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맥퀸의 전위적 컬렉션, 아브락사스
"People don't want to see clothes, they want to see something that fuels the imagination"
"(패션쇼에서) 사람들은 옷을 보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은 상상력을 북돋아 줄 것을 보기 원한다."
-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어떤 짐승이나 사람이 자신의 모든 주의력과 모든 의지를 어떤 특정한 일로 향하게 하면, 그는 그것에 도달하기도 하지. 그게 전부야. 네가 알고 싶었던 일도 정확하게 그래. 어떤 사람을 충분히 자세히 바라봐. 그에 대해서 그 자신보다 네가 더 잘 알게 돼.
- 데미안, 3장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
이사벨라 블로우를 만난 알렉산더 맥퀸, 데미안을 만난 싱클레어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알렉산더 맥퀸은 세인트 마틴스 예술대학 졸업 이후 본인만의 컬렉션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이를 통해 그는 패션계에서 큰 이슈를 몰며 지방시Givenchy에 입성하게 된다.
비슷하지만 다르게 싱클레어도 변화한다. 그는 본인의 유년 세계가 붕괴됨을 경험한다. 기존의 세계관을 전복하는 창조적 파괴이다. 창조경제도 그렇겠지만... 창조란 과정은 역시나 쉽지 않다. 혼자 여행을 떠나고, 술을 마시며 주정酒精의 세계에 빠지게 된다. 내면의 소리를 찾아 방황하던 중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를 만나게 된다.
먼저, 알렉산더 맥퀸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목차
4. 알렉산더 맥퀸, 다섯 번의 컬렉션과 데미안
4-1. 니힐리즘과 싱클레어의 허무
4-2. 벤쉬와 죽음
4-3. 새와 아브락사스
4-4. 역사와 분노
알렉산더 맥퀸은 이사벨라 블로우를 만난 자신의 졸업전 이후 자신만의 컬렉션을 이어나간다. 첫 컬렉션에서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등장한 맥퀸은 1993-1994 F/W 컬렉션 'Taxi Driver'에서 *범스터 바지를 선보이며 패션계와 대중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쉽게 얘기하자면 엉덩이가 보이는 바지다. 저스틴 비버를 상상해보자. 그거다.
*범스터Bumster: 극도로 짧은 밑위길이의 바지나 치마를 지칭하는 단어
맥퀸은 1970~1980년대의 로 라이즈Low risw 팬츠(밑위가 짧은)를 부활시켰고, 자신의 컬렉션에서 범스터를 지속적으로 선보였다. 초기 그의 작품은 그를 선동적이고 전위적인 디자이너라는 인식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동안의 컬렉션에서는 엉덩이를 노출시키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첫 컬렉션 이후 그는 ‘니힐리즘Nihilism(허무주의)’, ‘벤쉬Banshee(아일랜드 민화 요정)’, ‘The Birds(새)’, ‘Highland Rape(고원의 강간)’ 등 발표하는 쇼마다 새롭고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자신만의 색을 확실하게 구축해 나가며 패션계, 소비자,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기존에 없던 녀석이 나타난 것이다.
좀 어렵겠지만 일단 컬렉션을 읊어보자면,
1993-1994 F/W 컬렉션 'Taxi Driver'에서는 패션 산업에서 노동자 계층의 디자이너로서 견뎌내야 했던 정신적 좌절감과 소외를 말했다.
1994 S/S 'Nihilism' 컬렉션 주제를 단순한 감정의 허무를 표현한 것이 아닌 개성의 극단으로 가는 허무로서 피가 튀고 오물이 묻은 의상이나, 신체가 보이는 투명한 의상을 통해 주제를 표현했다.
1994-1995 F/W 'Banshee'는 죽음을 예언하는 요정에서 영감을 받아 기존 패션의 죽음이라는 강력한 주제를 선보인다.
1995 S/S 'The bird'는 히치콕 감독의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새를 모티브로 강렬한 이미지를 표현한다.
1995-1996 F/W 'Highland Rape'를 통해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 역사 침탈 사건이 모티브다. 이 컬렉션에서는 본인의 핏줄인 스코틀랜드 계보를 재현, 표현하며 역사에 대한 인식을 드러냈다.
