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의 경계를 넘다.
"Fashion should be a form of escapism, and not a form of imprisonment."
"패션은 구속의 형태가 아닌, 도피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
-알렉산더 맥퀸
새로운 것은 새롭고도 달라야 한다는 것, 새 땅에서 솟아야지 수집되거나 도서관에서 길어내어 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의 직분은 어쩌면, 나에게 해주었듯이, 인간이 그 자신에게로 이르도록 돕는 일일 것이다.
-데미안, 6장 야곱의 싸움
알렉산더 맥퀸, 지방시Givenchy 수석 디자이너가 되다.
패션 대기업 LVMH(Louis Vuitton, Moët & Chandon, Hennessy)는 정체되어 있던 지방시에 무서운 아이Enfant Terrible를 초빙한다. 당시 27세의 어린 디자이너였던 알렉산더 맥퀸을 지목한 이 결정은 패션계를 흔들었다. 국내 사정을 생각해보면 대학 졸업하고 갓 사회생활을 시작할 나이다.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이 21살 때, 파리 최대 오트 쿠튀르 하우스 크리스찬 디올Dior 에 입성한 것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이들의 인재에 대한 유연한 결정이 부러울 따름이다.
존 갈리아노John Galiano를 이어 프랑스 지방시 하우스의 수석 디자이너가 된 알렉산더 맥퀸. 지방시를 떠올려 보면 그동안 맥퀸이 보여줬던 선동적이며 전위적인 컬렉션의 느낌과는 차이가 있다. 지방시는 뮤즈, 오드리 햅번Audrey Hepburn을 떠올리면 된다. 파리지앵의 절제된 우아함과 고고함. 패션과 거리가 있는 사람도 느낄 정도로 알렉산더 맥퀸과 지방시, 느낌 차이는 엄청나다. 앞 챕터의 컬렉션 내용을 보면 느낌은 더욱 차이가 난다. 알렉산더 맥퀸도 처음엔 자신의 패션 철학을 지방시 브랜드에 맞춰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 고민은 현실이 된다.
싱클레어, 음악가 피스토리우스를 만나다.
싱클레어는 시내를 오가는 길에 자그마한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 소리를 듣는다. 연주에 매혹된 싱클레어는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를 따라가 그와 이야기를 나눈다. 싱클레어가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몇 안 되는 장면이다. 아브락사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배화(拜火)를 통해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된다. 싱클레어는 영혼에 대한 절실한 대화를 통해 내면에서 자신의 인도자를 만나게 된다. 만남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자신에게 집중해야 할 때가 다가옴을 느낀다. 결국 피스토리우스와도 결별을 맞이한다.
*배화(拜火): 불을 숭배(崇拜)하는 신앙(信仰)의 의식. 불을 바라보며 싱클레어와 피스토리우스는 대화를 나눈다.
알렉산더 맥퀸, 지방시 입성 이후에도 자기 이름을 딴 '알렉산더 맥퀸'의 컬렉션은 이어진다. 역시 파격은 멈추지 않는다.
목차
5. 지방시에서의 5년, 피스토리우스
5-1. 불과 배화(拜火)
5-2. 의족과 페인트
6. 헤어짐
6-1. 이사벨라 블로우의 죽음, 피스토리우스와의 결별
6-2. 어머니의 죽음, 에바 부인
"There is no better designer than nature."
"자연보다 더 나은 디자이너는 없다."
-알렉산더 맥퀸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나는 때때로 기괴한 형태를 가진 자연물을 바라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냥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유한 마력, 그 얽히고설킨 깊은 언어에 온통 몰두하여 관찰했다.
