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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hum Jan 15. 2019

사과

이기는 게 지는 거라고

고2 가을 소풍 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점심시간이었는데, 서로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달라 친구와 사소한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친구는 내게 조금 심한 투로 말을 했고, 나도 그에 질세라 더 날카로운 말로 응수했다. 결국 싸한 분위기 속에 무리는 둘로 갈라졌다. 우리 그 순간부터 서로를 등졌다. 그리고 소풍이 끝나고도 한동안 냉전의 시간을 보냈다.
같은 교실 속에서 늘 가깝게 있으면서도 서로 눈길,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고 둘 사이에 친구 한 명을 끼워두고 
따로따로 이야기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연출되었다. 하루 이틀..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친구와의 관계는 불편해졌다.

“진작에 사과하고 화해할걸..”, “정말 좋은 친구인데..”
화해에 대한 부담은 날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이렇게 멀어지는구나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온 해 질 녘 어느 날.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소풍날 싸웠던 친구였다. 그리고 친구는 웃으면서 말했다.

“ 나훔아,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친구의 따뜻한 용기에 묘한 패배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고, 그 이후로도 지금까지 그렇게 완벽한 패배감을 나는 느껴본 일이 없다. 

‘그래, 이게 지는 거였어…’

늘 잘잘못으로 선을 긋고 고집 강한 나에게 친구는 자존심을 내려놓는 방법을 몸소 보여주었다. 어쩜 그때 이후로 나도 “고맙다”, “미안하다”라는 말을 좀 더 서슴없이 잘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그때 비로소 알게 됐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흘렀지만 그 친구는 나에게 지금도 편안한 한 권의 책이며 안식처이다. 투박한 욕을 섞어가며 거칠게 대화하기도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늘 어떠한 온기가 있다. 지금도 잘잘못을 따져가며 딱딱하게 일들을 그르치려 할 때면 불쑥 그때의 열여덟 살 선생 하나가 기억 속에서 툭하고 튀어나와 나를 다그친다. 이젠 너무 능청스러운 사이가 되어버린 나머지 서로 하트를 그리며 사랑한다는 말도 툭툭 뱉을 수 있는 웃긴 사이.
이런 친구가 있어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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