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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호 Feb 13. 2022

쇼핑백이 알려주는 취향의 기록

<우연한 소비는 없다>, 다른 이야기

새 옷과 꼿꼿한 종이 쇼핑백. 사물의 형질 차이에서 긴장감이 피어오른다. 몸의 선을 따라 흘러야 하는 부들부들한 옷과 흐물거리지 않고 바삭해야만 형체를 유지할 수 있는 종이 쇼핑백 사이의 간극은 쇼핑의 짜릿함을 배가하는 법. 각진 박스 패키징이 되어 있는 새 상품을 쇼핑백에 담는 맛도 물론 좋지만, 쇼핑백 안의 내용물이 쇼핑백과 닿을 때 느껴지는 출렁임과 흔들거림을 사랑한다. 옷을 감싸는 투명 폴리백이 쇼핑백 안에서 빛을 튕겨낼 때는 더욱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다니기 귀찮아하는 사람에게도 기분 좋은 귀찮음이겠다. 매일 이런 식으로 귀찮으면 소원이 없겠네요.

 

오랜만에 맘먹고 쇼핑을 나섰다. 오늘은 탕진 좀 하렷다. 백화점과 몰이 결합된 복합 쇼핑몰. 각양각색의 브랜드와 먹을거리, 넉넉한 주차공간이 있어 쇼핑에 필요한 삼박자를 갖춘 곳이라 애용하는 곳이다. 마음을 사로잡는 무언가에 상기된 사람들의 들뜬 공기와 식욕을 유발하는 음식 냄새, 새로 나온 향수 냄새, 지나가는 행인의 속도에 살짝 흔들거리는 행거에 걸린 옷 냄새들 사이를 낭랑하게 쇼핑백을 들고 거니는 날이다.

상품의 뒤에서 MD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의 쇼핑은 조심스러운 가운데서도 내질러 감행하는 소비여서 경우에 따라서는 비장한 감이 없지 않다.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들어간다. 좋아하는 브랜드 매장을 들러 이번 시즌의 옷들을 한 번 훑어주고, SPA 브랜드를 들러 기본 아이템을 고르고, 그 옷 위에 개성을 더할 잇 아이템을 찾는 것. 하지만 늘 그렇듯 계획은 틀어지게 되어 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라는 권투 선수 마이크 타이슨의 명언을 곱씹을수록 맞는 말이다. 월말 카드값에 처맞는 말.

 

좋아하는 브랜드 매장을 들르자마자 계획은 틀어졌다. 이렇게나 마음에 드는 옷을 만들다니요. 안 살 수 없다. 빛나는 옷을 만들어낸 MD와 디자이너에게 경의를 표하는 마음으로 결제. 네모 반듯한 쇼핑백에 옷을 담았다. 물론 환경부담금은 필수다.


옛 오락실 구석에 있던, 구슬을 튕겨 내어 벽과 장애물 사이를 부딪히며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핀볼 게임의 구슬처럼, 쇼핑몰 안의 매장들을 이리저리 튀어 다녔다. 양손에 네모 각진 쇼핑백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양팔을 휘저으며 걸을 때 느껴지는 쇼핑백 안 새 옷의 무게감이 맘에 든다. 바리바리 쇼핑백을 이고 돌아온 차 뒷좌석에 일렬로 쇼핑백을 늘어놓았다. 제각각의 크기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귀엽다고 느껴지는 건 병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와 쇼핑백 안에 담긴 옷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전신 거울 앞 자체 패션쇼를 거하게 치렀다. 갖고 있던 옷과 새 옷을 매치해보고, 어울리는 신발까지 꺼내본다. 가지가지한다, 란 말을 들을 법한 요란법석이지만 다들 한 번씩은 해보지 않았을까. 아니라면 어쩔 수 없다만.


쇼핑백 안을 채웠던 옷들을 정리하고 비워진 쇼핑백들을 다시 네모 납작하게 접었다. 이 쇼핑백들은 언젠가 다른 무언가를 담는데 요긴하게 쓸 녀석들이겠다. 하지만 한쪽 구석에 그런 의도로 쌓아놓은 쇼핑백 더미를 보아하니 요긴하게 쓸 일 보다 쇼핑을 더 많이 했구나,라고 깨닫는 건 시간문제. 켜켜이 쌓인 쇼핑백을 보니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와 구입한 횟수가 도서관 대출 카드 기록처럼 보이는 듯하다. 일일이 쇼핑을 기록하지 않지만 모아둔 쇼핑백은 나의 브랜드 취향과 소비 취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쇼핑이 기분을 좋게 해 주는 이유는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어서만은 아니다. 갖고 싶은 것을 고르고 사는 행위는 자본주의적인 자유의 상징이다.

- <남자는 쇼핑을 좋아해>, 무라카미 류



쇼핑백을 정리하며 기분 좋았던 쇼핑의 순간들을 더듬어 살피어 갔다. 소비뿐만 아니라 소비의 기록을 돌아보는 일도 의미가 있으렷다.  번씩 이렇게 쇼핑백을 정리해보는 일도 나쁘지 않겠다.  대신 나의 소비의 역사를 알려주는 나름의 의미 있는 지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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