-데미안, 5장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지방시 시절에 대한 평은 엇갈린다. 극단적인 호好와 불호不好 사이의 평이 오갔다. 지방시는 그에게 맞지 않는 옷이었다. 5년 뒤, 맥퀸과 지방시는 결국 다른 길을 가게 된다. 그의 창의성과 표현 의식은 지방시, LVMH와의 계약 때문에 제약을 받는다. 그는 1년에 6개의 컬렉션을 준비해야 되는 상황에서 자신의 역량을 집중할 시간이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의 경험은 그가 지방시에 많은 업적을 세웠다기보다, 독립된 디자이너로서 성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맥퀸도 그 시절을 돌아보며 지방시 하우스에 대한 예의를 표했고, 그가 성장하는 큰 밑거름이 되었음 직간접적으로 이야기했다. 그 시간은 자신의 독립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인고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자금적인 상황과 인지도를 높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가운데 「데미안」과 맞닿아 있는 몇 번의 컬렉션을 따라가 보려고 한다.
「데미안」으로 돌아와서.
피스토리우스는 피아노 연주를 하는 신학도다. 신학과 아브락사스에 대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싱클레어는 그에게 수업 아닌 수업을 듣는다. 그 대화는 싱클레어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성향을 강화시켜주었고, 신념은 더욱 또렷해진다.
피스토리우스와 싱클레어는 벽난로 속의 불을 바라보며, 불의 영상에 몰두하는 의식을 함께 한다. 책에서는 배화라는 표현을 쓴다. 우리와 좀 더 가까운 표현으로는 '불멍'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멍하니 불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싱클레어는 기분이 좋아지고 풍요로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새로운 경험을 하며 싱클레어는 '바깥 세계가 몰락한다 하여도 우리들 중 하나는, 그 세계를 다시 세울 능력이 있다' 라고 생각한다. 영혼이 세계의 창조에 어떻게 관여하는지 고찰한다.
배움은 있지만, 놀라운 것도 새로운 것도 없는 싱클레어와 피스토리우스의 대화. 이는 나직하고 꾸준한 망치질로 마음속의 한 점을 계속 두드리는 행위였다.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와 결별을 준비한다.
알렉산더 맥퀸과 싱클레어는 지방시, 피스토리우스라는 중요한 만남을 갖는다. 만남을 통해 그들은 성장하고 변화한다.
"There's beauty in anger, and anger for me is a passion."
"아름다움은 분노에 있고, 분노는 나에게 열정이다."
-알렉산더 맥퀸
불은 내 마음도 끌어당겼다. 우리들은 말없이 아마 한 시간은 배를 깔고 타닥거리는 장작불 앞에 엎드려,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싯싯거리고 가라앉아 휘어지고 가물거리고 움칫거리다 마침내는 사그라진 조용한 화염 속에서 잦아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데미안, 5장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1998년 F/W 컬렉션의 마지막 피날레. 화염과 피를 떠올리게 하는 붉은 세틴 드레스를 입은 모델이 캣워크를 걸어 나온다. 얼굴까지 뒤덥은 드레스로 모델은 얼굴 형체만 어렴풋이 보인다. 영화 해리포터에서의 볼드모트가 떠오르는 얼굴이다. 캣워크 중간으로 와 멈춰 선 모델. 불이다. 1분 동안 화염의 고리 안, 모델은 알 수 없는 몸짓으로 움직인다. 이 피날레로 쇼는 마무리된다. 러시아의 마지막 왕조 로마노프가家의 처형이 모티브인 컬렉션답게, 피를 상징하는 붉은 의상과 종말을 상징하는 블랙 컬러를 중심으로 작품은 이뤄졌다.
분노에서 아름다움을 추출한 것이다. 맥퀸의 역사에 대한 인식은 초반의 컬렉션뿐만 아니라 자살 전까지 그의 작품에서 반복돼서 되풀이된다. 역사에 상상력의 옷을 입혀 퍼포먼스와 의상을 꾸민다. 이는 그가 디자이너일 뿐만 아니라 예술가의 호칭을 갖는데 의심의 여지를 없게 한다.
