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팅을 맞이하는 MD의 자세
신규 입점 브랜드 담당과 미팅을 하기로 한 날.
약속시간. 전화가 온다. 도착했다고. 잠시만요. 노트와 자료 주섬주섬. 안녕하세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커피 드시겠어요? 잠시만요.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네. 아아 두 개 주세요. 레귤러 사이즈로요. 영수증은 괜찮아요. 다시 미팅 테이블로. 다시 안녕하세요. 명함을 주고받았다. 명함을 본다. 주소가 쓱 보인다. 다시, 멀리서 오셨네요. 드르륵드르륵. 진동벨이 울린다. 잠시만요. 양손에 커피. 드세요. 나도 마신다. 마른 속을 조금 채웠다.
입점 제안 자료 잘 봤습니다. 좋더라고요. 저희 편집숍이랑 잘 맞고요. 예뻐요 옷. 디테일하게 브랜드 설명 좀. 브랜드연혁히스토리컨셉생산기간품목주력상품프로모션경쟁사PPL마케팅홍보가격타겟. 네 좋군요. 판매 수수료는 이렇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저희 편집숍에서는요, 판매대행기획전화보촬영영상촬영모바일라이브기획전인터뷰딜구성쿠폰프로모션방송노출잡지기사연계, 등등을 합니다. 괜찮은가요. 절차 진행되면 연락 주세요. 감사합니다. 기획전은 이 날 오픈하죠. 잘 부탁드려요. 잘잘하게 남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모금 들이킨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연락드리겠습니다.
난 온라인 편집숍 MD다.
온라인 편집숍은 실제 매장(오프라인)은 없지만 웹과 모바일 상에서 눈에 보이는 곳곳은 매장으로 취급한다. 내부에서는 온라인에서 보이는 탭 하나를 실제로 매장이라 부른다. MD는 그 매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하는 게 일이다. 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말. MD는 말이야 ‘모든 걸 다 한다’의 줄임말이야,란 말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이 말을 굳이 안 해도 되지만, 굳이 말했네요), 매장 운영의 모든 일을 다 한다. 간판은 잘 걸려있는지, 거리를 지나가는 고객들에게 매장이 잘 보이는지, 진행하고 있는 프로모션은 눈에 잘 띄는지, 매장에 먼지가 쌓이지 않았는지, 고객을 맞이하는 직원은 친절한지 등등. 실제 오프라인 매장의 운영 논리와 비슷하게 온라인 편집숍 운영 논리도 그에 따른다. 실행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 고객이 사고 싶게끔, 편하게 살 수 있게끔, 재미있게 구입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 우리네 일이다.
1969년 미 국방성에서 계획한 아르파넷ARPANet이라는 군사적 목적의 네트워크가, 내가 몸담고 있는 직업을 만들었다는 현대사史의 기술적 위대함에 다시 한번 감사. 인류사史에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자면, 원시시대 씨족 간 재화 교환에서 발달한 물물교환에서부터, 재화를 만들고 시장을 만들어 낸 인류에 또 감사. 따지자면 밑도 끝도 없는 감사한 인류의 위대한 업적 위에, 온라인 편집숍 MD라는 직업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업에 대한 감사함을 전하려다 보니 꽤 멀리 갔지만.
각설하고. 매장을 운영하려면 브랜드와 상품이 필요하다. 직접 상품을 기획하고 생산하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 브랜드의 상품을 위탁해 판매한다. 온라인 편집숍은 상품 판매의 창구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 일에는 수많은 브랜드와 협력사가 필요하다.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있는 이해관계 속에 꽤나 많은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 MD에게 미팅은, 아무리 애를 쓰고 운명에서 도망치려고 했으나 결국 운명을 따르게 된 오이디푸스처럼, 운명이다. 미팅을 하지 않는 MD는 있을 수 없다. 전화와 메신저로도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지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행동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온라인이란 환경에서 일하지만 오프라인에서 눈을 마주치고 만나는 일을 해야만 한다. 아날로그Analog. 이런 미팅은 참으로 아날로그스럽다 할 수 있겠다.
아날로그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슬픔과 기쁨, 고난과 희망을 챙겨서 간다. 디지털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곧바로 간다.
- <밥벌이의 지겨움>, 김훈
김훈 작가의 말처럼 슬픔과 기쁨, 고난과 희망을 챙겨서 미팅을 하진 않지만, 눈빛을 마주하는 미팅 자리에선 서로의 철학과 가치를 챙겨서 만날 수 있다. 각자의 정보와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운데 알게 모르게 서로의 가치와 비전을 이해하게 된다. 이때 서로의 가치는 화학작용처럼 불꽃이 일수도, 삼투압 현상처럼 대화의 흐름이 어느 한쪽으로 밀려들어갈 수도 있다. 이건 만나봐야 알 수 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네다섯 잔씩 마시며 릴레이 미팅을 하는 날이어도 만날 사람은 만나야 한다는 게, MD로서의 나의 작디작은 사명이다.
이솝우화 <여우와 신포도> 속 여우의 생각처럼, 저 포도는 틀림없이 너무 실 거야,라고 미리 단언지어 생각지 않으려고 한다. 상품과 사람은 실제로 만나봐야 한다는, 참으로 아날로그적인 생각으로 온라인 편집숍 MD를 하고 있다. 어찌 보면 조금 구시대적일 수 있겠으나, 신화 속 시시포스Sisypos처럼 끊임없이 바위를 산 위로 올려 보내야 하는 우리네 일은 이런 것들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오늘도 미팅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