*많이 알고 계시겠지만 다시 한번. S/S는 Spring, Summer. F/W는 Fall/Winter 시즌을 의미한다.
종종 F/W를 A/W Autumn/Winter로 표현하기도 하다.
어렵다. 뭔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심오한 내용을 가지고 쇼를 진행했다...로 압축된다. 컬렉션에는 주제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다. 이 키워드는 책 데미안이 가지고 있는 키워드와 데칼코마니 인듯하다. 하나씩 살펴보자.
서로의 운명을 바꾸는 구원자와의 만남(맥퀸- 이사벨라 블로우, 싱클레어- 데미안)에 이어 허무, 죽음, 새와 역사라는 키워드를 뽑을 수 있었다. 뜯어보면 놀랍다.
"I am a melancholy type of person."
"나는 멜랑콜리(우울한) 타입의 사람이다."
-알렉산더 맥퀸
익숙한 느낌들과 기쁨들이 나에게서 각성이 일그러뜨리고 퇴색시켰다. 정원은 향기가 없었고, 숲은 마음을 끌지 못했다. 내 주위에서 세계는 낡은 물건들의 떨이판매처럼 서 있었다. 맥없고 매력 없이. 책들은 종이였고, 음악은 서걱임이었다. 그렇게 어느 가을 나무 주위로 낙엽이 떨어진다. 나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비, 태양 혹은 서리가 나무를 흘러내린다. 그리고 나무속에서는 생명이 천천히 가장 좁은 곳, 가장 내면으로 되들어간다. 나무는 죽는 것은 아니다. 기다리는 것이다.
-데미안, 3장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
데미안을 만나고 주인공 싱클레어의 유년은 폐허가 된다. 이제 청소년이 되었고, 자신을 둘러싼 금기禁忌와 성性에 대한 감정이 하나의 적이자 파괴자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기존의 세계와 작별을 하는 과정, 그 과정을 거쳐야만 새로울 수 있다. 과정에 있어서 싱클레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맥퀸의 1994년 컬렉션 '니힐리즘Nihilism(허무주의)'의 그것과 같은 음계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니힐리즘(허무주의)을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책 데미안에서도 그 흐름이 문장에 잡히고, 맥퀸의 컬렉션 주제이기도 한 니힐리즘은 니체의 철학과 흐름을 같이 한다.(책 데미안에서는 실제로 니체가 언급되기도 한다.)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불리는 한 니체는 근대 서구 철학계의 알락산더 맥퀸과 같다. 또한 맥퀸은 패션산업에 대한 부정과 뒤집음을 패션으로 표현하며 니체 철학의 현대판이라 볼 수 있겠다.(심지어 별명도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 무서운 아이란 뜻으로 망치를 든 철학자와 느낌이 비슷하다.)
니체는 삶의 가치를 부정하고 권력을 쇠퇴시키는 기존의 도덕이나 관념을 수동적 니힐리즘이라고 배척하고, 삶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면서 기성 가치의 전도顚倒를 지향하는 능동적 니힐리즘을 제창했다.
써놓고도 뭔가 어렵다. 니체의 니힐리즘은 인간의 모든 가치에 대한 허무와 살아야 할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무기력의 대명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에 대해 인간이 새로운 가치 정립의 행위 주체가 된다는 말이다. 더 간단히, 무너뜨림을 인지하고 그것을 다시 구축하려는 의지에 대한 긍정인 것이다.
니힐리즘은 「데미안」에서 언급되는 니체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니체의 철학을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으로, 알렉산더 맥퀸은 자신의 패션 철학으로 나타낸 것이다. 맥퀸은 개성 표현의 극단으로 향하는 의미로 피가 튀고 오물이 묻은 의상, 둔부와 가슴이 노출되는 의상을 쇼에 세운다. 실제 패션쇼 영상을 보면 뭔가 난해하다. 어지럽고. 하지만 그 몽롱한 분위기와 어두운 이미지는 전율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다.