악마의 의식을 연상시키는 화염의 피날레 퍼포먼스. 「데미안」에서의 싱클레어와 피스토리우스의 '배화' 장면의 오마주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를 따라가 작은 선술집에서 처음 대화를 나눈다. 신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 싱클레어는 '아브락사스'를 언급한다. 피스토리우스는 놀란다. 자신이 몰두해 있던 아브락사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싱클레어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마치 소개팅에서 상대가 자신이 제일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얘기하듯 반갑다.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를 집으로 초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며, '아가리 닥치고 배 깔고 엎드려 생각하기'를 한다.(이건 피스토리우스의 표현을 빌린 것이다.)
그들은 벽난로의 불을 바라본다. 말없이 불을 응시하며 꿈과 정적 속으로 침잠하는 행위. '배화' 의식이다. 불을 멍하니 바라보며 피스토리우스에게 신화와 세계관,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싱클레어는 본인 안에 있던 허물을 벗는 일을 각성하기 시작하며, 내면의 아브락사스의 실체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피스토리우스와의 결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알렉산더 맥퀸도 지방시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컬렉션을 이어간다. 맥퀸 또한 지방시와의 결별을 앞두고 있다.
"Fashion is just the medium."
"패션은 단지 도구 일뿐이다."
-알렉산더 맥퀸
우리는 우리의 개성의 경계를 늘 너무나도 좁게 긋고 있어! 우리는 늘, 우리가 개인적이라고 구분해 놓은 것, 상이하다고 인식하는 것만 개성이라고 생각해. 그러나 우리는 세계의 총체로 이루어져 있어. 우리 하나하나가 말이야.
-데미안, 5장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패션은 단지 도구였다. 알렉산더 맥퀸의 컬렉션은 더 이상 옷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는다. 컬렉션에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있었고, 이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다양한 무대 연출과 퍼포먼스를 활용했다. 21세기가 다가오기 전, 가장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컬렉션으로 꼽는 건 바로 그의 1999 S/S 컬렉션. 첫 모델의 워킹, 마지막 피날레 무대는 오늘날 다시 봐도 놀라울 따름이다. 영상으로 볼 수 있다면 보는 것을 추천한다.(하단 피날레 링크 참조)
전자기타와 드럼 소리가 정적을 깨고 무대가 밝아진다. 어떤 퍼포먼스를 할까 기대하는 패션 관계자들은 첫 모델의 어색한 워킹에 의아해한다. 모델은 에이미 멀린스Aimee Mullins. 그녀는 1996년 여름 애틀랜타 패럴림픽에서 미국 국가대표로 100미터, 200미터 세계 신기록을 기록하며 금메달 3개를 획득하며 주목받았다. 그녀는 두 다리를 잃은 장애인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종아리 뼈가 없어 한 살 때 두 다리를 절단했었다. 맥퀸은 그녀에게 수공예로 만든 일체형 의족을 만들어주었고, 쇼의 첫 모델로 등장시킨다.
패션 관계자들의 의아함은 경이와 환호로 바뀐다.
컬렉션 피날레의 장식은 전직 발레리나 샬롬 할로우Shalom Harlow. 순백의 가볍고도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캣워크 중앙으로 나온다. 무대에는 자동차 공장에서나 볼법한 로봇팔 기계가 설치되어 있다. 중앙 원형 무대는 돌아가기 시작하고 기계에서는 페인트가 뿜어져 나온다. 모델은 온몸으로 페인트를 맞으며 드레스는 완성되고, 쇼는 마무리된다. 옷의 완성은 무대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객석에서는 유례없는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설치 미술을 하는 기분이라고 말한 맥퀸은 기존의 컬렉션을 조롱하듯 뒤틀어 버린다. 만들어진 옷을 멋지게 보여주는 것만이 아닌 살아있는 패션을 보여준 것이다. 이 장면에서 故백남준의 플렉서스Fluxus 개념이 떠오른다. 플럭서스는 ‘변화, 움직임’을 뜻하는 라틴어로 예술장르의 벽을 허물고 경계를 넘는 전위예술을 뜻한다. 패션쇼와 어울릴 수 없었던 로봇의 등장과 페인팅, 모델의 퍼포먼스를 통해 패션의 변화와 움직임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옷을 고정된 오브제로 여기고 소비하는 대상만이 아닌, 우리의 삶에서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외치는 맥퀸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피날레 영상은 링크를 따라 꼭 한 번 보길 권한다. 급하신 분은 44초부터.
