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만나다.
One of the UK's most influential fashion designers, Alexander McQueen, has been found dead at his London home.
영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 런던 자택에서 죽은 채 발견되다.
-BBC, 2010년 2월 10일 기사
나는 선선히 눈을 감았다. 내 입술 위에 가벼운 입맞춤이 느껴졌다. 입술에서는 계속해서 조금씩, 그러나 결코 줄어들지 않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들었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8장 종말의 시작
패션계의 악동, 영국을 대표하는 패션 디자이너이자 본인 자체가 브랜드인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에게서 헤르만 헤세Hermann Gesse(1987~1962)의 작품 「데미안」Demian을 읽었다. 패션 브랜드에서 난데없는 명작을 읽는다니. 알렉산더 맥퀸의 옷을 보면서 데미안의 영상 스쳐지나갔다면 오버일까.
2010년 2월, 알렉산더 맥퀸은 자택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그의 극단적인 선택 또한 비극이었으나, 더 이상 그의 세계관을 담은 작품을 볼 수 없다는 점 또한 슬픔으로 다가왔다. 몽롱하면서도 신비한 영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아를 찾아가는 「데미안」 컬러는 맥퀸의 옷과 삶의 컬러와 묘하게 일치했다.
불현듯 든 생각으로 둘 사이의 공통분모를 찾아보았다. 알렉산더 맥퀸과 「데미안」. 둘 다 잘 알고 있거나 혹은 하나만이라도 알고 있는 분들이 이해할 수 있게, 먼저 설명부터. 워낙 고전 명작이므로 「데미안」은 간략하게 설명하고, 「데미안」을 통해 알렉산더 맥퀸의 패션철학과 삶을 좇아보려고 한다.
목차
1. 「데미안」은 어떤 책?
2. 알렉산더 맥퀸은 어떤 브랜드?
3. 알렉산더 맥퀸과 이사벨라 블로우, 싱클레어와 데미안
「데미안」은 1919년 독일의 소설가 겸 시인 헤르만 헤세가 발표한 소설이다. 작품 속 주인공 이름이기도 한 '에밀 싱클레어' 라는 익명의 이름으로 발표했으나, 문체가 헤르만 헤세의 것과 같다는 것이 알려져 추후 헤세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책은 싱클레어가 주인공이다. 제목인 데미안은 주인공의 친구이다. 주인공도 아닌 친구의 이름이 어떻게 책의 제목이 되었을까.
책을 따라가다보면 그 의문은 어렵지 않게 풀린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와 우정을 쌓으며 그의 성장과정에서 선도자, 구원자 역할을 한다. 책은 싱클레어가 시련을 극복하고 깨달음을 얻으며 완전한 본인의 자아에 도달하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위 명문구는 책을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한 번은 보았을 터. 나도 이 문장에 이끌려 책을 읽게 되었던 기억이 있다. 자아의 삶을 추구하는 모든 이에게 큰 영감을 주었던 이 책은 낯설지 않은 성장 경험을 생생하게 묘사해 몰입이 어렵지 않다. 삶을 뒤흔드는 책이다. 읽어본 사람은 한 번 더 읽으면 좋고, 아직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스토리는 간략하게 적어본다면 이렇다.
여유 있고 따뜻한 부모님 아래 ‘선의 세계’만을 알았던 주인공 싱클레어. 그는 동네에서 악행을 저지르던 소년 프란츠 크로머를 만나 ‘악의 세계’ 또한 알게 된다. 그런 싱클레어 앞에 나타난 신비한 소년 데미안. 그는 싱클레어에게 성서에 등장하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선과 악의 진실에 대해 하나씩 알려준다.
내면의 선악 사이에서 고뇌하던 싱클레어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거리로 나가 금지된 쾌락을 추구한다. 그러던 중 그는 우연히 베아트리체를 만나면서 어두운 내면을 이겨 낸다.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의 초상화를 그리지만, 그 초상화는 어느새 데미안과 닮아있다. 데미안에 대한 동경, 강렬한 그리움이 베아트리체 초상화에서 데미안을 보게 한 것이었다.
대학생활 중 싱클레어는 우연히 데미안을 다시 만나고, 그의 어머니 에바 부인 또한 만난다. 재회 이후 내면에 존재하던 여인은 바로 에바부인 이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발발하고, 전쟁에 참전한 싱클레어는 부상을 입고 데미안과 야전 병원에서 대화를 나눈다. 자신이 필요할 때면 자기 안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을 남긴 데미안은 다음 날 사라진다. 싱클레어는 어느새 데미안과 똑같아진 자신의 모습을 마음속에서 찾아낸다.
책을 읽어본 사람, 또는 안 읽어 보았더라도 스토리와 책의 문장들을 함께 본다면 알렉산더 맥퀸이라는 브랜드와 디자이너의 삶이 아침 드라마 보듯 쉽고 흥미진진하게 읽힐 것이다.
