몸, 물아일체다.
가격
상품의 가격과 비용을 얘기하는 순간, 지루하게 늘어졌던 공기는 긴장감으로 다시 팽팽해졌다. 편집숍이 상품을 판매해 수익을 얻는 구조는 다양하지만, 이해하기 편하게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다. 위탁 판매와 사입 판매. 위탁 판매는 협력사의 판매를 대신해주는 구조다. 편집숍은 판매 대금의 일부를 수수료 수익으로 얻는다. 사입 판매는 편집숍이 협력사의 상품을 구입해 판매 대금 전부가 편집숍의 수익이 되는 방식. 쉽게 말하자면 물건을 사서 다시 파는 구조다. 이번 건은 사입 판매 구조. 조금이라도 좋은 조건으로 사입을 하기 위해 우리네 MD도 브랜드에 좋은 조건들을 제시한다. 서로의 직접적인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작업이기에 상대의 입에서 숫자가 던져지면 재빠르게 계산기 앱을 열어 이익을 계산했다. 오재미 던져 박 터트리는 운동회 때처럼 서로의 숫자가 한 지점을 향해 던져졌다. 팟. 어느 순간 박이 벌어지는 듯하더니 터지는 순간. 자 이렇게 하시죠, 네 좋습니다. 훈훈한 결말이다.
MD에게 계절은 늘 간주 점프다. 1절이 끝나고 2절이 흘러나오기 전, 연주되는 간주 들을 틈 없이 바로 2절이다. 여름엔 가을을, 아니 더 나아가 겨울을 맞닥뜨린다. 여름을 갈아 넣어 가을 상품을 준비했다. 이렇게 하나하나 모를 심어 두면 그 계절에 어느새 훌쩍 자라 있는 상품의 실체를 만나게 된다. 이때는 추수를 맞이하는 농부의 심정. MD는 지금 날씨에 어울리는 상품이 더 잘 팔리게 하기 위해 노출 구좌와 홍보, 프로모션을 준비하며 현재와 미래를 함께 살핀다. 영화로 따지자면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초속 5센티미터> 사이에 있다고 할까.
계절과 계절 사이의 틈바구니에서 김애란 작가의 책 <바깥은 여름>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 <바깥은 여름>, 김애란
작가의 말처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하는 일, 이게 우리네 MD의 일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