링크: https://youtu.be/VnA3XR5apQg
「데미안」으로 오자.
피스토리우스는 "우리는 우리의 개성의 경계를 늘 너무나도 좁게 긋고 있어!"라고 싱클레어에게 말한다. 자신을 남들과 비교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싱클레어는 나 자신에게로 가는 길 위에 또 한걸음을 내딛게 되는 순간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을까. 어떤 계기로 인한 대오각성大悟覺醒의 순간이.
싱클레어는 결별을 예감하고, 준비한다. 여행을 하고 방황을 하고 고민을 하다, 데미안을 다시 만나게 된다.
싱클레어가 자신에게로 과정이 알렉산더 맥퀸의 컬렉션의 의미와 맞닿아 있는 게 우연일까 싶다. 기존 패션산업이 설정한 '개성의 경계'를 뛰어넘는 맥퀸의 컬렉션은 알을 깨고 나오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You can only go forward by making mistakes."
"당신은 오직 실수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알렉산더 맥퀸
누구든 한 번은 자신을 아버지로부터, 스승들로부터 갈라놓는 걸음을 떼어야 한다. 누구든 고독의 혹독함을 조금은 느껴야 한다.
-데미안, 6장 야곱의 싸움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게 되고,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말.
5년 뒤, 지방시와 맥퀸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정체되어 있던 지방시 하우스에 파격을 던지면서 평이 엇갈리지만, 그 또한 브랜드의 성장을 위한 정반합正反合의 과정이었으리라. 테일러에서 기반을 닦았던 어린 시절로 옷의 구조와 건축적 측면에 대한 강점은 과감하고 구조적인 작품으로 표현됐다. 그러나 부드러움과 가벼움에 대한 이해는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지방시에서의 5년은 이런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2001년, 맥퀸은 지방시와 결별한다. 구찌의 투자를 받아 자신의 독립 브랜드 '알렉산더 맥퀸' 집중한다.
싱클레어는 스승이었던 피스토리우스와 결별한다. 더없이 진정한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피스토리우스에게 저항을 느끼기 시작한다. 피스토리우스를 절대적 지도자로 인정하는 것에 저항하는 마음의 소리가 점점 커졌기 때문이다. 결별은 다툼도 요란한 장면도 없었다. 시작은 싱클레어의 한마디 말이었다. 그것이 그들 사이에 있었던 환상을 색색깔 조각으로 깨뜨리며 흩어진 것이다.
알렉산더 맥퀸과 싱클레어는 각자가 성장한 배경과 헤어진다. 브랜드와 사람에게서 독립한다. 평행을 달리던 맥퀸과 싱클레어의 마지막은 조금 다르다. 2007년, 맥퀸의 뮤즈이자 친구, 스승이자 인도자였던 이사벨라 블로우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와 반대로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조우하고, 그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만나게 된다.
마지막 페이지는 서로 다른 길로 향해 있다.
(Blow's passing) “just left a big void in my life.”
(이사벨라 블로우의 죽음은) "내 인생에서 큰 공허함을 남겼다."
-알렉산더 맥퀸
맙소사, 이제 곧 나는 그녀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안정되고 다정한 발걸음이 집 안을 거니는 소리를 다시는 듣지 못할 것이며 내 책상 위에는 그녀의 꽃이 더 이상 없으리라.