어렵다. 쉽게 표현하려고 했으나... 철학, 형이상학등과 같은 추상적 표현은 알듯 말 듯, 모르겠지만서도 알 것도 같은 묘한 매력이 있다. 그런 느낌으로 바라보면 좋을 것 같다.
책 「데미안」으로 돌아오자. 싱클레어는 허무의 감정을 지닌 생활 중에 베아트리체를 발견한다.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으나 사랑하고, 숭배하는 존재가 생긴다. 이로써 그는 긴 허무의 터널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베아트리체 예배는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라고 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지만 짝사랑이다. 말 한마디 걸지 못한다. 책을 보며 '말이라도 걸어보지' 란 생각이 들기도 한 부분이다.
싱클레어는 물감과 붓을 들고 베아트리체를 그린다. 그림은 데미안을 닮아있게 된다.
"I oscillate between life and death, happiness and sadness, good and evil."
나는 삶과 죽음, 행복과 슬픔, 선과 악 사이에서 동요한다.""
-알렉산더 맥퀸
싱클레어, 우리는, 우리가 이따금씩 이야기했던 것을 겪게 될 거야! 세계가 새로워지려고 하고 있어.
죽음의 냄새가 나. 그 어떤 새로운 것도 죽음 없이 오진 않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충격적이야.
- 데미안, 7장 에바 부인
「데미안」 후반부에는 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의 상황이 묘사된다. 새로운 가치와 체제가 있기 위해서는 기존 가치의 죽음과 파괴가 필수적이다. 두렵고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새로운 세계를 맞이 할 수 없다. 큰 전쟁이 날 것이라고 말하며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무엇을 할 것인지 물음을 던진다. 이때 데미안의 직업이 처음 언급된다. 그는 군인이다. 책에서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그의 직업을 말하는 순간이다. 약간 난데없긴 하지만,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책의 후반부의 느낌을 따르자면 무리는 없다. 결국 싱클레어는 전쟁에 참전한다.
알렉산더 맥퀸의 1994-1995 F/W 컬렉션 주제는 벤쉬다. 벤쉬는 아일랜드 민화 속 요정이다. 집안사람이 죽을 때 전조로서 사람들 앞에 나타난다고 믿었다. 벤쉬는 죽음을 슬퍼하여 흐느껴 울거나,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거나, 손뼉을 치고 울부짖으며 돌아다니고, 박쥐가 내는 소리를 내면서 밤하늘을 날아다니기도 한다.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상당히 무섭다. 죽음을 슬퍼하다가 초상 한 번 더 치를 기세다. 암튼, 이러한 상상력으로 바탕으로 컬렉션이 꾸려진다. 여기서 키워드는 죽음이다.
알렉산더 맥퀸은 이 컬렉션에서 젖가슴이 드러나는 커팅 니트웨어, 가슴보호대 모양의 석고 옷을 입은 모델이 워킹한다. 정말 그로테스크grotesque하다. 이런 퍼포먼스와 의상은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차용해 기존 패션에 대해 선언하는 그의 외침이었고, 새로운 패션의 탄생을 선언하는 그만의 컬렉션 언어였다. 그의 패션에는 기존 체제에 대한 반항과 새로운 것에 대한 창조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벤쉬는 또 다른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죽음을 알릴 뿐만 아니라, 아기의 탄생을 알리거나 가장이 될 아이의 요람을 지켜보기도 한다. 이러한 스토리 또한 새로운 접근 방법으로 패션쇼에서 표현했다. 실제 임산부가 런웨이에 오른 것이다. 임산부 모델을 세우다니. 패션계의 앙팡 테리블이라 불릴만하다.