일단 브랜드 알렉산더 맥퀸에 대해 얘기해 보자. 알렉산더 맥퀸의 옷을 가지고 있는 사람, 알고만 있는 사람, 저거 무슨 브랜드야? 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냥 이름만 들어봤을 때도 아, 명품 같다. 비쌀 거 같다. 맞다. 비싸다. 정말 옷을 잘 모르는 공대생 형에게 설명하듯 이야기해본다.
빅뱅 TOP의 노래 'Turn it up' 의 가사 중에도 알렉산더 맥퀸이 언급된다.
나는 John galliano, Dior, Louis vuitton, kris vanassche, YSL, Dolce and gabbana, Givenchy, Alexander McQueen Tuxedo와 Shoes 언제나 Dom Perignon Pink
TOP의 허스키한 보이스가 떠오르는 듯하면서 아, 그 브랜드라고 떠오를 것이다.
본인의 명품 브랜드를 과시하면서 읊조리는 대목이다. 그 브랜드다.
알렉산더 맥퀸 브랜드의 간략한 소개를 보자.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은 1992년 리 맥퀸(Lee McQueen)이 시작한 브랜드다. 이 브랜드로 인해 리 맥퀸은 10년이 안 되는 짧은 시간 내에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패션 디자이너로 자리매김했다.
정제되지 않은 에너지, 낭만적이지만 단호한 현실을 기반으로 한 컬렉션으로 인정받았다. 연약함과 강함, 전통과 현대성 등 대조적인 요소가 맥퀸 문화의 필수적인 요소. 알렉산더 맥퀸 컬렉션은 옷에 대한 심도 있는 내공과 영국식의 맞춤형 테일러링 기술, 세밀한 작업 능력과 이탈리아의 완벽한 마무리가 한데 어우러져 완성된 마스터피스이다. - 신세계 인터내셔날 브랜드 소개
키워드로 보자면 '대조적 요소', '영국식 맞춤형 테일러링 기술', '이탈리아의 마무리'로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알렉산더 맥퀸의 진수를 담기에는 역부족. 본인도 패션 산업에서 일을 했지만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약력을 한 번 다시 보자.
그의 약력을 잠시 보자면.
1996, 1997, 2001, 2003년 영국 패션협회BFC 올해의 디자이너 상(4회)
1996~2001년, 지방시Givenchy 수석 디자이너
2003년, 미국 패션협회CFDA 올해의 해외 디자이너 상
2003년, 영국여왕에게 CBE 훈장 수여
아주 훌륭하다. 잘은 모르겠어도 좋은 거 같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알렉산더 맥퀸 이라는 본인 브랜드를 운영했고, 지방시 수석 디자이너를 했다...로 요약된다. 지방시, 알렉산더 맥퀸 딱 두 키워드만 알면 된 거다.
가장 대표적인 아이템 하나를 보여주면 아~ 이게 여기서부터 시작이구나 할 것이다. 바로 스컬Skull 스카프다.
지하경제(짝퉁시장) 활성화에 기여했던 스컬 스카프의 시작은 알렉산더 맥퀸이다. 패션에 관심이 크게 없더라도 지나가면서 본 적은 있을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시그니처, 스컬은 그의 패션 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이 이야기는 후반부에 얘기하려고 한다. 일단 그의 디자이너 생활 시작부터 들어가 보자.
알렉산더 맥퀸은 1969년 런던 이스트 엔드East end에서 택시 드라이버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에 학교를 떠나 런던의 초고급 맞춤 양복점의 산지인 세빌 로Savile row(런던의 고급 수제 양복점이 늘어서있는 거리를 통칭, 세계 유명 인사는 물론 영국 왕실 귀족이 주요 고객)의 코트 전문 테일러 샵에서 견습생 일을 시작했다. 디자이너로써의 첫 발자국이다. 디자인을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밑바탕이 되는 재단 기술과 테일러링을 익히는 기간이었다.
이후 이탈리아에서 재단사로 일 했고, 1994년 영국으로 돌아와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예술대학Central Saint Martins College of Art and Design에 입학했다. 학교의 패턴 튜터로 지원했지만 그의 포트폴리오에 깊은 인상을 받은 학교 측의 권유로 석사과정Head of Master course에 등록하게 된다. 그가 패션계의 메인 스트림에 오를 수 있는 큰 계기이기도 했다.
맥퀸이 익힌 재단 기술을 바탕으로,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예술대학에서 그만의 패션 세계관을 완성시켜나갈 수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연쇄 살인범인 잭 Jack the Ripper, 1992년 그가 학교를 졸업하며 내놓은 졸업작품의 주제였다. 이 졸작은 영국 보그Vogue의 영향력 있는 에디터 이사벨라 블로우Isabella Blow의 눈에 띄게 된다.
알렉산더 맥퀸을 발굴해 그를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로 이끌어준 이사벨라 블로우. 그녀는 책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를 자아의 성찰의 길로 이끌어준 데미안과 같은 존재였다.