-데미안, 8장 종말의 시작
지방시에서 독립 후 맥퀸은 컬렉션을 통해 한층 더 강렬하고 정제된 주제 의식이 표현한다. 난해하다면 난해하고, 경이롭기도 하다. 매 시즌마다 다양한 주제와 문제의식을 제기하며 야만적 아름다움Savage Beauty이라고 일컫는 본인만의 미학을 선보인다. 예술의 언어도 알 수 없는 말과 모순의 조합이듯, 패션도 그렇다. 알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하지만 패션업계에서 그의 입지는 점점 높아진다. 허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2007년 5월 7일, 이사벨라 블로우는 마지막 숨을 거둔다. 맥퀸을 패션 업계에서 자리 잡을 수 있게 끌어준 멘토이자 뮤즈였던 그녀의 죽음은 그의 삶을 흔든다. 난소암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녀의 음독자살 이후 맥퀸은 우울증을 앓게 된다.
2008년 S/S 컬렉션은 그녀를 위한 헌사이다. 이사벨라 블로우를 상징하는 '새'를 테마로 삼는다. 하늘(천국을 상징)로 날아가는 날개를 묘사하는 배경으로 쇼는 진행된다. 그녀의 죽음에서 많은 걸 배웠다는 맥퀸은, 생전 그녀가 좋아했던 모자를 메인 아이템으로써 적극 활용한다.
알렉산더 맥퀸의 컬렉션에서 자주 보이는 '새'는 책 데미안의 '아브락사스'를 상징하는 형상과 닮아있다. 어찌 보면 평행이론과 같은 새에 대한 그의 집착은 싱클레어가 아브락사스를 좇는 것과 비슷하다.
책 내용으로 돌아오자. 아브락사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철학과 신학을 이야기한 싱클레어와 피스토리우스. 싱클레어는 그에게 가르침을 받으면 받을수록 내면에서 그를 밀어내야 한다는 의식을 강하게 느낀다.
불 앞 방바닥에 엎드려 비밀 의식과 종교 형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에게 얘기한다. "제게 다시 한번 꿈 이야기를 들려주셔야겠어요. 밤에 꾸신 진짜 꿈 이야기를요. 지금 말씀하시는 것, 그건 참 빌어먹게 골동품 냄새가 나네요!" 그 말을 뱉는 순간 싱클레어도 스스로 놀란다. 긴 침묵 후 피스토리우스는 침착하게 말했지만, 그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싱클레어는 느낀다.
한 마디 말로 피스토리우스의 본질적인 약점을 건드린다. 싱클레어는 스스로 괴로워하며 지냈고, 결별 후 다시 혼자만의 세계로 빠지게 된다. 이는 크지 않지만 우리의 삶에서 말로 인해 벌어지는 에피소드들과 닮아있다. 그 사소한 순간을 캐치한 작가 헤르만 헤세의 섬세함이 경이롭다.
맥퀸의 이사벨라 블로우와의 결별(죽음으로 인한), 싱클레어의 피스토리우스와의 결별은 「데미안」이 알렉산더 맥퀸의 삶이 겹쳐진 마지막 페이지다. 어머니를 보내고 자살하기 전까지의 알렉산더 맥퀸을 따라가 보자.
"From heaven to hell and back again, life is a funny thing. beauty can come from the most strangest of places even the most disgusting places."
“천국에서 지옥까지 삶은 너무나 우스꽝스럽고, 아름다움이란 것도 결국 가장 역겨운 장소에서 태어난다”
-알렉산더 맥퀸
"사랑은 간청해서는 안 돼요" 그녀가 말했다.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안에서 확신에 이르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은 더 이상 끌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끕니다. 싱클레어, 당신의 사랑은 나에게 끌리고 있어요. 언젠가 내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이 나를 끌면, 그러면 내가 갈 겁니다. 나는 선물을 주지는 않겠어요. 쟁취되겠습니다."
