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극과 반응 사이

박재연과 정유정

by 하일우

<영풍문고>에서 '가이드포스트' 펼쳐
페친 박재연 대표님 인터뷰를 훑었다.

그녀가 소개한 빅터 프랭클 박사의
한 마디가 가슴에 공간을 만든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공간이 있으며,
그 공간에서 선택을 할 수 있다."

작가 정유정도 <7년의 밤>
말미에서 이렇게 읊조렸다.


운명은 때로 우리에게
감미로운 산들바람을 보내고
때론 따뜻한 태양빛을 선사하며,
때로는 삶의 계곡에 '불행'이라는
질풍을 불어넣고 일상을 뒤흔든다.
우리는 최선의-적어도 그렇다고 판단한-선택으로
질풍을 피하거나 질풍에 맞서려 한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최선을 두고

최악의 패를 잡는 이해 못 할 상황도

빈번하게 벌어진다.

사실과 진실 사이에는
바로 이 '그러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소설은 '그러나'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을 끝내던 날, 나는
책상에 엎드린 채 간절하게 바랐다.
'그러나' 우리들이,
빅터 프랭클의 저 유명한 말처럼,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스'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자극과 반응 사이의 공간에도
바로 이 '그러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의 공간에서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예스'를 선택한다면
삶의 응답 또한 달라질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팔자를 벗어날 수 있는가."
사주를 풀어주고 나면, 흔히 받는 질문이다.

이에 대한 내 대답은 늘
"팔자에 없는 짓을 해라"다.

그러나, 범부들은 자신들에게 탑재된
여덟 글자(八字)의 카테고리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외부 자극에 대해 늘 같은 패턴으로 반응한다.
그러니 항상 같은 결과가 도출될 수밖에.
최악의 패를 잡는 이해 못 할 상황은

그래서 늘 벌어진다.

브라질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도 그랬다.
"If you think adventure is dangerous,
try routine. It is lethal."
(모험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면,
항상 똑같은 일만 반복하라.
그것은 치명적인 위험이 될 것이다.)

팔자(routine)의 구속에서 풀려날 수 있는
여덟 글자라며, 내가 종종 일러주는 주문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극과 반응 사이,
'그러나'의 공간을
이런 선택들로 채워보시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쟁!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신!

그리하면, 팔자타령에서 벗어나
운명애(Amor fati)로 나아갈 수 있다.
더불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샤방하게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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