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D의 이중 생활

이중생활도 하기 나름

by 김현호

“현호님은 실제보다 글에서 좀 더 괜찮은 것 같아요.”


‘괜찮다’는 동료의 말에 칭찬인가 싶어 베시시거렸다가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칭찬인가 디스인가 잠시 머뭇. 생활의 밀도와 내가 썼던 문장들의 밀도의 다름이 황해안 조수간만의 차처럼 크게 느껴졌다. 현실의 나는 바닷물이 빠져나간 뻘 위의 삐쩍 마른 조개처럼 건조한 시선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저도 그 말에 동의하는 바입니다만. 생활은 라이브live고 글은 몇 번이고 쓰고 지웠던, 조금 더 정제된 모습이니 그럴만했다고 생각했다. 나 대신 책상 위 올려놓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잔 바깥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조금 미지근해졌다. 오늘따라 커피가 조금 짜다.


일상에서 이런 경험을 종종 만나게 된다. 맘에 드는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고 택배를 받았는데, 상품 소개와 손 안의 물건이 묘하게 다를 때. 메뉴판에서 가장 군침 도는 이미지의 메뉴를 골랐는데, 내 메뉴보다 그저 그런 이미지였던 옆옆 테이블의 메뉴가 더 맛있어 보일 때. 친구 결혼식 단체 사진 속 내 모습과 셀카가 상당히 다를 때 등등. 차이의 경험은 생활 속에서 개별적이며 동시에 전체적이다. 앞서 ‘차이’라 일컬었지만, 이런 일들을 ‘이중성’ 또는 ‘부풀림’의 사례라 부르는 것이 낫겠다.


이중성은 ‘하나의 사물에 겹쳐 있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을 뜻한다. 서로 겹쳐 있는 성질 중 괜찮은 성질을 꺼내 보여주는 것이 현대의 논리. 언급하지 않은 구석도 본질 속에 어느 정도 속해 있다. 단지 그 부분을 언급하지 않거나, 그럴듯하게 꾸몄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허탈감에 빠진다. 이중성 또는 부풀림. 포도 원액이 4% 밖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포도 주스라 부르는 것처럼, 어찌 되었든 언급된 사례들은 거짓이 아니다. 백장 찍은 셀카 중 하나의 인생 사진도 ‘나’라고 말하는 것처럼.


뚜세Toucher.

동료의 말은 유효 득점이다.(펜싱 용어입니다) 매끈하게 빠진 펜싱 검 끝이 상대의 타점 부위 안에 들어온 것처럼, 동료의 말은 내 타점 부위에 날렵하게 꽂혔다. 점수 인정. 동료의 말 덕분에 일상의 나와 글에서의 나의 차이와 이중성을 돌아봤다. 그리고 일하면서 위대한 작품을 썼던 작가의 이중생활 사례를 떠올려봤다.


보험 회사 법률 고문으로 일하며 <시골 의사>, <변신>을 썼던 프란츠 카프카, 프랑스 외교관으로 일하며 <하늘의 뿌리>, <자기 앞의 생>으로 공쿠르 상을 2회 수상했던 로맹 가리, 우체국 집배원으로 일하며 12년간 시를 썼던 찰스 부코스키 등등. 나는 ‘주로’ 일하고 ‘가끔’ 글을 끼적이지만, 일을 하며 바지런히 위대한 작품을 남기기란 얼마나 고단하고 우악스러운 일이었을까 싶다. 그들의 삶과 작품을 볼 때마다 물개 박수가 절로 나올 따름이다. 어찌 그리 대단하셨는지요.



원래 이 집주인은 무슨 일이고 남보다 잘하는 것도 없지만 무슨 일이든 참견하고 싶어 한다. 하이쿠를 한다고 <호토토기스>에 투고를 하기도 하고, 신체시를 <묘조>에 보내기도 하고, 엉터리 영어 문장을 쓰기도 하고, 때로는 활에 빠지기도 하고, 우타이를 배우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바이올린을 끼익 끼익 켜기도 하는데 딱하게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 그런 주제에 뭘 시작하면, 위도 좋지 않은 사람이 더럽게 열심이다.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쓰메 소세키



내 모습이 그렇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이 관심은 더럽게 많다. 고양이의 시선으로 인간 사회의 이면을 풍자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보며 뜨끔했다. 작품 속 묘猫 선생의 말 또한 ‘뚜세’. MD의 일, 하나만이라도 잘했으면 좋겠다만, 관심은 빛을 사방으로 쏘아대는 미러볼처럼 전방위다. 그렇다고 글을 기깔나게 잘 쓰는 것도 아니다. 사진을 찍는 일도, 강의도 마찬가지. 밀도가 낮은 일상에서의 모습보다 글이 조금 더 괜찮다는 동료의 말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이중생활도 내공이 단단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리라.


퇴근길, 글에서의 내 모습이 조금 더 괜찮다는 말에 생각의 포커스가 맞춰졌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조삼모사. ‘아침에 세 개는 너무 적다. 아침에 네 개를 달라!’고 외쳤던 고사 속 원숭이 같은 기분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글이라도 실제 나보다 나았다니 다행. 어리석음에는 약이 없다고 했다. 글을 쓰는 지금은 그저 더 잘 쓰고 싶을 뿐이다.다닥거리는 키보드 앞, 원숭이 같은 나에게 세 개든 네 개든 일용한 양식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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