-데미안, 7장 에바 부인
마지막 파트는 「데미안」부터 언급하려고 한다.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조우하면서 그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만나게 된다. 마침내 자신이 꿈에 그린 영상의 실체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싱클레어는 그녀를 가까이하며 목소리를 듣고 성숙과 영혼의 분위기에 젖어 행복감을 느낀다.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만나는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에바 부인은 싱클레어가 자신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말한다. 사랑은 간청해서는 안된다고. 싱클레어의 사랑이 자신을 끌면 쟁취되겠다고 말하며, 자신의 목소리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이후 1차 세계대전 발발이 감지된다.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전쟁에 참전하고, 전쟁 중 야전병원에서의 마지막으로 만난다.
그 만남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이룬다. 싱클레어는 자신의 내면에서 데미안을 보게 되고, 그와 완전히 닮은 자신을 찾는다. 친구이자 인도자인 그(데미안)가 이제 자기 자신(싱클레어)이 된다.
2010년 2월 2일, 맥퀸의 어머니 조이스Joyce는 세상을 떠난다. 맥퀸은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어머니와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성장했다. 이사벨라 블로우의 죽음 이후 우울증을 앓고 힘든 시간을 보내던 중 가장 가까운 어머니를 잃은 맥퀸은 큰 충격에 빠진다. 그녀의 죽음을 트위터에 알리며 '그래도 삶은 지속된다' 고 말했던 그였다. 항간에는 남자친구와의 결별 또한 영향을 끼쳤다고 하나, 어머니의 죽음은 그 무엇보다 가장 큰 무게감이었을 것이다.
9일 뒤, 알렉산더 맥퀸은 런던 자택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트위터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글을 남겼고, 심한 우울증을 앓아 왔다는 점을 들어 자살로 추정된다고 BBC는 보도했다. 이날 오후엔 그의 세컨드 라인인 맥큐*McQ의 패션쇼가 예정돼 있었다.
*맥큐McQ : 맥큐는 브랜드 '알렉산더 맥퀸'의 세컨드 브랜드이다. 해골Skull문양의 스카프와 의상으로 유명하다.
또한 그가 준비하던 2010 F/W 컬렉션은 다음 달 파리에서 선보일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를 완성하지 못한 채, 몇 안 되는 의상은 그의 유작이 된다. 영국 패션협회BFC는 런던패션위크의 시작을 맥퀸을 위한 묵념으로 시작했다. 그의 마지막 컬렉션은 저명한 패션 매거진 편집장 10명 정도만 초대해 작은 규모의 프레젠테이션으로 진행되었다.
마지막 작품은 비장하면서도 엄숙함이 느껴진다. 금빛 깃털에 둘러싸인 재킷과 풍성하면서 우아한 화이트 드레스는 책 데미안의 에바 부인을 연상시키는 듯하다. 하늘로 떠나기 전 그를 이끌어 줄 존재의 평안함을 표현한 것 같은 작품이다.
마지막 그의 작품 모티브인 '새'. 이는 알을 깨고 아브락사스에게 날아가는 맥퀸의 모습이 아닐까.
-데미안, 말머리
「데미안」의 첫 문장으로 마무리 짓는다. 이 문장으로 시작한 책은 주인공에게도,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물음을 던진다. 이는 자기 자신에게서 솟아 나오려는 것을 살아보려 했던 맥퀸도 같지 않았을까. 자신의 작품 세계를 통해 그 물음에 답을 했고, 그 어려움으로 인해 누구보다도 일찍 생을 마감한 알렉산더 맥퀸이었다.
맥퀸에게 있어 패션은 자신의 철학을 전달하기 위한 언어였다. 그 언어는 복합적이었고 의상만, 퍼포먼스만 따로 떼어서 작품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패션을 통한 종합 예술을 선보인 맥퀸은 많은 이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이는 전수할 가치가 있는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책 「데미안」을 인용해 알렉산더 맥퀸의 삶과 브랜드의 흐름을 따라가 보았다. 맥퀸을 잘 아는 분이라면 데미안에 관심을, 「데미안」을 읽어본 분이라면 알렉산더 맥퀸이 좀 더 선명하게 보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둘 다 처음 접하는 분이라면 두 가지를 함께 알아가는 마중물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