「데미안」에서 1차 세계대전을 통한 파괴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의식은, 맥퀸의 패션에 대한 해체와 창조의 기저와 동일선 상에 있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데미안, 5장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데미안」에서 대표적으로 인용되는 표현이다. 나도 이 문구에 매료되어 책을 손에 들게 되었었다. 이 문구에 대한 많은 해석과 의미부여가 있지만, 알렉산더 맥퀸에서의 '새'가 가진 상징성과 「데미안」에서의 아브락사스를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책에서 언급되는 아브락사스는 주인공 싱클레어의 집 현관문 위에 붙어 있는 문장紋章(국가나 단체 또는 집안 따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는 상징적인 표지) 속에 있던 상징이다. 싱클레어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는 데미안과 문장이 나온다. 날카롭고 대담한 매의 머리를 가진 한 마리 맹금이었다. 싱클레어는 그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 데미안에게 무기명으로 보낸다. 그 이후 싱클레어는 수업 시작 전 쪽지로 문구를 발견한다. 위에 언급된 바로 그 문구다.
아브락사스의 존재를 깨달은 싱클레어의 삶은 변화한다. 원효대사 해골물 마신 듯 큰 깨우침을 얻는다. 아브락사스는 껍질을 깨고 나오려는 한 시절의 방황과 고투의 상징이었다.
"Birds in flight fascinate me. I admire eagles and falcons. I’m inspired by a feather but also its color, its graphics, its weightlessness and its engineering. It’s so elaborate."
"날아다니는 새는 나를 매료시킨다. 나는 독수리와 팔콘을 감탄하며 바라본다. 나는 깃털뿐만 아니라 컬러, 그래픽, 무중력과 엔지니어링에 영감을 받는다. 이것은 매우 정교하다."
-알렉산더 맥퀸
「데미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상징인 '새'. 알렉산더 맥퀸에게도 새는 큰 의미를 가진다. 비단 1995 S/S 컬렉션의 주제뿐만 아니라 이후 그가 보여줬던 충격적인 컬렉션에서의 '새' 모티브 의상은 주요한 마스터피스Masterpiece중 하나다.
맥퀸은 1995년 컬렉션에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새'에서 영감을 받아 컬렉션 주제로 삼는다. 비상飛上을 상징하는 활주로 콘셉트의 런웨이에서 새의 자유로움을 표현하는 디테일들이 출렁인다. 가장 환호가 컸던 남자 모델의 치마를 입은 런웨이.(패션쇼 중에 환호라니) 역시 뒤틀고 선동적인 의상과 퍼포먼스는 알렉산더 맥퀸의 전매특허다.
「데미안」에서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아브락사스. 신이기도 하고 악마이기도 한 아브락사스는 인간의 몸에 수탉의 머리를 갖고, 두 개의 다리는 뱀으로 이루어진 그노시스파의 신이다. 이중적 의미를 지닌 이 상징은 많은 의미를 지닌다. 천사상이며 사탄, 남자와 여자가 하나이며, 인간과 동물, 지고의 선이자 극단적 악인 아브락사스는 알렉산더 맥퀸의 패션 철학과 삶과 닮아 있었다. (이러한 양면성은 알렉산더 맥퀸이 게이였다는 사실에서도 느껴진다.)
알렉산더 맥퀸은 창조와 파괴, 해체와 조합, 옛것과 새로운 것의 결합에 거부감이 없었다. 노동자 계층이었던 유년시절에서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 수장이 되는 과정을 보면, 그의 패션뿐만 아니라 삶 또한 드라마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맥퀸의 컬렉션에서의 '새'는 2009-2010 F/W 컬렉션에서도 다시 재현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브락사스는 싱클레어 삶의 상징으로, 책 속에서 무한 재현된다.
"It's good to know where you come from. It makes you what you are today."
"당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두면 좋다. 그것은 현재의 당신을 만든다."
-알렉산더 맥퀸
자네가 죽이고 싶어 하는 인간은 결코 아무아무개 씨가 아닐세. 그 사람은 분명 하나의 위장에 불과할 뿐이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 바로 우리들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 미워하는 거이지. 우리들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 그건 우리를 자극하지 않아.
- 데미안, 6장 야곱의 싸움
싱클레어의 멘토, 피스토리우스가 싱클레어에게 말한다.
