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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부건 Nov 02. 2019

할로윈 묵상


짜파게티 먹고 설거지하다 그릇에 손가락 베인 청년. 봉합해야 한다고 했더니 그냥 가루만 뿌리면 붙는 거 아니냐며 눈을 깜빡입니다. 제가 좀 더 연구해서 그런 신박한 가루 만들어보겠노라 말씀드리며, 허튼소리 하는 입부터 한 땀 한 땀 꼬맸습니다.



남자친구랑 응급실 들어선 처자. 새끼손가락이 어긋났다며 미간을 찌푸립니다. 어쩌다 손가락이 탈구됐는지 물으니, 가방 들다 손가락이 휘었답니다. 그 가방 제가 들어보니 제법 묵직하네요. 똑딱 단박에 탈구를 정복하고, 가해자 가방을 혼내주었습니다. 명품이 이렇게 위험합니다.



공사장에서 일하다 갑자기 두통 호소한 아저씨. 숨골 부위까지 뇌출혈이 번졌네요. 응급수술 준비하며 혈압을 조절하고 중심정맥관을 즉각 삽입하였습니다. 회생 가능성은 의학적으로 희박하지만, 기적을 신학적으로 희망하며 환자를 수술방으로 올려보냈습니다.



잠시 한숨 돌리는데, 퇴근하는 가장이 사진을 보내옵니다. 사진을 보고서야 깜빡했던 오늘의 좌표를 문득 떠올렸습니다. 가수 이용의 노래를 한 번은 듣게 되는 오늘은 할로윈 데이. 우리 집 초딩은 영어 학원 파티에 제대로 분장하고 출동했네요. 누구 코스프레냐고 물으니, ‘(미모의) 뱀파이어’랍니다.



할로윈(Halloween). 모든 성인 대축일 전날인 10월 31일에 매년 행해지는 전통 행사입니다. 이날엔 죽은 영혼이 다시 살아나며 정령이나 마녀가 출몰한다죠. 그들을 놀려주기 위해 사람들은 유령이나 괴물 복장을 하고 축제를 즐깁니다.


All Hallows’ Even(ing) => Halloween


거시기 과장이 심한 할로윈 복장.

모든 성인 대축일, 만성절(萬聖節)은 하늘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기독교 대축일입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11월 1일, 그리스 정교에선 성령강림주일 이후 첫 번째 일요일에 기념합니다.



만성절은 10월 31일 저녁에 시작해 11월 1일 저녁 때 끝납니다. 모든 성인의 축일은 원래 5월 13일이었으나, 9세기 중반 교황 그레고리오 4세가 축일 날짜를 11월 1일로 이동시켰습니다(이유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만성절의 성묘객들은 우리처럼 무덤 앞에서 절을 하진 않습니다. 대신 묘지 위에 올라가 낮잠을 즐기고 맛있게 먹고, 책이나 신문을 봅니다. 이런 정겨운 방식으로 고인을 추모합니다. 되도록이면 묘지 위에 오래 머물다 가는 게 효도라네요.



죽은 자들의 날(망자의 날, 10월 31일~11월 2일)도 있습니다. 영화 코코(Coco)의 모티브가 된, 007 시리즈에도 등장했던 멕시코의 최대 명절입니다. 이 기간엔 세상을 떠난 가족과 친지의 명복을 빌며 축제를 엽니다. 저 세상으로 떠난 이들의 사진 앞에 생전에 고인이 좋아했던 음식들 놓고 그들을 추모한다죠. 마냥 슬퍼하지 않고 음악을 즐기며 흥겨운 분위기 만끽합니다.

철학이 ‘죽음의 연습’이라지만, 운동 또한 그러합니다.

10월을 떠나보내며 응급실에서 떠나보낸 생명들을 문득 떠올립니다. 어렵게 사신 분들이, 어렵사리 살려낸 이들이 쉽사리 숨을 거두곤 합니다. 굴곡진 인생의 허망한 귀결, 헛헛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마냥 슬퍼하진 않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저 세상에선 흥겨운 축제 누릴 것을 믿(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재표 시집, <도플러 효과에 속다> 중 문상. 제 일터의 지하에도 장례식장이 있습니다.

죽음은 느닷없고 가깝습니다. 문턱 밖이 저승입니다. 그걸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 돈오(頓悟)가 느닷없이 쏟아집니다. 그 통찰의 한 토막을 10월에 우리 곁을 느닷없이 떠난 마왕 신해철이 일찍이 일러준 바 있습니다. “유전자 전달이라는 목적은 태어남 자체로 이루었으니 인생은 보너스 게임, 산책하러 나온 거다.”


산책하기 딱 좋은 계절입니다. 더 추워지기 전에 더 자주 걸어봅니다. 산 책들도 더 자주 뒤적입니다. 보너스 게임 더 잘 즐길 수 있는 꿀팁도 발굴할 겸.



生由於死하고
死由於生하니라.

​삶은 죽음으로부터 말미암고
죽음은 삶으로부터 말미암느니라.

道典 4:117:13
작가 브로니 웨어가 손꼽은 후회 ‘라면’ 5종 세트. 죽어갈 때 이런 라면을 입으로 삼키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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