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어 그림에 담긴 이야기
전시를 하면 사람들이 종종 내 고등어 그림에 대해서 물어온다. 나이 불문, 국적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물어봐주신다는 점에서 기분이 정말 좋다. 특히 고등어 그림 뒤에는 숨겨진 이야기들이 많다. 얼마 전 기분좋은 메시지도 받게 되어서 오늘은 고등어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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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은 직장을 퇴사하기로 하고 내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 시기였다. 고민에서 그쳤으면 좋겠지만 그 씨앗은 불안, 우울 증세로 자라나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까지 힘들게 만들었다. 그렇게 먹는 걸 좋아하는 내가 끼니도 거르게 되고 얼굴은 수척해져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가족들은 가물어가는 날 다시 일으키기 위해 애썼다. 누나는 내가 오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심리상담에 대해서도 제안했다. 그렇게 나는 두어 번 심리치료사에게 상담도 받고 약도 처방받았다. 그렇게 반년 간은 정신이 온전치 못해 제대로 된 그림도 그리지도 못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이유로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내가 싫었다. 그때 나는 내가 내 감정을 그림으로 그리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건 정상적인 직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작업이 멈춰지니 내 커리어 또한 올스톱되었다. 불안은 더 커지고 악순환이 계속됐다.
2017년 9월 29일 저녁, 멍한 상태로 침대에 걸터누워 하릴없이 티비 리모컨으로 채널만 빙빙 돌리며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때 그물에 걸려 팔딱거리는 고등어들이 화면에 펼쳐졌다. 고등어들은 그물 밖으로 나오기 위해 치열하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다음엔 고등어가 여러 음식점으로 유통되어 다양한 조리방식으로 요리되는 장면이 잡혔다. 뜬금없게도 그 풍경 속 고등어에 감정이입이 됐다. 소위 흐리멍덩하고 덜떨어진 눈을 가리켜 ‘생선 눈깔’이라고들 하는데 그 고등어의 눈이 유난히 내게 구슬프게 다가왔다. 말미에는 고등어의 영양성분에 대한 소개가 나왔는데 그런 것들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순간, 오늘 저녁 반찬상에 올라갈 고등어에게는 내일이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물 위에서 팔딱 거리는 고등어에게서 치열한 생존의 욕구를 느꼈다. ‘아주 낮은 확률이겠지만 개중에는 간신히 그물을 빠져나와 다시 자유로운 바다로 탈출한 고등어도 있겠지…’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리고 티비를 끄고 바로 그림을 그렸다. 정말 오랜만에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오른쪽의 커다란 고등어 한 마리가 남자에게 “힘내, 그래도 너에겐 내일이 있잖아”라고 말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그렸다.
그 이후로 무작정 베를린으로 떠나 그곳에서 1년을 보냈고, 그 기간 동안 여러 사람들과 새로운 환경을 접하며 내 마음의 병은 조금씩 사라졌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이 그림을 보면 속상한 기억도 떠오르고 슬픈 감정에 휩싸였지만, 지금은 정말 기분 좋게 바라볼 수 있는 애정 가득한 그림이 됐다. 나이, 국적 상관없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그림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재작년 베를린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처음으로 공개했는데 첫 번째 작품이 독일인에게 판매가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접했다. 나는 전시 오프닝만 열고 바로 한국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정확한 그 사람의 신원을 알 수가 없었지만 누구에게 그 그림이 갔는지 정말 궁금했다.
그런데 며칠 전 인스타그램으로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바로 첫 번째 고등어 그림을 구매했던 그 독일인이었던 것이다. ‘2018년에 고등어 그림을 샀던 사람인데, 유럽에서 다른 그림을 사려면 어떻게 해야 하니?’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너무 반가운 마음에 무례하게도 구매자의 직업이나 여러 신원을 물어보고 그동안 궁금했던 말들 그리고 그 작품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전부 쏟아냈다.
친절한 그는 모든 이야기를 해주었다. 놀랍게도 그의 직업은 심리치료사였다. 지금 고등어 그림은 자신과 상담하는 모든 환자들의 시야에 걸려있다고 그리고 환자들이 그 그림에 대해 물어오면 내가 갤러리에 비치해놨던 고등어 그림에 담긴 작품설명을 환자들에게 말해준다고 했다. 또 환자들은 그 고등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자기가 큰 위안을 받는 다고 자신에게 이야기해준다는 말까지 전해주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사무실 사진을 첨부했다. 환자들이 자신과 상담할 때 바라보게 되는 관점이라고 했다.
정말 큰 행복감에 휩싸였다. 한창 깊은 우울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심리 상담을 받고 있을 때 그린 내 그림이 먼 나라의 다른 환자를 만나고 또 미약하게나마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 힘든 기적처럼 느껴졌다.
현실적인 일들에 묻혀 내가 하는 일의 본질을 망각할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어도, 그림이 내 곁을 떠나는 순간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거라는 사실을 상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늘 권태와 위기의 순간 마다 정신 차리고 중심을 잡게 되는 응원과 지지의 손들이 기적처럼 나를 일으킨다. 내 삶에 사명을 갖고 이 감정을 오래 간직하며 창작해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