이 말은 싱클레어가 그에게 들은 말 중 가장 은밀한 부분을 깊이 명중시키는 말이었다.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데미안의 말의 울림과 같았다. 큰 울림 이후 피스토리우스와 언쟁을 하고, 친구이자 스승과도 같았던 그와 결별한다.
피스토리우스는 책을 보는 우리에게도 말한다. 우리가 부정하고 싶었던 진실들은 사실 우리의 자신 속에 있었던 것이라는 메시지를 말이다. 이는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에도 큰 의미를 준다. 부정하고 싶어 들춰보지 않았던 역사에 대한 정면적 도전과 바라봄이 필요하다는 말이 아닐까 싶다. (역사교과서와 관련된 최근의 이슈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1995-1996 F/W 'Highland Rape(고원의 강간)' 컬렉션은 맥퀸의 패션 철학에서도 큰 의의를 가진다. 자신의 혈통을 되짚어 보고, 개인의 역사를 증조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스코틀랜드의 역사를 다룬다. 우리로 따지면 독립운동 후손이 당시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 독립군 모티브 의상을 표현하는 느낌이랄까.
19세기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를 대상으로 인종 청소라는 불행한 역사를 만든다. 이를 기억하는 의미로 스코틀랜드의 대표적인 무늬인 타탄체크와 찢어진 레이스를 소재로 컬렉션을 구성한다. 옷들은 찢겨있고 뒤틀렸으며, 모델들은 휘청이며 워킹한다. 런웨이 바닥의 지저분함과 찢어진 레이스, 타탄체크는 스코틀랜드의 아픈 역사의 상징이다.
아픈 역사라고 해서 역사를 외면할 수는 없는 법. 「데미안」에서 나온 것처럼 "우리들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 그건 우리를 자극하지 않아."라는 문구는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통렬한 메시지로 다가온다.
맥퀸의 역사관은 부끄러움에 대한 회피와 단순 분노에 그치지 않는다. 이를 옷과 컬렉션이라는 수단을 통해 세상에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런 점에 있어 그는 패션을 통해 철학과 의식을 전달하고자 한 선구자가 아닐 수 없다.
"Give me time and I'll give you a revolution."
"나에게 시간을 줘. 당신에게 혁명을 가져다주겠다."
-알렉산더 맥퀸
나는 자연이 던진 돌이었다. 불확실함 속으로, 어쩌면 새로운 것 에로, 어쩌면 무에로 던져졌다. 그리고 측량할 길 없는 깊은 곳으로부터의 이 던져짐이 남김없이 이루어지게 하고, 그 뜻을 마음속에서 느끼고 그것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만이 나의 직분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데미안, 6장 야곱의 싸움
「데미안」에서 싱클레어의 흔적을 따라 알렉산더 맥퀸을 함께 그려봤다. 책의 또 다른 인물들이 있다. 피스토리우스와 에바 부인. 뒤편에서는 다른 인물과 상징을 통해 맥퀸을 입체적으로 따라가 보려 한다.
패션 대기업 LVMH(Louis Vuitton, Moët & Chandon, Hennessy)는 정체되어 있던 지방시에 새로운 피를 수혈한다. 당시 나이 27세의 어린 디자이너였던 알렉산더 맥퀸을 지목한 이 결정은 패션계를 흔들었다. 다섯 번의 충격적 컬렉션을 인정받아 지방시에서 그를 초빙한 것이다. 그의 초기 작품들(다섯 번의 컬렉션)은 이후 지방시에서, 지방시를 떠난 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본 편에서의 초기 작품 키워드를 통해 그의 지방시 입성 이후 커리어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데미안」을 좋아했던 독자라면, 알렉산더 맥퀸이 조금은 더 생생하게 보일 것이다. 어렵지 않다. 살짝 디테일하게 바라본 것뿐이다.
새로운 것으로, 불확실함 속으로 던져진 싱클레어와 맥퀸을 조금 더 따라가 보자.
지방시, 새로운 시작이다.
(뒤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