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과의 조우.

#한대수 #물좀주소 #김진명 #글자전쟁 #KTX

by 하일우

순간의 선택, 평생을 좌우한다지. 시월의 마지막 날. 그날도 그랬다. 조계사 국화향에 취해 늑장 부리다 오후 2시쯤 지하철에 몸을 꽂았다. 1호선이 서울역에 날 뱉어내자마자 닥치고 전력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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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시 15분발 KTX는 스타트 앞두고 슬슬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나를 버리고 가시려는 이 님이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날 리 만무하고. 이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기 전에 올라타야 했다. 달리는 기차가 밖으로 뿜어낸다는 리얼 사운드, '허접하다 허접해 아으'가 고막을 유린하는 꼴을 좌시할 순 없었다.

아내가 잡아준 자리는 1호차 6D. 여느 때처럼 1호차 앞까지 가서 탈까 하다가 3호차쯤에서 몸을 던졌다. 안도의 한숨을 격하게 몰아쉬며 2호차 통로를 잽싸게 지나는데, 낯익은 얼굴이 망막에 맺힌다. 답설무흔(踏雪無痕) 경공술로 저만치 날아가던 발걸음을 돌연 붙들었다. 비디오테이프 리와인드 하듯 휘리릭 뒷걸음질. 허리를 굽히고 말머리 꺼냈다.

"한대수 선생님 아니세요?"
"어, 맞어~"
"어디 가세요?"
"경주. 행사가 있어서. 자네는 어디 가나?"
"전 청주요. 여기서 뵈니, 무척 반갑네요. 늘 건강하세요!"

평소 흠모하던 우상을 친견하는 일은 진정 짜릿한 경험이다. 올해로 두 번째. 첫 경험은 플라자 호텔에서였다. 응급의학과 전문의 2차 시험 앞두고, 그날도 시간에 쫒기고 있었다. 빈번한 데자뷔를 기대하며 하나라도 눈에 더 바르려다 고사장 입실 시간 임박! 짐 추스리고 세브란스병원으로 곧장 갈까 하다가 세븐스퀘어로 발길 돌렸다. 조금이라도 배를 채워야 단기기억 중추가 제 몫을 다할 것 같았다.

조급할 躁, 조식을 해치우러 한적한 테이블에 착석했는데, 그 자리가 명당일 줄이야.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아메리카노 마시는 중년 신사에게서 기시감을 느꼈다. 지인 프로파일 중 저런 인상착의를 지닌 분은 김진명 작가님뿐. 내 안구에 켜진 그린라이트 감지하셨는지 나와 교감하는 시간을 잠시 허락하셨다. 덕분에 항진된 교감신경이 진정됐고, 시험에선 선방했다. 김 작가님이 행운의 노란 택시 같은 역할을 하신 셈이다. (당시 그는 신간 도입부 첫 문장을 출판사 관계자와 논의 중이셨다. 그때 그 책이 <글자전쟁>이었단 걸 얼마 전에 읽어보고 알았다.)

우리 시대의 탁월한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음악을 일러 'auditory cheesecake'이라 했다. 귀로 먹는 치즈케이크라는 건데, 한대수 옹의 음악은 'auditory makgeolli'가 아닐까 싶다. 육성을 직접 들으니 과연 참 막걸리스러우시다. 공보의 시절, 진천 덕산의 보건지소 진료실에서 아리랑 라디오로 걸걸한 그의 목소리 들을 때부터 느꼈던 바이지만.


짧은 환담 굵게 마치고 내 자리에 무사히 안착했다. 열차가 '허거쿡꾹구구구국 허걱커걱컥컥' 거친 숨결 뱉으며 내달린다. 그제서야 갈증이 밀려왔다.

물 좀 주소. 목마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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