#만남 #구원자 #졸작
구원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쪽에서 왔다. 동시에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의 삶 안으로 들어왔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계속 작용하고 있다.
-데미안, 2장 카인
싱클레어가 다니는 라틴어 학교에 자기보다 한 학년 높은 막스 데미안이 전학을 온다. 그를 만나는 것은 싱클레어 인생에 있어서 구원이었으며, 또 다른 삶의 시작이었다. 또래 사이에서도 안정되어 있으면서 어른의 표정을 지닌 데미안을 만난다. 첫 만남에 싱클레어는 호기심과 거부감을 표현했으나, 은연 중 보이는 그의 표정이나 몸짓은 영락없는 호감으로 느껴진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따라와 "잠깐 같이 갈까?" 라는 말을 건넨다. 이 말에 '잠깐'은 싱클레어의 삶 속에 '전부'가 되었다. '잠깐'이라는 첫마디에서 니체의 영원회귀가 떠올랐다면 너무 큰 의미부여일까?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함께하는 '잠깐'은 그들 삶을 통틀어 무한히 반복된다.
졸업작품을 얘기한 거다. 그 졸작(拙作)은 아니다. 1992년 2월, 세인트 마틴스 예술대학 졸업전에서 보그 에디터 이사벨라 블로우를 만나게 된다. 빅토리아 시대의 연쇄 살인범인 잭 Jack the Ripper. 그의 졸업 작품 주제다. 1888년 이스트 런던에서 다섯 명의 넘는 성매매 여성을 극도로 잔인한 방식으로 잇따라 살해한 연쇄 살인범이다. 역사 속 사건을 바탕으로 디자인한 맥퀸의 작품을 본 이사벨라 블로우는 컬렉션의 모든 옷을 구입한다.
“You’ve got to know the rules to break them. That’s what I’m here for, to demolish the rules but to keep the tradition.”
"여러분은 그들(권위)을 깨뜨리기 위한 규칙을 알아야합니다. 규칙을 파괴하고 전통을 지키기 위해 내가 여기 있는 것 입니다."
- 알렉산더 맥퀸, 92년 졸업작품을 언급하며
그녀는 5천 파운드에 달하는 맥퀸의 작품을 커다란 쓰레기봉투에 담아 가져왔고, 그 돈을 갚기 위해 일주일에 1백 파운드씩 갚느라 진땀을 뺐다고 한다. 그렇게 맥퀸과 이사벨라 블로우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맥퀸에게 그녀는 단순 후원자 이상의 존재였다. 뮤즈이자 친구, 스승이자 인도자였다. 패션계 주요 인사에게 맥퀸에 대한 지지를 던졌고, 그의 거친 성향과 무례함을 부드럽게 다듬어주며 그를 패션업계에서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알렉산더 맥퀸은 이사벨라 블로우의 조언을 받아 데뷔 때 사용했던 리 맥퀸Lee Mcqueen이라는 브랜드명에서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으로 바꾸게 된다. 나도 바꾼 이름이 더 맘에 들긴 하다. 암튼, 그녀의 지지와 지원으로 알렉산더 맥퀸의 컬렉션은 패션업계에 강렬한 인상을 주었고, 1996년 패션계의 대기업 LVMH(Louis Vuitton, Moët & Chandon, Hennessy)의 지방시Givenchy 수석 디자이너가 된다.
꿈속에서 처럼 나는 그의 목소리에, 그의 영향력에 굴복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내 자신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모든 것을 아는 목소리는 아니었을까? 내 자신보다 모든 것을 더 잘, 더 명확하게 아는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 데미안, 2장 카인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났듯, 알렉산더 맥퀸도 이사벨라 블로우를 만나면서 삶의 방향이 바뀐다. 수동적이고 타인 지향적이 아닌 자아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도록 해주는 구원자의 만남은 알렉산더 맥퀸의 그것과 「데미안」은 닮아 있었다. 책과 알렉산더 맥퀸을 좀 더 따라가다 보면 같은 길을 다른 방식으로 걷고 있는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보다 모든 것을 더 잘, 명확하게 아는 인도자를 만난 맥퀸은 또 다른 꿈을 꾸게 된다.
(뒤편 계속)
이제 겨우 한 꼭지를 썼을 뿐인데,
카카오톡 채널에 노출(11.29)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직 써야될게 많지만, 큰 힘이 되네요.
본편 이후 이어지는 내용은 알렉산더 맥퀸의 컬렉션 주제와 흐름을 같이하는 책 데미안의 내용입니다.
앞 부분보다 조금 내용이 심오해지지만, 크게 어렵지는 않을 것 같네요. 데미안은 세 꼭지로 마무리 될 것 같습니다.
이후에는 제가 담당했던 브랜드, 꼼데가르송과 책의 연결고리를 찾으려 합니다.
"오늘도 옷을 글로 배웁니다."라는 말이 나오겠지만(웃음) 패션 브랜드와 책의 연결고리를 알면 그 브랜드도, 책도 더 애착이 가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